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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가 싫었다가 미웠다가 좋아졌다

박사학위 말고 석사학위만 십 오년 걸린 사연

by 리코더곰쌤

고등학교와 대학교때까지 나는 내가 공부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란 걸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임용시험도 한 번에 통과했고 그 해 곧바로 교육대학원에 진학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도무지 졸업 논문을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궁금한 것도, 알고 싶은 것도, 의문이 나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보이지 않았다. '연구는 연구자의 몫'이라고 외치는 교수님 아래에서 난 그냥 조용히 석사과정을 포기했다. 프로포절 두 번만에 자발적 수료자가 되었다.

5학기 모두 성적은 모두 에이쁠인데 논문을 못 써서 그 비싼 등록금과 수업료를 고스란히 모교 잔디밭에 기부한 것이다. 아니, 이 돈이면 유럽 여행을 다섯 번 다녀올 수 있는 금액인데 넌 왜 이걸 못하냐, 내 스스로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내가 나 스스로를 공부는 질색팔색이라고 여기는 계기가 되었다. 책도 전혀 읽지 않으니 도서관 근처는 가지도 않았다. 왜냐면 난 스스로 공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라고 여겼으니까.


십 년이 훌쩍지나 코로나 시대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원격 수업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나의 모교 역시 한 학기를 더 다니면 졸업장을 주는 학점추가 이수제를 도입했고 그 소식을 들은 난 냉큼 여기에 등록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예전에 대학원 다닐 때랑 학문의 트렌드가 바뀐거다. 진짜 재미있는 수업들이 많이 개설되었다. 할렐루야. 이 때 나는 인생의 가장 훌륭한 교수님 두 분을 만나게 된다. 이 분들의 수업을 들으며 내가 돈 아깝게 대학원에 들어온 게 아니구나 싶었다. 수업 시간에 나누었던 말들, 수업 방식, 강의 자료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런 교훈이었다. 내가 클래식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독서하고 글을 쓰게 된 것도 바로 그 즈음이다.


수업을 마치면 귀중한 교훈을 얻어가는 보람이 느껴져서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는지 모른다. 늘 교수님을 뵙는게 설레고 흥분되었다. 매 번 내어 주시는 읽기과제와 토론수업이 꿀송이처럼 달았다. 현장에서도 만나는 모든 상황을 마치, 참여관찰자처럼 문화기술자처럼 떨어져서 보려고 마음 먹은 것도 그 때다.


질적연구 시간에 읽기자료로 읽었던 김정운 박사님 글은 나를 예술의 세계로 인도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대학교수의 삶을 자발적으로 반납하고 어촌에서 그림을 그리며 산다는 김정운 교수님의 삶을 알게 되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외국 교도소에서 영화 시나라오를 쓰기 위한 자료조사로 재소자들과 면담을 하다가 그들을 위한 글쓰기 수업을 열었다는 한 인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도 이들처럼 글을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그 때부터 안 읽던 책도 읽게 되었고 왜 이전에는 이 재미를 몰랐을까 싶었다. 한 권을 읽으니 고구마줄기처럼 계속 읽게 되었다.


난 드디어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었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미워했던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은 지름길도 좋지만 가끔 이렇게 둘러 가는 길도 있나보다. 그 곳이 가시밭이 아니라 꽃길임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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