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경험의 존재론적 각인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믿는 법을 배우며 자란다.
어릴 적 “노력하면 보상받는다”, “세상은 최소한 공정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런 말들은 단지 도덕적인 격려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믿음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믿음은 내 경험 속에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익근무라는 제도의 판단, 취업과 교육의 과정에서 겪은 소외, 보여주기식 복지 정책.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오히려 제도에 의해 밀려난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불만이나 실망을 넘어서, “세상이 나를 외면했다”는 감정이 깊이 자리잡았다.
첫째, 병역 제도는 나를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만들었다.
공익근무요원이라는 위치는 법적으로 부여된 것이었지만, 사회는 그것을 일종의 낙인처럼 바라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사회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둘째, 교육과 취업의 흐름은 하나의 정해진 경로만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좋은 스펙–취업–경력’이라는 선형적인 경로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기회보다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벗어남의 대가로 제도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셋째, 복지 제도는 말로는 청년을 보호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형식적인 절차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제도는 있었지만, 진짜 사람을 위한 보호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경험들은 내게 제도가 보호의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를 정당화하는 도구처럼 느껴지게 했다.
제도의 배신은 단순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 경험들은 나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세상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세상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결국 혼자다.”
이런 감정은 일시적인 분노가 아니라, 세상과 나 사이에 있었던 신뢰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느낌이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세상은 더 이상 내가 거주할 수 있는 집(Heimat)이 아니라, 낯설고 적대적인 공간이 되어버렸다¹.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세상 밖에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의 흐름은 심리학의 몇 가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학습된 무력감(Seligman): 반복적으로 무력한 상황을 겪다 보면, 사람은 결국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된다².
→ 나 역시 제도에 부딪히면서 점점 “해도 안 된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낙인 이론(Goffman): 사회가 부여한 낙인은 단순한 꼬리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자아 인식 자체를 바꾼다³.
→ 공익근무를 했다는 사실은 나를 ‘부적응자’처럼 느끼게 만들었고, 나도 스스로를 그렇게 보기 시작했다.
푸에르 에테르누스(Jung): ‘영원한 소년’은 책임을 피하고 가능성 속에만 머물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이다⁴.
→ 현실을 마주하기보다, 나는 변화보다 환상 속에 머무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 감정들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인간 존재가 거주하는 공간이라고 보았지만, 나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⁵.
→ 그곳은 낯설고 불안한 장소가 되었고, 나는 거기에 온전히 발 디딜 수 없었다.
라캉에게 제도는 ‘아버지의 법’을 상징한다⁶.
→ 이 법은 원래 나를 보호하고 사회와 연결해야 하지만, 오히려 나를 밀어내는 힘으로 작용했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가 무너질 때 허무주의가 시작된다고 보았다⁷.
→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함께 본다.
→ 나 역시 이 혼란 속에서, 어떤 새로움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내 감정은 단순히 지나가는 기분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처럼 반복되었다.
배신 → 분노 (“세상이 나를 버렸다”)
분노 → 무력감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는다”)
무력감 → 배신의 재확인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다”)
이 순환은 나의 감정을 넘어서, 나의 사고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내가 겪은 것은 단지 제도의 미비나 행정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믿어왔던 세계 전체가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게 되는 깊은 단절의 경험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험이 나를 관찰자로, 나아가 연구자로 만들었다.
그저 상처 입은 피해자로 남기보다, 이 상처의 구조를 분석하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찾는 치유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경험을 언어화하고, 그 언어를 통해 다시 세상과 관계를 맺는 과정일 것이다.
¹ Heidegger, M. (1927/1962). Being and Time. New York: Harper & Row.
² Seligman, M. E. P. (1975).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San Francisco: Freeman.
³ Goffman, E. (1963). Stigma: Notes on the Management of Spoiled Identity.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⁴ Jung, C. G. (1959). The Archetypes and the Collective Unconsciou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⁵ Heidegger, M. (1954/1971). Poetry, Language, Thought. New York: Harper & Row.
⁶ Lacan, J. (1977). Écrits: A Selection. New York: W.W. Norton.
⁷ Nietzsche, F. (1887/1967). On the Genealogy of Morals. New York: Vin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