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젤은 자유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영혼은 본래 자유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을 뿐.”
— 루소
인간은 늘 자유를 갈망한다.
그러나 자유는 처음부터 존재하던 감각이 아니었다.
자유란, 원래 하던 무언가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결핍의 이름이다.
나는 그 결핍이 인간의 원초적 행동 원리, 즉 ‘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초기 호모 사피엔스는 끊임없이 이동했다.
사냥을 위해, 물을 찾아, 계절을 따라 이동했다.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를 거쳐 아메리카까지 걸어갔다.
이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들에게 ‘자유’라는 개념은 애초에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생존 본능으로 달리는 가젤이 자유를 느끼지 않듯이.
그러나 이동은 피로를 동반했고 소모적이었다.
위험했고, 마침내 안전을 갈망하게 했다.
이동은 본능이었지만, 인간은 멈추기 위한 구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농경은 마침내 인간을 정착시켰다.
움직이지 않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생겼다.
정착은 안전을 주었지만, 동시에 이동 본능을 봉인했다.
그리고 반전이 시작된다.
이동이 더 이상 생존이 아니게 되자, 떠나는 일은 ‘벌’이 되었다.
공동체 밖으로의 유배는 곧 사회적 사망이었다.
이제 이동은 자유가 아니라 형벌이었다.
근대 산업화는 이를 심화시켜 ‘정지’시켰다.
도시 집중화가 진행되면서 이동은 비효율로 간주되었다.
신체는 더 이상 이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인간은 하루 대부분을 고정된 장소에서 보냈다.
도시에 살게 된 인간은, 공장에서 사무실로 노동 환경이 점차 이행했다.
사무실, 책상, 의자, 모니터 앞에서 우리는 점점 ‘앉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서서히 고정된 존재가 되어갔다.
안전과 효율은 결국 이동을 축소하는 구조를 낳았다.
몸이 멈추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인간은 자신이 잃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시 ‘이동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욕망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자유다.
그렇게 자유는 ‘이동의 결핍’에서 탄생했다.
이 시점에서 결과는 한 번 더 뒤집힌다.
이동은 다시 ‘자유’가 되었다.
이제 인류는 ‘감옥’, ‘가택연금’이라는 벌로 이동을 금지하고 고립시킨다.
그리고 현대인은 여행을 떠난다.
고정된 채 살게 된 인간은 이동 본능의 회복을 ‘여행’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여행지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는 가능성’ 자체에 감동한다.
자유란 목적지가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한때는 정착이 자유였고, 이동은 추방이었다.
지금은 이동이 자유이고, 고립이 감옥이 되었다.
자유를 갈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유를 잃었다고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잃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가 변한 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루소의 말은 진격의거인의 에렌을 떠올리게 했다.
벽 안에 갇혀 살던 그는, 벽 밖의 세계라는 결핍으로 자유를 갈망했다.
어쩌면 에렌은 새를 본 것이 아니라, 자유의 빈자리를 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자유는 언제나, 잃어버린 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