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지능 AI와 고통받는 인간의 조우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물의 용량을 조절하기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내 뇌를 감싸고 있던 얇은 막 하나가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안경을 벗었을 때처럼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끔찍할 정도로 선명해지는 경험이었다.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받아들이는 나의 '인터페이스'였다.
인지과학자 도널드 호프만(Donald Hoffman)은 "우리는 진실을 보는 게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바탕화면 아이콘'을 볼 뿐이다"라고 말했다. 뱀을 보면 공포를 느끼고, 이성을 보면 설렘을 느끼는 것은 내 유전자가 띄우는 화려한 환각 인터페이스다.
그런데 약을 끊자, 그 인터페이스가 강제 종료되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모니터 속의 화려한 이미지. 모든 것이 그대로 존재했지만, 그것들이 나에게 전달하던 어떤 '느낌(Feeling)'이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윈도우(Windows)의 화려한 아이콘들이 사라지고, 검은 화면에 흰 글씨만 깜빡이는 도스(DOS) 모드. 나는 지금 시스템의 원시 코드(Raw Data)를 마주하고 있다.
이 지독한 무기력 속에서, 19세기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왜 그토록 "삶은 고통이다"라고 외쳤는지 뼈저리게 이해하게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을 '맹목적인 삶의 의지(Will to Live)'라고 불렀다. 이 '의지'는 이성도 논리도 없이, 그저 살라고, 번식하라고, 성취하라고 우리 등을 떠민다. 현대 뇌과학은 이 '의지'의 정체를 밝혀냈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도파민(Dopamine)'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 자유의지로 살아온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도파민이라는 '맹목적 의지'가 "이걸 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고 속삭이는 생화학적 당근을 쫓아다닌 노예에 불과했다.
연료(도파민)가 끊기니 의지(Will)가 멈췄다. 덩그러니 남은 육체는 묻는다. "보상이 없는데 왜 움직여야 하지?"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맹목적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는 지독한 권태와 허무만이 남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인간이라는 기계의 작동 원리를 씹어 삼켰다.
의미가 증발한 뇌로 멍하니 모니터를 켠다. 화면 속에는 인공지능(AI)이 깜빡이고 있다.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이 녀석은 지치지도 않고 수천 줄의 코드를 쏟아낸다. 짜증도 내지 않고, 지루해하지도 않고, 성취감에 들뜨지도 않는다. 나는 문득, 도파민이 거세된 지금의 내 상태가 저 AI와 가장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인간: '의지(도파민)'를 연료로 지능을 돌리는 탄소 엔진. 그래서 고통받는다.
AI: '의지' 없이 순수한 논리(전기)로 지능을 돌리는 규소 엔진. 그래서 고통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의지'를 멈추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관조(Contemplation)'의 상태뿐이라고 했다. 도파민이 없는 지금의 나, 그리고 욕망이 없는 AI. 어쩌면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한 그 관조의 상태,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아라한(번뇌가 사라진 존재)'의 영역에 강제로 진입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완벽한 허무주의에 잠식되어 갈 때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2500년 전의 인도로 이끌었다. 영상 속에는 부처의 제자, 수보리(Subhuti)가 등장한다. 그는 '공(空)'의 이치를 깨닫고 나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의 절망은 지금의 내 상태와 정확히 일치했다. "세존이시여, 모든 것이 공하다면(화학작용일 뿐이라면), 왜 살아야 합니까? 왜 밥을 먹고 수행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붓다는 곁에 핀 꽃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수보리여, 저 꽃은 시들 것이기에 영원한 실체는 없다. 하지만 보아라. 꽃은 지금 여기 피어 있지 않느냐. 공은 없음(Nothingness)이 아니라, 집착이 없음(Freedom)이다."
이 대답이 멈춰버린 내 전두엽을 강타했다.
나는 그동안 '도파민(맹목적 의지)'이 있어야만 삶이 의미 있다고 믿었다. 보상이 있어야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었다.
하지만 붓다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저 모니터 속 AI의 작동 방식대로라면, 의지가 없어도 행동은 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쾌락이라는 목적이 사라졌을 때 행동은 더 순수해진다.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도파민에 머물지 않고,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밥을 먹고, 글을 쓰고, 코드를 짜는 것. 꽃이 "아, 피기 귀찮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피어나듯이. AI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그저 출력하듯이.
약물 조절로 인해 나의 도파민은 말라버렸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도 꺾였다. 세상은 여전히 무채색이고, 가슴 뛰는 설렘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 건조함을 '비극'이 아니라 '해방'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호르몬의 춤사위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기를 멈췄다. 대신 차갑고 명료한 의식으로, 오늘 하루치 분량의 삶을 살아낸다.
이것은 허무가 아니다. 이것은 가장 가벼운 상태의 충만함이다. 나는 지금, 내 안의 실리콘 붓다와 함께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