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교과실로 돌아왔더니 내 책상 위에 못 보던 영어책이 하나 놓여져 있다. 파울로 코옐료의 <연금술사>다. 누가 선물한 것인가 싶어 두리번 거리다가 책상 건너 앉아 있는 원어민 쌤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살짝 웃으며 미소를 짓는다. 맞네. 우렁각시는 바로 우리 바르샤 쌤이다.
"와,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대박!"
자신은 다 읽어서 안 돌려줘도 되니 편하게 읽으란다. 모르는 부분은 언제라도 물어보라는 말도 덧붙이고 말이다.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쌤, 이 책 제목 어떻게 읽어요?알 케미스트 이거 맞아요?"
선생님은 있는 힘껏 입을 크게 벌리고 한 음절 한 음절 또박또박 발음해 주셨다.
"앨! 앨 커 미스트"
아, 1음절 강세구나!
2년 전 이 분을 교과실에서 우리 쌤을 처음 만난 날을 잊을 수 없다. 피부색도 전혀 다른 외국 사람이 글쎄 '아몬드'를 읽고 있었다. 오 마이 갓! 놀라는 나에게 선생님은 겸손한 표정으로 영문판을 먼저 읽었다며 수줍어했다. 파파고로 모르는 문장도 찾아보며 공부를 한단다. 이럴수가! 심지어 우리 쌤 중국어도 잘한다.
그간 많은 외국 선생님들을 만나 보았지만 이렇게 좋은 분은 처음이다. 우리 쌤은 대학 시절 한국어를 부전공한 미국인이다. 스마트한데다 센스까지 있어서 교과지도뿐 아니라 생활지도까지 문제없다. 단 한 번도 지각이나 무단결근을 한 적이 없을 정도인데 이처럼 따뜻함까지 갖추었으니! 아이들도 우리들도 원어민 선생님을 참 좋아한다.
더욱 놀라운 건 선생님의 놀라운 언어 습득력이다. 한국에 도착한지 올해로 2년째인데 자신의 하고자 하는 말을 한국어로 자유자재로 표현한다. 이미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부터 한국어를 잘했고 지금은 발음이나 이해도나 경지에 올랐다. 한국어를 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서 그 비결을 물었더니 어린 시절에 태권도를 배웠단다.
원어민쌤이 살던 동네에 한국인 사범님 부부가 태권도장을 했단다. 언니랑 둘이 손잡고 초등학교 내내 차렷, 발차기, 주먹 지르기, 얍! 이런 말을 운동하며 접하고 한국 문화와 예의범절도 함께 익힌 것이다.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초코파이를 권하며 이거 유명한 한국 과자니 한 번 맛보라고 했었다.
"저 이거 알아요. 초등학생 때 사범님이 주셔서 태권도장에서 먹어 보았어요."
해서 박장대소를 하며 함께 웃었다. 얼마 전 쌤 언니가 한국에 여행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미국 과자도 함께 사 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우리도 과자파티를 했다.
가끔 우리는 쌤한테 "쌤 한국사람인데 외국인 코스프레하고 있는 거 다 알아요!" 하며 농담을 건넨다. 한국어 패치 완료,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진정한 K 러버다. 사려 깊고 지혜로운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참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