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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셀린: 조건적 사랑의 비극

“이럴 때만 널 사랑한다”는 말이 남기는 흔적

by 심리한스푼

1. 사랑의 그림자: 보편적 서정으로서의 시작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조건 없는 사랑’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부모의 눈빛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아이는 세상을 ‘조심스러운 곳’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이럴 때만 널 사랑한다.”
이 짧은 문장은 명시적으로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공부는 좀 해야지”,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살아남겠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은 그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나는 공부를 잘해야 사랑받는구나.”
“나는 약하면 버려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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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랑은 조건을 입는다.
처음엔 보살핌의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말은 아이의 내면에서 ‘심리적 초자아’로 변해,
늘 스스로를 평가하고, 검열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2. 셀린의 사랑: 두려움이 만든 보호의 언어

셀린은 루미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단순한 ‘멘토–제자’의 구도를 넘어,
세상을 버티게 해준 모성의 대리물에 가까웠다.

루미가 악령으로 변해가던 시기, 셀린은 그녀에게 말했다.

“억누르고, 숨기면 돼. 그럼 괜찮아질 거야.”


표면적으로는 보호였다.
그녀는 루미를 세상의 시선과 공격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동시에 이렇게 들렸다.

“너의 그 모습은 사랑받을 수 없어.”


루미와 셀린.png 어린시절 루미와 셀린


아이를 위한 조언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셀린 자신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기에,
그녀는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사랑보다 통제를 선택한 것이다.
그녀의 언어는 “지키려는 사랑”이었지만,
루미의 마음에는 “부정당한 존재”로 새겨졌다.


이 지점에서 셀린은 우리 사회의 부모상을 대표한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세상 기준’에 맞춰 가르친다.
“너는 착해야 해.”
“공부를 잘해야, 그래야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성공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그 말의 방향은 선의지만, 내용은 조건이다.



3. 부모의 불안: 사랑의 방향과 왜곡된 언어

셀린은 루미를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세상에 대한 공포로 덧칠되어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루미를 지키려면, 진짜 모습을 드러내면 안 돼.”
“세상은 그런 아이를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 말 속엔 자신의 과거가 숨어 있었다.
셀린 역시 이전 세대의 헌트릭스로서

혼문을 완성하기 위해 투쟁해야했고,

그로인해 세상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그녀 역시 자기 진실을 감춘 채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셀린 역시 자신을 감추는데 익숙한 사람이었고,

어쩌면 그것만이 혼문을 완성하고,

루미를 보호하는 길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녀의 사랑은 루미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부모의 통제는 종종 사랑의 형태로 위장한다.
아이를 향한 진심이지만, 그 밑에는 ‘세상은 위험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불안은 결국 아이의 자유를 억누르고,
아이의 자아는 ‘부모의 불안’을 대신 사는 존재로 길러진다.




4. 조건적 사랑의 심리: 로저스의 ‘가치의 조건화’

인본주의 상담의 창시자 칼 로저스는,

이를 ‘가치의 조건화(Conditions of Worth)’라 불렀다.
아이는 부모의 무의식적 신호를 통해,
“내가 이럴 때만 사랑받는다”는 내면의 법칙을 세운다.


44424_59710_3915.jpg 칼 로저스


문제는, 그 법칙이 시간이 지나면 자기감시 체계로 바뀐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 아이는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며,
“나는 충분히 괜찮은가?” “이런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멈추지 못한다.


결국, 사랑받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적 자아(ideal self)’와
진짜 자아(real self)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진다.
이 간극이 클수록 인간은 불안해지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거짓된 완벽함의 가면을 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조건의 반대편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이래서 사랑한다”가 아니라 “그래도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더 나은 자아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다.


루미가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거죠”라고 외쳤던 장면은,
바로 그 가면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랑받을 만한 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길 선택한 것이다.



5. 루미의 절규: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나요?”

루미는 셀린에게 물었다.

“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나요?”


이 질문은 단지 스승에게 던진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 모든 권위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그들이 변하길 바란다.
연인이 “조금만 더 성숙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할 때,
그 말 안에는 ‘지금의 너는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있다.
직장 상사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면 좋겠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그렇게 은밀하게 조건을 입는다.
그 조건이 ‘관심’의 이름으로 포장되면,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루미를 저지하는 셀린.png


한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셀린의 모습에

셀린은 '왜 자신을 그대로 사랑하지 않냐고' 절규한다.

그러자 주위에 악령이 창궐하기 시작하고,

셀린은 놀라며 말을한다.

"우리 흠집과 두려움을 내보여선 안돼.
혼문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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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가 대답한다.

"제가 지켜야할 혼문이란게 고작 그런 거라면
차라리 파괴되어야 해요."

루미가 외쳤던 이 말은

‘조건적 사랑’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자,

셀린이라는 세계의 틀을 깨부시는 내면의 혁명이다.

그리고 그녀의 절망은 파괴가 아니라,
자기를 되찾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6. 조건 없는 수용: 진짜 치유의 시작점

진짜 치유는 사랑이 완벽해질 때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조건을 잃을 때 시작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그의 빛과 어둠, 강함과 약함,
모두를 함께 보는 일이다.
그것은 ‘고쳐야 할 결함’을 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는 한 인간’을 바라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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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교육에서 말하는 ‘무조건적 수용’은
단순한 관대함이 아니라 존재의 인정이다.
“그래, 너는 그럴 수 있어.”
“그 모습도 네 일부야.”
이 말 한마디가 아이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든다.


셀린이 루미를 향해 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루미는 그토록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 역시 한 번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7. 존재의 회복: 루미에서 우리에게로

루미의 절망은 결국 하나의 진실을 드러냈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


우리 역시 셀린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려다
그들의 ‘진짜 자아’를 가두는 실수를 저지른다.
혹은 루미처럼,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고 감춘다.


그러나 진짜 관계는 서로를 고치려는 노력에서가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함께 견디는 순간에 태어난다.




✍️ 한줄요약

사랑은 완벽해지길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를 허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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