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2편.
사람들은 자살을 흔히 '잃은 자들의 이야기'로 생각한다.
실패한 자들, 상실한 자들, 견디다 무너진 자들. 돈이 없거나, 가족이 없거나, 직장이 없거나, 희망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세상을 등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자살은 언제나 그런 얼굴로만 찾아오지는 않는다.
어느 날, 자살은 정반대의 얼굴로 다가온다.
때로, 우리들은 모든 것을 이룬 사람들의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보다 성공했고, 누구보다 부유하며, 누구보다 존경받던 이들이 조용히 생을 접는다. 그들의 자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우리들은 착각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살 이유도 많을 것이라고. 오를 곳이 있으면, 추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바로 그 정점에서, 사람들은 더 깊은 허무를 느낀다. 그 허무는 단순한 우울이나 일시적인 공허함이 아니다.
그것은 '더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감정의 해체'다.
성공은 우리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다.
성취는 인간 존재의 보람이자 존재 이유처럼 여겨진다.
"이루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말은 수많은 광고와 교육, 사회적 메시지를 통해 반복된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그래야 살 만한 삶이라고.
그런데 정말 그런가?
김정주,
찰스 머피,
버지니아 울프,
로빈 윌리엄스,
앤서니 보데인,
커트 코베인.
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절정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들이다. 누구보다 부유했고, 유명했고, 영향력 있었으며, 이룰 수 있는 것을 다 이룬 듯 보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삶의 정점에서 스스로 삶을 내려놓았다. 이 사실은 단순한 뉴스 이상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성공은 왜 그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주지 못했는가? 성취는 왜 그들의 감정을 채우지 못했는가? 우리는 지금껏 너무 오랫동안 '성공 = 행복', '성취 = 생존'이라는 공식을 맹목적으로 믿어왔다. 하지만 그 믿음은 허상이었다.
인간은 '가졌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느낄 수 있음'으로 존재한다.
가진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그 이루어진 것을 나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이다. 느낌이 없는 성공은 껍데기일 뿐이고, 공허만 키울 뿐이다.
이제, '가진 자의 자살'을 예외적 사건이나 기이한 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근본적 결함이 드러난 징후다.
욕망을 성취로 치환하고,
감정을 성과로 압도하며,
존재의 고유함을 업적으로 대체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살고 싶은 이유'를 잃는다.
이 시리즈의 제2편은 , "성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죽음을 선택하는가"를 묻는다. 사회는, 우리들은 자살의 얼굴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것은 슬픈 눈물을 머금은 실패자의 얼굴만이 아니다. 때로는 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웃고 있던, 그 '이룬 자'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생각보다 우리 자신과 닮아 있다.
김정주.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IT 기업가였다. 넥슨을 창업하고, 아시아 최초로 온라인 게임 산업을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다. 그가 이룬 자산은 16조 원을 넘었다. 경제지와 방송은 그의 삶을 ‘성공 신화’로 포장했고, 그는 수많은 청년의 롤모델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사람들의 말은 달랐다.
“마음이 차지 않았다.”
“의욕이 없었다.”
“허무를 느꼈다.”
그는 가진 자였다. 그러나 마음은 비어 있었다. 성취는 그의 감정을 감싸주지 못했다. 오히려 더 깊은 고립과 단절을 만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껴지지 않았고, 그것은 그를 조용히 무너뜨렸다. 돈으로는 메워지지 않는 마음의 구멍. 그것은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감각의 소멸이었다.
이때의 공허는 심심함이나 무료함과는 다르다. 그것은 삶 전체에 대한 ‘감정적 반응’의 부재다. 도파민의 고갈, 감정 회로의 탈진, 자극에 대한 무반응. 뇌는 작동하지만, 마음은 더 이상 울지 않고, 웃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다. 이 무반응의 상태는 곧 ‘살아 있으나 죽은 상태’와 같다.
김정주는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의 일정은 꽉 차 있었고, 그의 재산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의 내면은 점점 정지 상태로 향하고 있었다. 성취가 극대화된 그 순간, 그는 오히려 삶의 파동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무중력의 공허가, 어느 날 조용히 그를 눌렀다.
이 감정의 단절은 단지 김정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너무 많은 성공자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느낌이 없다.”
