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창고로서 먹는 즐거움의 보고라고도 할 수 있는 냉장고가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10여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살림과 소원해지더니 오십 줄에 들어서는 살림살이 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냉장고와는 거의 담을 쌓게 되었다. 아이 둘과 남편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주부로서 냉장고는 든든한 병참기지가 되어야 하건만, 나에게는 그점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살림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상징적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나름 계획적인 성향이라 할 수 있는 나는 거의 매주 합리적인 식단을 짜서 장을 보고 제법 살림꾼 흉내를 내며 가족들의 식량창고를 든든하게 채워 둔다. 그러나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호기롭게 짜놓은 저녁식단이 부메랑처럼 심적, 육체적 부담이 되어 돌아오고,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게으름과 압박감에 쫓겨 종국에는 만사를 포기해버린다. 그럴 때마다 나의 게으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짐짓 눌러 감추고, 어떻게 하든 명분을 만들어 외식이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오늘만, 오늘까지만 하며 냉장고문 열기를 멀리하는 사이 싱싱하게 냉장고로 입성했던 식자재들은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몇 날 몇 주를 방치되다 처참하게 사망한 채로 남편의 손에 이끌려 나오고 만다. 냉장고에서 부패한 식재료들이 속출하며 하나, 둘 비워지는 사이 부패를 방조하고 주부로서의 책무를 방임한 죄책감도 조금씩 비워지고, 어느 순간 나는 또다시 새로운 계획을 재정비하고 비워진 냉장고에 싱싱한 식재료들을 채워 넣는다. 하지만, 이내 휘청이는 체력과 병증에 발목이 잡혀버리고 외식과 배달음식으로 버티며 냉장고를 기피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냉장고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식자재들이 상상되지만, 그럴수록 냉장고는 점점 더 큰 부담과 두려움의 존재가 되어 나의 폐부를 압박해 온다.
오늘 아침에도 두어 달 방치되었던 냉장고를 열자 수많은 식재료들이 용도를 잃고 사망한 채 우루루 실려 나왔다. 살림을 포기한 나를 포기한지 오래인 남편은 한 보따리가 된 음식쓰레기 봉투를 들어 보이며 “어휴, 양손으로 들기도 버겁네.” 하며 긴 속 없이 웃어 보인다. 그렇게 남편의 손에 들려 방출된 식자재들은 나의 양심과 함께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푸스의 굴레처럼 냉장고에 대한 나의 도전과 좌절, 기대와 두려움의 악순환은 끝날 줄을 모른다.
내 삶을 돌아보니 수 십 여 년을 살아온 나의 족적이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들 투성이인 것만 같다. 해마다 연말만 되면 다음해 새로 시작할 다이어리와 일기장, 독서 노트 등 분야별 기록장들을 사며 기대 만발하여 뿌듯해 하다가는 한 분기도 못 채우고 텅 빈 일기장과 뭉텅 뭉텅 비워졌다 채워지기를 반복하는 다이어리와 각종 기록장들을 보며 자책하면서 전전긍긍 한 해를 보내는 것이 반복되어 왔던 것 같다.
삶이, 우리네 인생 자체가 완벽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 어쩔 수 없는 이치라 한다지만, 반백살 삶의 여정이 어찌 이리도 어리숙하고 엉터리인지 낯이 뜨거울 지경이다. 냉장고에 대한 나의 부채의식은 흡사 불성실하고 열정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부채의식에 다름 아닌 듯도 하다.
냉장고에 대한 사유가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역시 나는 뜨거운 열의와 열정으로 불타오를 자신이 없다. 다만 반백살을 살아내고 나니 내 안에 아직도 건드려보지 못한 가능성들이, 손 대지 않은 식재료들이 적지 않고 그것들을 꺼내어 어떤 형태로든 만들어 보려 하지 않은 채 방임해 버린 기회와 시간들에 대한 회한이 남는 것만은 사실이다.
냉장고를 비워내고 새로운 식단을 재정비하듯 후회와 회한을 쓸어내고 또다시 새로운 책들과 기록장들을 꺼내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 본다. 시동이 꺼져버린 엔진을 다시 가동시키듯 노안에 글자들을 담아보고 비어 있던 백지에 몇 자 안되는 사유와 상상들을 끄적여 보며 안간힘을 내본다.
이것이 찬란하지 못했고, 화려해 본 적 없었던 소소한 삶이나마 끝날까지 최선을 다해 발광해 보려는 나의 숙명인 듯이 말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나는 핸드폰을 켜고 열심히 장바구니를 채운다. 내일 새벽 문 앞에는 어김없이 싱싱한 식재료들이 새롭게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과연 두려움을 걷어내고 냉장고와 화해할 수 있을까? 또한번의 도전을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