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씩 정성을 쏟아 기록해 온 11장의 달력들을 후루륵 넘기며 가볍게 일별해본다. 촘촘하게 깨알같은 글씨가 박혀 있는 달이 있는가 하면, 썼던 것을 찍찍 긋기도 하고 뭔가는 화이트로 누덕누덕 지우기도 한 어지러운 달도 있다. 돌이켜보면 사연 없는 달이 없다.
1월에 인사발령으로 부서 이동을 하고부터 쭉 암울하고 정신없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이전 부서는 독립된 공간에서 직원들과 담소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새로운 부서는 전방 최전선에 배치된 것처럼 몸을 숨길 곳도 없고 길바닥에 나 앉은 노점상이 된 듯한 환경에 직원들도 바빠 이야기 한 번 나눠볼 여유도 없었다. 그리고 부서장과 잦은 마찰로 신경은 벼린 날처럼 날카로워져 신병이 악화되었고, 여름 두어 달은 제대로 출근도 하지 못하고 병가로 집에 누워 있는 날이 태반이었다.
소위 그렇게 무위한 날에도 나는 달력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나갔다. 일상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을까? 새벽 루틴을 적어나가고, 하루 동안 성취해야할 과업들을 기록했으며, 저녁에는 하루의 성과를 확인해서 표시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기록한다고 해서 형편없이 떨어져버린 체력과 의욕이 다시 샘솟는 것도 아니요, 박약한 의지가 강철 같이 벼려져 기록한 것들을 척척 이뤄나가는 일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와 작은 약속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것들을 확인해 나가지 않으면 내 삶은 좌표 없이 길 잃은 기아꼴이 될 것 같아 불안했다.
그렇게 내 다이어리 속 달력은 삶의 이정표요 좌표처럼 내 일상의 형태를 잡아주고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달이 되었다. 그래도 전혀 성과가 없었던 한 해는 아니다. 대학생활을 무위하게 보내고 졸업과 동시에 독서도, 글쓰기도 접었던 내가 삼십 년 침묵을 깨고 글이라는 걸 쓰겠다고 브런치에 둥지를 텄다. 그리고, 일주일에 에세이 한 편, 한 달에 소설 한 편을 목표로 지금까지는 부지런히 목표치에 가깝게 글을 써오고 있다. 이루지 못한 과업들이 많아도 끊임없이 목표를 세워 나가고 의지를 다져나간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도 있겠다.
2022년을 두 달 남긴 지난 달부터 2023년 달력에 기록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막내 졸업식과 스물 한 번째 결혼기념일, 핸드폰 약정 기한과 엄마 팔순 기념 가족여행 따위 신변잡기들이 적히기 시작했다. 거기에 호기롭게 체중 감량과 단편소설 12편이라는 달성이 의심되는 고된 목표도 감히 적어보려고 한다. 나같이 초보 습작생에게 가당키나 한 목표겠는가. 그럼에도 우격다짐으로 2023년 좌표를 달력에 기록해 본다. 살아지는 대로 나를 규정하는 삶은 50년 동안 충분히 경험했으니, 이제는 규정하는대로 살아보는 50년을 도전해보려 한다.
이단 책받침대에 올려 놓을 탁상용 달력은 두 달씩 볼 수 있는 것으로 구비했다. 지나온 달과 다가오는 달을 나란히 보며 어딘가 좀더 충실하게 목표에 매진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욕심에 구매한 달력이다. 아직은 비어 있는 2023년 1월과 2월 달력에는 글을 완성할 때마다 동그라미를 그려 넣을 생각이고, 책 한 권을 읽어낼 때마다 별표를 그려볼까 한다. 1부터 30까지 반복되는 숫자들은 재기의 기회같기도 하다. 또 한번의 1일, 또 한번의 2일이 기다리고 있는 달력에 또 한 번의 도전을 시도해보며 매번 새로운 1일, 또 다른 2일을 맞이해 보고 싶다.
며칠동안 새로 시작할 소설 구상이 떠오르지 않아 의기소침한 나에게 달력을 사유하며 힘을 불어 넣고 싶어 이 글을 썼다. 성취만이 의미를 갖는다면 내 인생은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 남아날 일이다. 도전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거라 자위하고 싶다. 도전의 힘으로 12장의 달력을 써나갈 2023년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힘을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