“사는 것 같지 않다.”
“내가 빠져나간 느낌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실패한 자의 말이 아니다. 바로 성취한 자들의 고백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감정은 에너지다. 욕망은 그 에너지를 동원하여 목표로 향하게 만든다. 그런데 성취의 정점에 도달하면, 그 목표가 사라진다. 더 갈 곳이 없다. 그러면 욕망은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더는 ‘다음’을 찾을 수 없을 때, 감정은 방향을 잃고, 무기력 속으로 추락한다.
이 무기력은 내면적 감정의 단절뿐 아니라, 존재 자체의 의미 상실로 이어진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이런 질문들이 무의식의 바닥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감정은 무뎌져 있고, 생각은 피로에 지쳐 있다. 이때 삶은 무게를 잃고, 반대로 공허는 무게를 얻는다. 그것은 마음의 블랙홀이다.
‘가진 자의 자살’은 그래서 더 무겁고, 더 절망적이다. 가난해서, 실패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더는 ‘느낄 수 없어서’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질문이다. 성취는 감정을 회복시켜줄 수 있는가? 아니, 성취는 감정을 살아 있게 만들 수 있는가?
김정주의 죽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졌지만,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가 만든 이 시대의 냉정한 진실을 찌르고 있다.
살고 싶은 마음은 결코 통장의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2017년 3월, 뉴욕 맨해튼 중심가의 소피텔 호텔. 24층 창문이 열려 있었고, 한 남자가 그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이름은 찰스 머피. 골드만삭스 출신의 엘리트이자, 억만장자 헤지펀드 매니저였다. 한때는 워런 버핏과 손을 맞잡았고, 월가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었으며,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을 이룬 자였다. 그는 고급 타운하우스에 살았고, 수십억 달러 규모의 거래를 움직이며 ‘자본의 승부사’로 불렸다. 그런데 그는 왜 죽었는가?
그의 지인들은 말했다.
“늘 돈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억만장자가 돈 걱정을 했다는 말은 언뜻 농담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이 세계의 실상이다. 그가 걱정한 것은 실제 돈이 아니라, ‘그 성공을 유지하지 못할까 봐’ 생겨나는 존재 불안이었다.
성공이란 이상하게도 두 가지 공포를 동시에 낳는다.
하나는 '도달하지 못할까 봐'의 공포이고,
또 하나는 '지키지 못할까 봐'의 공포다.
찰스 머피는 이미 도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언제든 잃을 수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그 상상은 점점 현실처럼 그를 잠식했다.
이것은 단순한 불안이 아니다. '성공의 정체성'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들이 갖는 존재론적 위기다. 더 이상 실패할 수 없는 자, 내려올 수 없는 자, 자신의 자리를 잃는 것이 곧 존재의 상실인 자. 성공이 자아를 대체하는 순간, 성공의 불안은 곧 존재의 불안이 된다. 찰스 머피는 자신의 자아를 '억만장자'라는 정체성에 걸어두고 살았던 것이다.
그 정체성이 흔들리자, 삶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식 그래프처럼, 모든 곡선은 언젠가 꺾인다. 자신의 커리어도, 자신의 평가도, 자신의 수익도 언젠가는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 곡선이 꺾이기 전에, 그는 먼저 자신의 생을 지워버렸다.
그것은 공포를 피하려는, 아주 비극적인 선취(先取)였다.
이런 방식의 불안은 오늘날 많은 성취자들이 안고 있는 그림자다. 외부에서는 빛나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무너지고 있다. 그들은 늘 '다음'을 두려워한다. 다음 성적, 다음 분기, 다음 뉴스, 다음 실패.
삶이 경쟁으로 환원된 세계에서, 성공은 더는 기쁨이 아닌 공포의 알리바이가 된다. 왜냐하면 성공한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곧 ‘추락한 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는 '성과 기반 정체성(identity-by-performance)'의 함정이다. 내 존재가 어떤 성과에 종속될 때, 그 성과가 흔들리면 자아는 무너진다. 이 구조는 특히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강화된다.
'가장으로서의 책임',
'이룬 자로서의 자부심',
'무너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결합되면서,
성공한 자들은 더욱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갇힌다.
