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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움 즐거움 Feb 18. 2024

포기하지 마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다.

임용고사는 늘 일요일에 있다. 시험 이틀 전 금요일, 그날도 시험이 주는 긴장감 속에 허리 한 번 못 펴고 공부를 했다. 실수로 땅에 떨어뜨린 지우개를 짚으려는 찰나, 삐비빅 전기에 감전된 느낌이 허리를 타고 다리까지 내려왔다. 바닥을 딛는 게 두려웠다. 이게 뭔가 싶어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엄마. 나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차 좀 가지고 데리러 와 줄 수 있어?"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던 딸의 전화에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은 듯 택시를 타고 오라는 말씀뿐이셨다. 집에서 운전이 가능한 사람은 오로지 아빠 한 분인데 10시가 넘어서 주무신단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고단하셨을 아빠를 생각하니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정문을 나와 지하철역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15분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날은 족히 두 배는 넘게 걸렸다. 평지는 어느 정도 걸을만한데 오르막이 문제였다.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어찌어찌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오는 길, 잠을 자고 있던 집안 식구들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나 장난 아니라 진짜 많이 아파, 택시를 타긴 탔는데 조금도 못 움직이겠어. " 엉엉 울음이 나왔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시험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걸을 수가 없어서 시험장에 못 들어가면 어쩌나 두려웠다. 간다 해도 6시간 넘게 어찌 앉아서 시험을 본다는 말인가. 어떻게 준비한 시험인데 아파서 시험도 못 치러 갈까 봐 무서웠다. 이번해는 아마도 그른 듯싶었다


택시에서 내리던 큰길 앞, 온 식구가 다 나와있었다. 펑펑 울고 있는 나를 오빠가 들쳐 엎고 집으로 왔다. 이불을 깔고 누워서도 속상한 마음에 계속 눈물이 나왔다. 다음 날인 토요일 아침, 오빠가 학교 도서관에 가서 내 책들을 모조리 가져왔다. 난 누워서 요점 정리 책을 보고 또 보았다.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정형외과에 가서 소염 진통제를 처방받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도 계속 책을 보았다.


드디어 일요일 시험날이 되었다. 목발을 짚고, 허리에 복대를 하고 간신히 시험장에 들어갔다. 중간에 아프면 나와야 하니 책가방도 무겁게 싸지 않았다. 긴장해서 그런지 시험이 모두 끝날 때까지 통증을 전혀 느껴지지 못했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대학원 원서도 접수했다. 이번 시험은 당연히 떨어질 줄 알았기 때문이다. 대학원 전공도 '교육과정'으로 정했다. 혹시나 내년에 다시 시험 볼 때 교육과정 총론, 각론과 교육학 과목 공부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다.


두근거리는 1차 합격자 발표날,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이번엔 안도의 눈물이었다. 아파서 포기할 뻔했던 나의 도전이 감사하게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허리 디스크에 걸려 걷지도 못했던 그때, 운 나쁘게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 서럽고 암담했던 그 기억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남들처럼 머리가 좋지 않 엉덩이 힘이 많이 필요했다. 두뇌가 명석하지 않으면 끈기와 인내로 극복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일도 하사불성'의 마음으로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성은 내 자산이었다.


얼마 전 함께 사무실을 쓰는 선생님이 전근을 가게 되어 짐 정리를 돕다가 그분의 임용 시험을 준비할 때 사용했던 노트를 발견했다. 깨알 같은 글씨의 명품 필기에 우리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임용된 지 십수 년도 훨씬 넘었는데 이걸 버리지 않았다니, 차마 버릴 수가 없었겠지. 본인이 가장 고생했던 인내의 시절이 그대로 남겨져 있을 테니까. 이건 우리 모두의 공통된 기억이기도 했다

고3 때, 그리고 대학교 4학년 시절, 나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었던 것 같다. 수능 시험을 마치고 졸업도 하기 전, 같은 반이었던 친구 하나가 중3 동생을 과외시켜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자기가 본 어떤 친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나였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내 국사책의 나달거리는 종이를 보았던 거다. 1차로 연필, 2차로 볼펜, 3차로 형광펜으로 밑줄치다가 결국 종이가 뚫어져 버린 걸 본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칠판에 가득 찬 선생님의 필기를 통째로 암기하려 이글거리던 눈빛으로 공부하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수능 끝나면 바로 시작이다. 내 동생 정신 개조 좀 시켜줘. 우리 엄마도 오케이 하셨어. " 공부하는 습관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애쓰던 날들이었다. 포스트잇에 오늘의 공부 계획을 써서 책상머리에 붙여놓고 주말이든 방학이든 고군분투하던 19살의 추억이 떠오른다. 아픈 몸을 달래가며 시험장으로 향하던 23살 겨울의 내 모습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오늘, 옆 자리 선생님의 노트 한장이 내 가슴을 두드린다.

삶의 순간순간 왜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걸까 의문스러울 때마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파란 신호등을 한 번에 다 못 건널까 봐 고민스러웠던 그 순간을 기억해야지. 허리가 아프면 한 걸음 떼기가 꼭 천리길같다. 불편한 다리를 재촉하며 젖먹던 힘을 다해 시험장으로 향하던 그 때의 간절함을 잊지 말아야겠다. 깜빡이는 파란불이 야속하기만 했던 그 때에도, 그리고 인생의 쓴맛 단맛을 조금더 알게된 지금도 똑같은 주문을 외워본다. 포기란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다. 다시,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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