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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진우: 죄책감에 사로잡힌 영혼

‘가족을 버린 기억’에 갇힌 남자

by 심리한스푼

1. 불길 앞의 노래: 버림의 서사


400년전.png 궁궐에 초대 받은 진우


그날, 하늘은 이상할 만큼 붉었다.
조선, 연산군 재위 10년 무렵.
왕의 연회에 초청된 악사,

진우는 들판의 바람처럼 유려한 목소리를 지녔다.
그는 노래로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돌보며 살았으나,

그 재능은 곧 궁궐의 눈에 들었다.


궁궐 앞, 높고 붉은 문이 그를 삼킬 듯 서 있었다.
문 안은 영광이었고, 문 밖은 가족이었다.
발밑엔 어머니의 눈물이 흙과 섞여 있었고,

동생의 손은 허공에서 그를 붙잡지 못했다.


진우에게 손 뻣는 동생.png 진우에게 가지 말라고 손을 뻣는 동생


진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눈을 감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문은 닫혔고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그의 노래는 궁궐의 심장을 울렸지만,

마음속에는 흙냄새 나는 울음이 남았다.
성공을 택한 그날부터, 사랑은 그를 떠났다.
그가 노래할수록, 그 울음은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귀마는 진우를 집어 삼켰다.
그는 400년을 죄책과 수치 속에 떠돌며,
자신의 선택이 만든 영원의 형벌을 견뎌야 했다.



2. 귀마의 속삭임: 내면의 심판자

그의 곁에는 늘 귀마가 있었다.
귀마는 악령의 군주이며,

진우에게는 ‘내면의 목소리’로 작용했다.

400년 전, 성공을 위해 자신과 계약을 하고,

가족을 외면한 진우에게 늘 속삭였다.

"네가 버린거야.
니 잘못이야.
매정하게."


귀마.jpg 귀마


그 음성은 비난과 조롱, 그리고 기묘한 유혹이 섞여 있었다.
그는 그 목소리를 미워했지만, 동시에 의지했다.

스스로를 자책하던 진우에게,

자기비판은 존재감을 대신하는 정체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죄책감은 그렇게 잔혹하다.
그것은 파괴자가 아니라,

존재의 유일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초자아는 내면의 ‘도덕적 폭군’이다.
진우에게 귀마는 바로 그 초자아의 화신이었다.
그는 외적으로 귀마의 명령을 따르며 타인을 조종했지만,
내면에서는 그 목소리에 조종당하고 있었다.


Sigmund-Freud_cover.jpg 프로이트


그는 한때 귀마에게 배웠다.
“인간은 약점으로 움직인다.

상처를 찌르면, 누구든 무너진다.”
그 가르침은 진우의 생존법이었다.


그러나 그 교훈은, 그의 내면에서도 똑같이 작용했다.

귀마는 진우의 죄책감을 찔렀고,

진우는 그 죄책감 앞에서 무너졌다.


그가 루미를 조종하려 했던 것도, 결국 그 패턴의 연장이었다.
“나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았군"

귀마의 이 말은 진우의 악함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동시에 죄책감과 수치심에 사로잠힌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3. 수치심의 불꽃: ‘데몬도 느낀다’

진우와 루미 대치상황.png 루미와 진우의 대치상황


그러나 루미를 만났을 때, 그의 균열은 처음으로 드러났다.
루미는 진우를 향해 말했다.

“기분? 넌 악귀잖아.
악귀는 그런거 못느껴.”


그 말에 진우는 미소도 비웃음도 없이 대답했다.

“정말 그럴까?
악귀라고 다를 것 없어.
느낀다고.
수치심도 고통도...
귀마가 그걸로 조종하는 거야."



이 대사는 그의 심리적 구조를 완벽히 드러낸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잡아먹는 가해자인 동시에

자기 내면의 귀마에게 조종당하는 피해자다.
즉, 지배와 피지배의 회로가 하나의 구조 안에서 순환하는 인간이다.


그의 ‘어둠’은 악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지속되는 한,

그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4. ‘Free’ ― 치유의 노래

루미와 진우가 처음으로 함께 노래를 부른 건,

그가 귀마의 속삭임에 지쳐가던 무렵이었다.
곡의 제목은 〈Free〉.
루미가 먼저 멜로디를 잡고, 진우가 화음을 얹었다.

“너의 마음속 어둠, 너만의 것이 아닐 거야.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맞서보자.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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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는 그 가사를 듣는 순간, 눈이 흔들렸다.
그는 처음으로 ‘대면(confrontation)’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느꼈다.
자신이 평생 피했던 것,
문턱을 넘던 그날 이후 외면했던 ‘그날의 눈’이 떠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잠시 후 루미의 목소리와 하나로 겹쳤다.
그 둘의 화음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와 상처가 서로를 알아보는 소리였다.


그 순간, 귀마의 목소리가 멈췄다.
잠시였지만, 완벽한 정적이었다.
진우는 그 고요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낯설게 느꼈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자, 속삭임이 다시 돌아왔다.

“넌 여전히 나를 도망칠 수 없어.”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죄책감은 단 한 번의 노래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은 반복되는 대면과 회복 속에서만 조금씩 희미해질 뿐이라는 것을.



5. 귀마의 귀환: 내면의 심연

루미와의 노래 이후,

진우는 잠시 귀마의 통제에서 벗어난 듯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오래된 인간의 표정이 돌아왔다.
그러나 귀마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존재가 아니었다.


밤마다 그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너는 네 가족을 배신했어."
“네 동생의 손이 잡지않고 궁중으로 들어갔지.”


그 목소리는 때로는 연민처럼,

때로는 속삭이는 조롱처럼 다가왔다.
그는 귀를 막아보았지만, 그것은 내면의 소리였다.
아무리 막아도, 그 안에서 울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귀를 감쌌다.

“그만.”
그러나 그 말조차 귀마의 목소리로 되돌아왔다.

“그만둘 수 있겠니? 네가 만든 지옥인데.”


그의 죄책감은 이제 초자아의 심판을 넘어,

존재의 구조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


악령의.png



6. 과거는 과거에 두고: 놓아주는 법

노래 Free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과거는 과거에 두고, 가벼워져.”


그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우의 상처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그 자리에 두는 법을 가르쳤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치유는

‘삭제’가 아니라 ‘수용’이다.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꿀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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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가 그 문턱을 다시 떠올렸을 때,
그는 더 이상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문이 ‘자신의 이야기의 시작점’이었음을 인정했다.


그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더 이상 그를 조종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 감정을 ‘자기 것으로’ 품었다.
그것이 바로 귀마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진 이유였다.


그는 나아가 루미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의 죽음은 언뜻보기에 비극으로 보일 수 있으나,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수용하고,

죄책감에서 구원되는 해방의 서사로 볼 수 있다.




✍️ 한줄요약

"죄책감에 사로잡혀 400년 동안 귀마에게 지배당한 진우는
어쩌면 스스로를 처벌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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