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로 살펴보는 성인 ADHD
성공한 수입차 딜러 이판왕 (54/M)님은 작년 12월 회사의 단 한 명만 선정되는 올해의 판매왕에 선정되어 회사의 지원으로 가족과 3박 4일로 해외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다녀온 지 한 달 후 너무나 무력하고 기운이 없어서 내과에 갔는데 정신건강과로 가도록 들었다며 신원장의 진료소에 방문하였습니다. 도대체 이판왕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진료실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두 번째 방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샘: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스스로 생각한 것보다 우울증상이 높게 나와서 놀랐다고 하셨는데 지금도 스스로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우신가요?
이: 네. 10년 전인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도 제가 생각해도 기특할 정도로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해외여행도 다녀오고 잘 쉬었는데 왜 우울해질 수가 있죠? 그런데 지난번 여기 다녀가고 나서 이유는 알 수 없어도 제가 우울한 것은 맞다는 생각이... (자존심을 구기는 말을 하는 거처럼 말을 흐린다)
샘: 네. 대개 가장 힘든 정점에서는 생존을 위한 엔진의 불이 켜져서 꿋꿋하게 버티다가 괴롭고 힘들었다는 의미를 꼽씹을 정도의 여유가 생길 때 오히려 주저앉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 아.. 저같이 힘든 시기를 지나서 위기가 오는 사람들이 많은가 봅니다.
샘: 네. 그런 경우에는 그만큼 자신이 힘든지 여부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셨던 분들이 많으셨어요. 이판왕님도 이런 어려운 시기에도 판매왕을 달성하시고 정말 열심히 일 하시나 봐요.
이: 네. 제 스스로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분들 저한테 차 사고 10년을 타시더라도 1년 365일 여행지든 맛집 정보든 차 수리 문제. 제가 다 응대해 드립니다.
샘: 그만큼 고객들의 만족이 높을 수밖에 없네요. 10여 년간 고객리스트에 명단이 빼곡해졌을 텐데요. 개인 시간은 거의 없으셨겠어요.
이: 네. 저녁에 8~9시에 밥 먹다가 연락받고 나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 일이 어디 시간 가려가면서 하는 일은 아니죠. 하하. (당연한 신념을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샘: (신원장은 판왕씨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업무에 대한 화제로 대화가 집중되는 것을 다른 화제로 돌리기 위해 고민하다가 첫 시간에 가족 여행 다녀오며 겪었던 일화를 떠올린다)
그만큼 이번 여행에서 따님이 아빠와 대화를 피하고 엄마 옆에만 붙어있었던 게 너무 속상하셨겠네요.
이: 하~ 그렇죠. 참. 애 갓난쟁이 일 때는 잠잘 시간이 부족해도 업고 안고 달래주고 했는데.. 손님과 약속이 있어도 주말에 애와 엄마가 놀 수 있는 곳에 데려다주고 나서 내 일도 보느라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런 건 하나도 기억을 못 하나 봅니다.
샘: 판왕님이 애가 집에만 있으면 답답할까 봐 애를 써 주셨는데 아내분도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이: 실은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행복한 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던 게 작년 말에 아내와 심하게 싸운 후였습니다. 제가 우울한 게 그때가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샘: (작은 눈을 크게 뜨며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아내와 크게 싸우신 와중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 아내가 따로 살자고 했습니다.. 제가 일을 하며 고생하는 것은 알지만 같이 살면서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는 것을 보는 게 힘들다나 어쩐다나.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요? 제가 홧김에 회사 옆에 방 잡아서 살면 되냐고 소리 질렀는데 이후에 말을 안 합디다.
샘: 글쎄요. 저도 자주 늦게 들어가다 보니 그런 말을 들었는데요. 요즘은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아빠의 역할 못지않게 함께 사는 아빠 혹은 남편의 역할도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같이 기억할 수 있는 경험을 쌓아가는 거죠.
이: 아이고. 같이 오래 있으면 잔소리하고 싸우기밖에 더 하지 않나요? 허허. 세상이 많이 바뀌었나 보네요.
샘: 네. 다음 시간에는 첫 진료 전에 했던 검사 중에서 성인 ADHD 가능성을 체크하는 게 있는데요. 거기서 점수가 높게 나타나서요. 그 진단과 관련한 어려움이 있는지 말씀 나누어보겠습니다. 다음 방문 사이에 어렸을 때 어떤 별명이 있었는지, 친한 친구나 부모님께서 판왕님에게 어떤 말을 자주 하셨는지 기억나는 게 있으면 메모해 두었다가 상담 중에 언제라도 알려주세요.
한 달 후, 4번째 방문.
이: 와. 애 키울 때 TV에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인가? 거기서 정말 심란하고 난리 부르스를 하는 애들이 ADHD 진단을 받던데, 저같이 일 열심히 하는 사람도 ADHD라는 말씀이신가요?
샘: 네. 인지 검사도 해봐야겠지만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성인 ADHD와 일중독은 아주 관련성이 높거든요. 판왕님 어렸을 때는 재주꾼이라고 하셨잖아요. 소풍 가면 항상 반 대표로 개그를 치거나 노래를 재밌게 개사해서 부르셨다고 하셨죠? 아마?
이: 네. 지금 생각하면 제가 애들을 웃기는 것이 학교 다니는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샘: 판왕님이 사회성이 좋으신 게 타고났네요. 사람들을 좋아하고 기쁘게 하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시니까 그 넘치는 에너지가 짓궂은 장난이나 사고를 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끼를 발산하는 쪽으로 나타난 거죠. ADHD는 전에 말씀드린 도파민이라는 신경호르몬으로 보상받는 것에 목이 말라 남을 놀리거나 위험한 장난을 하는 것 같이 눈앞의 자극에 쉽게 넘어가버리는데요. 판왕님은 주변 사람들을 웃게 하면 도파민이 뿜뿜 하니까 그런 쪽으로 ADHD 기질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이: 아하. 그러면 제가 애들을 막 웃기고 한 것도 증상인 거네요. 그런 걸로도 치료받는 아이들이 있나요?
