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두려움은 어떻게 힘을 얻는가
우리는 <케데헌>을 영화로 보았지만, 그 이야기는 스크린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귀마는 단지 데몬의 형상을 한 악령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살고 있는 불안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로 악마가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우리 마음의 깊은 곳,
가장 조용한 밤에 스스로를 공격하는 속삭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는 안 돼.”
“넌 실패할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넌 왜 이 모양이야.”
그 속삭임의 주인을 찾으려 하면,
이상하게도 타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건 언제나 나 자신의 목소리다.
귀마는 밖에서 오지 않는다.
그건 우리 안의 도덕적 폭군,
스스로 만든 기준으로 자신을 심판하는 초자아의 그림자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내면을 세 층으로 나누었다.
원초이(id)는 본능,
자아(ego)는 현실적 자아,
그리고 초자아(superego)는 윤리적 이상이다.
초자아는 원래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끌기 위한 장치였다.
하지만 그 이상이 도덕적 폭군으로 변할 때, 귀마는 깨어난다.
‘착해야 해’,
‘성공해야 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해’
이런 명령들은 처음엔 동기부여처럼 들리지만,
언젠가부터 그 말의 주어가 사라진다.
“해야 한다”만 남고, “나는 무엇을 원하나?”는 사라진다.
그렇게 초자아가 내면의 전권을 쥐면,
우리는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체제 속에 갇힌다.
귀마는 그때 목소리를 얻는다.
“너는 아직 부족해.
너는 여전히 잘못하고 있어.”
이 목소리는 도덕의 언어를 빌려 말하지만,
실은 불안의 언어다.
선의의 탈을 쓴 채,
존재를 끊임없이 깎아내린다.
틸리히는 불안을,
‘존재의 뿌리에서 일어나는 떨림’이라 불렀다.
인간은 존재하기에 두려워한다.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이
‘더 완벽해야 한다’,
‘과거를 바로잡아야 한다’
와 같은 집착으로 변할 때,
귀마는 다시 자란다.
우리가 가장 괴로워할 때는,
실은 ‘과거를 바꾸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 재생하며,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라는 회한 속에서 스스로를 조각낸다.
하지만 과거는 정정 가능한 문장이 아니다.
이미 쓴 문장 위에 자꾸 덧칠할수록,
잉크는 번지고 의미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덧칠을 멈추지 못한다.
그게 바로 우리를 괴롭히는 불안의 구조다.
귀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일상의 미세한 틈에서 자란다.
밤 11시, 컴퓨터를 닫고 침대에 눕는다.
하루 종일 버틴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줄 만도 한데,
문득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도 이룬 게 없네.”
“저 사람은 벌써 앞서갔는데.”
그 목소리는 따뜻하지 않다.
그건 불안의 교사처럼 굴며,
우리의 결핍을 교묘히 가리킨다.
그때 우리는 모른 척하려 한다.
더 바쁘게 움직이고, 더 완벽하게 꾸민다.
하지만 그럴수록 귀마는 더욱 강해진다.
어떤 이는 일 중독으로,
어떤 이는 관계 집착으로,
또 어떤 이는 무기력으로 귀마를 달랜다.
그러나 귀마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고 계속 도망칠 때마다,
귀마는 더 큰 힘을 얻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다.
융은 말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그림자는 더욱 강해진다.”
귀마는 바로 그 그림자다.
인정받지 못한 나의 결, 부정하고 싶은 나의 얼굴.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바로 그 말이 귀마에게 숨 쉴 틈을 준다.
억압은 제거가 아니라,
그림자에게 더 짙은 색을 입히는 일이다.
우리가 불안을 지우려 할수록,
그 불안은 더 깊은 곳에서 살아난다.
그건 마치 물속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겉으론 잠시 고요하지만,
밑바닥에서는 파문이 계속 번져간다.
그래서 진짜 용기는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내 안에 귀마가 있음을,
그 목소리가 나 자신에게서 왔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것은 나를 덜 괴롭힌다.
불안을 이기려는 사람일수록 불안에 지친다.
왜냐하면 불안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다.
그것을 없애려는 순간,
우리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불안은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건 삶의 깊이를 알려주는 신호다.
불안이 없다면, 우리는 자기 인식도 없다.
다만 그 불안이 ‘귀마의 속삭임’으로만 들릴 때,
우리는 자신을 증오하게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수용이다.
그 불안과 함께 살아보는 연습.
두려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말에 지배당하지 않는 연습.
불안은 적이 아니라,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드는 안내자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목소리를 잠재우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숨 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불안을 껴안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시작한다.
귀마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 깊숙한 어둠의 부분이 귀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