무풍지대

고요를 순풍이라 믿었던 순간

by 심연천문대

언젠가, 운명이라고 착각한 사람이 있다.

다이내믹했던 긴 연애의 실패 직후라서였을까.
그 사람을 마주했을 때, 순풍을 만난 돛단배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 사람과는 자연스레 앞으로 나아가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막 솔로로 데뷔한 서툰 나의 착각이었다.
이전 연애가 너무 힘들어서 이번에는 고요함을 운명이라 믿었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고 나는 멈춰버린 배가 되었다.
서툰 나는 재정비 중인지, 이미 좌초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내가 좌초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좌초된 배에서 탈출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왜일까.
혼란으로 뒤덮인 마음의 연주는 끝내 길을 잃었다.
밖은 너무 추운 바다였다.


구조선을 기다릴지, 구명보트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설지 선택해야 했다.
구조선을 기다리면 따뜻하고 안락한 여운을 더 즐길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탈출하기로 했다.

용기 내어 망망대해로 나선 나를 맞이한 건,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였다.


무풍지대에 와서야 알았다.
사실, 바람은 처음부터 불고 있지 않았다.

나는 폭풍 뒤의 고요를 순풍으로 착각했다.

바람의 힘으로 항해하는 범선에게 역풍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바로 무풍이다.


‘사르가소 해’라는 유명한 무풍지대가 있다.
해류의 중심에 있어 플랑크톤조차 거의 없는 깨끗한 바다.
하지만 여러 해류에 떠밀려온 파선의 잔해가 많아 ‘배의 무덤’이라 불리는 바다.
이곳은 유령선의 모티브가 되었다.
선원들은 모두 굶어 죽고, 배만 멀쩡히 남은 채 우연히 무풍지대를 빠져나온 사람 없는 유령선.
그렇게 바람이 없는 고요한 바다는 조용히 사람들을 죽여가고 있었다.

나는 그 고요한 바다에서 떠밀려온 선박의 잔해를 나를 구하러 온 구조선으로 착각했다.

참 웃기는 일이다.
역풍보다 더 위험한 무풍지대에서 혼자 안도하고 있었다니.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탄 배를 움직여 줄 순풍이라는 바람(願望)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불어올 진짜 바람을 맞이하기 위해, 닻을 내리지 않은 채 기다리면서.


하지만 물 위는 마찰력이 매우 약해서 노를 저어 인력으로도 배를 끌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스스로 노를 저어 바람이 부는 곳까지 나아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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