찰스 머피의 자살은 그래서 충격적이지만, 동시에 너무도 현대적이다. 그는 실패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성공을 감당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다. 그는 추락이 두려워서, 추락하기 전에 스스로 뛰어내렸다. 그의 자살은 우리가 만든 성공 신화의 파열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성공은 정말 우리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성공이라 부르는 그 자리 자체가 이미 감정의 고립과 공포의 지점은 아닐까?
1941년 3월, 버지니아 울프는 강가에 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유서는 남아 있었다.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아요.
환청이 들리고, 집중이 되지 않아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이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프의 죽음은 종종 ‘정신질환’이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된다. 그녀는 우울증과 조울증 증상을 겪었고, 몇 차례의 발작적 고통을 경험했으며, 병력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 진단만으로는 그녀의 삶, 그녀의 글,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단순히 병든 정신이 아니라, 지나치게 예민하고 지나치게 느끼는 정신이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간 인간'이었다. 사랑, 고통, 시간, 언어, 존재… 그녀의 글은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해부하고 탐색한 기록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과하여 언어로 형상화하려 했다. 그리고 그 깊이는 곧 그녀의 고통의 무게가 되었다.
울프가 감당하지 못한 것은 단지 병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였다. 그녀는 감정의 바다 한가운데에서, 수영이 아닌 ‘해체’를 겪고 있었다. 존재의 구조가 흔들리고, 언어가 파편화되며, 자아의 중심이 흐려지는 상태. 정신분석의 언어로 보자면, 울프는 감정의 과포화로 인한 자아 경계 붕괴를 겪고 있었다.
이러한 감정의 해체는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극도로 예민한 창작자들, 감정에 몰입하는 배우들, 자기 내면을 끝까지 들여다보는 철학자들… 그들은 성공하거나 유명해졌을 때에도, 오히려 더욱 내면에 고립되곤 한다. 많은 이들이 '성공한 다음'에 고통을 호소한다. 왜냐하면 외부의 평가와 내부의 감정 간의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은 우리에게 감정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감정은 부족해도 무너지지만, 너무 많아도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 감정은 에너지이자 파동이며, 그것이 억제되지 못하고 범람할 때, 자아는 방향을 잃는다. 감정은 느껴야 하지만,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울프는 그 감당의 기술을 끝내 배우지 못했다.
그녀의 마지막 유서에는 고통과 동시에 배려가 있다.
“나는 떠나지만, 당신은 잘 살아야 해요.”
이 말은 단지 남겨진 자를 위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이제 더 이상 나를 견딜 수 없어요’라는 가장 깊은 자기 고백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실패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너무도 예민하게, 너무도 집요하게, 삶을 살아낸 자였다. 그녀는 끝까지 인간의 감정과 정신, 존재의 경계를 탐색했다. 그러나 그 깊이는 끝내, 그녀 자신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자살은 질문을 던진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사회는 감정을 축소하거나 과장하는 기술만 가르쳤다.
그러나 진짜 필요한 것은,
감정을 느끼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수용하는 능력이다.
울프는 그렇게 감정의 세계를 통과했고, 결국 그 감정의 심연에서 삶을 놓았다. 그녀의 죽음은, 감정의 과잉이 어떻게 정신을 해체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문학적이자 철학적인 예증이다.
“살고는 있는데, 사는 것 같지 않다.”
이 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유서에서 반복된다. 그들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었다.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조용히 삶을 내려놓는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두려움은 감정이다. 그러나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죽음은 하나의 무반응이 된다. 고통도,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없는 상태. 오직 공허만이 남은 그곳에서,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감정 없는 정지’로 다가온다.
현대 뇌과학은 이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공한 자들이 자살을 결심하는 단계는, 감정 회로(특히 전측 대상회, 복내측 전전두엽)의 기능 저하와 관련되어 있다. 도파민 시스템은 과잉 자극과 보상 회로의 반복 사용으로 탈진하고, 더 이상 뇌는 쾌감을 기대하지 않는다. 삶에서 기쁨과 슬픔의 파동이 사라진다. 전두엽은 현실 판단력을 잃고, 사고의 방향성은 무의미의 수렁에 갇힌다. 이것이 바로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신경생물학적 조건이다. 즉, 자살은 감정이 지나쳐서가 아니라, 감정이 없어서 발생하기도 한다.