샘: 아. 오해하실 수 있겠네요. 애들을 웃기는 것이 ADHD 기질의 발현이지만 그 자체가 증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쁘거나 해로운 행동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부적응하는데 기여하면 증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음.. 그러니까 애들을 웃기기 위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숙제를 안 해가거나 수업시간에 딴생각을 자주 해서 교무실에 불려 간다. 이런 식으로 전반적인 밸런스가 깨지는 원인이 된다면 증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거죠.
이: 와. 그거 재밌네요. 저 선생님한테 자주 불려 갔거든요. 선생님도 제 말에 웃을 때가 많으셔서 그런지 혼내지는 않았는데.. 저한테 조금만 하면 공부도 잘할 것 같은 재치 있는 머리로 왜 공부를 안 하냐고.. 5학년 때인가? 선생님이 애들 있는데서
'판왕이 네가 지금은 공부는 안 하지만 크게 될 놈이다.' 그렇게 말을 하셔서 애들이 그때부터 '왕 될 놈'이라고 하다가 6학년 때 별명이 '왕 놈'이었습니다.
하하하. 그때 참 재밌게 지냈는데..
(지금까지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해맑은 표정이다)
샘: 말씀하실 때 표정이 참 흐뭇해하시는 것 같고 행복해 보이네요. 아마 선생님이 보신대로 머리도 좋으실 거예요. 사람들을 웃기려면 그 집단의 유머 코드를 잘 캐치해서 그 상황에 맞으면서 넘치지 않게 표현해야 하는데 그건 아무나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전력을 다해 고민하고 기꺼이 애를 쓰지만 숙제같이 해야 할 것이나 일상적인 일은 소홀하셨던 것 같네요.
이: (순간 뒷 머리에 왼손을 올리며 긁적인다) 들켰네요. 제가 그걸 기억 못 했어요. 애들한테 인기는 많았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가 "언제 철들래" 몇 만 번은 한 것 같은데. "말 좀 그만해라"가 더 많았나? 어머니 애 먹인다고 형한테 맞았던 일이 부지기수로 많았습니다.
샘: 집에서는 말썽꾸러기 역할이셨나 보네요. 다음 시간에 예고한 대로 CAT라는 주의력을 평가하는 신경인지 검사를 하시고 결과 나오면 뵙겠습니다.
이후 두 번의 진료를 더 받은 후 이판왕씨는 그간 수집된 모든 정보를 고려해서 ADHD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3개월 지난 이번 시간.
이: 약을 복용하고 나니까 우왕좌왕할 일이 많이 줄었습니다. 선생님이 권하신 대로 해야 할 것 꼭 안 해도 되는 것을 전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늘 해왔던 일이 점점 하고 싶지가 않게 됩니다. 원래 이렇습니까?
샘: 아. 그게 말이죠. 어떻게 보면 고객 맞춤을 경중을 가리지 않고 하셨던 것이 증상일 수도 있어서 그걸 판단하시도록 하면서 즉흥적인 반응이 줄어드니까 추진력도 떨어지는 것으로 느낄 수도 있겠고요. 이번 치료를 통해 일의 의미가 달라진 것도 사기에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하. 참 사는 거 어렵네요. 이제 답을 찾았으니 더 잘 지낼 것 같았는데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고객이 요청하는 것을 다 하지 않고 중요한 것 위주로 하고 어렵게 거절도 했습니다만.. 이번에 반기 실적 나올 때 작년 달성한 수치에서 차이가 너무 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도 걱정되고 이렇게 여유 부리고 살아도 되나 싶습니다.
샘: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네. 맞습니다. 살아왔던 방식, 그러니까 나를 수십 년간 충족시켰던 방식을 갑자기 바꾸려니 정말 어려운 일이죠.
꼭 살아온 방식을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번 말씀 나눌 때 이전 방식대로 살면 가족들과 멀어지기 때문에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지금 그 지점부터 출발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이 단계가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아. 어렵습니다. 선생님. 그냥 목표를 주시면 그것대로 할 건데 딱 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샘: (당연한 것을 말하는 표정을 지으려 하지만 난감한 기색을 모두 숨기진 못한 채, 질문에 답은 피하면서 말을 이어간다)
그게 1.2.3 매뉴얼이 있는 것이 아닌 문제이고 판왕님 본인만 하실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걸 찾는 게 이번 여름 아니 올해까지가 될 수도 있고요.
그 사이에 판왕님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인지 나의 동력이 무엇인지 찾아보도록 해보죠.
아무래도 작년 판매왕 타이틀로 인한 부담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당분간 치료제를 더 조절해서 효율적으로 적정 선까지의 업무는 해 가실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고객님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애도 이제 고등학생이라 시간이 없습니다. 아내도 자기 스케줄이 있대요.
샘: (준비된 답이 있다는 듯 빠르게 대답한다) 먼저.. 고객님들에게 안내했던 맛집이나 여행지 같은 고급 정보를 많이 아시잖아요. 거기를 한 달에 한 번? 두 번? 가족들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꾸준하게 같이 가보시는 거죠.
전에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어떤 가치를 찾으려 하는지 천천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이: 아. 전에 그 생각도 해보긴 했습니다. 그거부터 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기 사례는 진료를 받았던 특정인의 개인사가 결코 아니며 상당수의 성인 ADHD 진료 경험을 토대로 한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증상과 참고 문헌의 사례를 재구성하여 작성한 가상의 사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