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대화책에서 만난 김구 선생님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이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를 수 없다.
상처를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결정한다. 그 사람 행동은 어쩔 수 없지만 반응은 언제나 내 몫이다.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룬다.
모든 것은 나 자신에 달려 있다. (백범 김구)
김윤영 선생님이 쓰신 <교사의 비폭력대화>에서 김구 선생님의 유명한 말씀을 보았다. 김구 선생님의 글을 비폭력 대화 책에서 마주할 줄은 몰랐다. 이 말을 내가 좋아하는 김윤영 선생님 글에서 만나니 뭔가 색달랐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침 백범 김구 기념관이 주최하는 연수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다.
백범 일지를 딥러닝에게 학습시킨 인공지능 백범 일지 아카이브 전시물, 이거 아주 신기하다.
어플을 이용한 다양한 미션수행도 학생들이 아주 좋아할 듯. 무엇보다 내가 좋았던 건 이런 체험형 박물관 교육 뿐 아니라 전시기획자 설명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점이었다.
안중근 선생님과 김구 선생님의 연결고리! 김구 선생님이 안중근 의사의 아버님께 학문을 배우셨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리고 안중근 선생님의 동생 안정근 선생님 따님과 김구 선생님 아드님이 혼인을 하셔서 한 집안이 되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김구라는 이름도 원래의 이름이 아니었다. 김창암, 김창수, 김구(거북이 구)에서 (아홉 구)로 바뀐 까닭도, 백정에서 범부까지 모든 이를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으로 호를 백범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백범 일지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통에 만날 수 없는 어린 두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적은 글이었다니! 특히 목숨이 언제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은 전쟁 같은 나날이기에 더욱 애틋하고 귀중한 글이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를 위해 일하시던 시절, 일제가 김구 선생님 목에 건 현상금이 어마 무시했다고 한다. 따라서 늘 신변의 위협을 받고 도피생활을 이어갔는데 하루는 정말 저격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남목청 사건이다. 그때 김구 선생님 가슴에 총알이 박혔는데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부위여서 의료진이 총알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냥 봉합했다고 한다.
나중에 핏줄을 타고 다니던 총알이 오른쪽 손의 신경을 건드리게 되어 선생님의 붓글씨가 후기로 갈수록 마치 떨리는 듯 보인다고 했다. 실제로 보아도 그러한 특징이 한눈에 파악되었다.
그 당시 주위 사람들이 선생님 휘호가 원래는 명필이었는데 글자가 떨려서 안타깝다고 했다고. 하지만 호방하게 웃으시며 본인은 세계 유일의 떨림체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답하셨단다.
어린 시절 과거를 준비하며 유학을 배웠으나 천도교와 불교, 기독교까지 모두 접하며 사상적 기반을 넓혀 나가셨다는데, 십 대 후반에 사주와 관상을 공부하셨다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효창운동장, 효창공원 역 이름은 친숙하지만 이곳에 이런 사연이 있는지도 몰랐거니와 김구 선생님을 비롯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묘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인생의 모든 시간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김구 선생님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접한 날이다.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또 안타깝기도 했다. 개인의 삶보다 민족을 위해 헌신한 그 용기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
눈 덮인 길을 갈 때, 아무렇게나 걷지 말고 뒷사람을 위해 바른길을 가라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겨본다. 순국선열들이 피를 흘려 지켜낸 이 땅을 잘 일구어 우리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책임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다.
나는 오늘의 내 걸음을 똑바로 걷고 있는가 생각해본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이리 저리 걷지 않고 나의 발자국이 누군가에게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는 나 자신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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