살고 싶은 마음은 고통을 이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자에겐 고통조차도 느낌이 아니다. 고통이란 살아 있으므로 가능한 감정이고,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곧 삶이 감각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다.
이 상태에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조용한 ‘방’처럼 느껴진다. 그 방에 누워,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정적 속에서, 자아는 쉬고 싶어한다.
삶은 원래 파동이다.
느낌이 있고, 떨림이 있고, 반응이 있다. 그러나 일정한 순간, 파동이 끊긴다. 사람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고, 말하고 있고, 회의에 참석하고 있지만, 그 안에 감정이 없다. 그는 사는 척하고 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일 뿐, 내부는 정지해 있다.
이런 상태는 ‘살고 있는 자의 자살’로 이어진다.
이들은 일상 속에서도 정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삶을 느끼지 못한다. 느낌은 삶의 증거다. 감정은 존재의 확인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을 때, 존재는 마치 화면이 꺼진 텔레비전처럼 침묵하고 만다.
자살의 결정은 종종 그 침묵의 끝자락에서 이뤄진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이것은 위기 신호가 아니라, 경고가 끝난 이후의 마지막 상태다.
사람들은 종종 자살을 극단적인 감정의 폭발로 오해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살은 극단적인 감정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감정이 없어졌을 때,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이 감정의 무반응 상태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신종 고통이다.
살고 싶은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사랑에서, 감각에서, 공감에서, 누군가의 손길에서, 혹은 어딘가의 바람에서 온다. 그것은 논리나 성공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고 싶은 마음은 오직 느낌이 있는 삶에서만 자라난다.
성취는 욕망의 결과다. 인간은 갈망하기에 움직이고, 그 움직임은 성취로 이어진다. 그러나 성취는 결코 끝이 아니다. 성취는 곧 새로운 결핍을 낳는다. 바로 그것이, 욕망의 구조다.
욕망은 충족되는 순간 멈추지 않는다. 충족의 경험은 뇌를 잠시 만족시키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또다시 추구하도록 만든다. 성취의 순간, 인간은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낀다. 하나는 성취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성취 이후의 공허다. 그리고 공허는 점점 더 커진다. 왜냐하면 이전보다 더 자극적인 만족을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점에 오르면, 새로운 목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방향을 잃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룬 자들에게는 더 이상 다음이 없다. 그 정점은 마치 절벽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온다. 오르기 전까지는 무수한 계단이 있었지만,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엔 단지, 이루었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욕망의 반복은 결국 ‘무의미의 누적’으로 이어진다. 성공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묻게 된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이건 대체 누구를 위한 삶인가?” 이 질문은 피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붕괴에서 비롯된 회의다.
이때 욕망은 욕망으로서의 기능을 잃는다. 무언가를 갈망해도, 그 갈망이 더 이상 살아 있는 느낌을 주지 못할 때, 욕망은 더 이상 인간을 앞으로 밀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갈망 자체가 피로해진다. 욕망이 피로해질 때, 인간은 스스로의 동력에서 분리된다. 자신의 욕망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잔상으로 살아가게 된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을 “타자의 욕망”이라 말한다.
즉, 인간은 자기 욕망이 아니라, 타자가 원하는 것을 욕망하는 존재다. 성공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원한 성공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갑자기 ‘나’라는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왜냐하면 그 성공은 애초에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질 들뢰즈는 말했다.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흐름이다.”
그의 말은 욕망을 정적인 대상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본다. 그 흐름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지된 감정의 동굴에 갇힌다. 성취란 그 흐름의 종착점이 아니다. 성취 이후, 욕망이 다시 흐를 수 있는 통로를 열지 못하면, 인간은 내면의 강물과 단절된다.
그래서 성취는, 역설적으로 허무를 낳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가 아니라, '무언가를 향해 나아갈 때' 더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라 의미의 지속이다.
그러나 성취가 의미의 종착점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더는 무엇을 원하지 않고, 더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며, 더는 어떤 감정도 들지 않는다. 이때 삶은 껍데기처럼 남아 있고, 마음은 기계처럼 움직인다.
그 상태에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멈추어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존재의 피로한 알림음일 뿐이다.
자살이라는 결말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특히 그것이 '성공한 자'의 이야기일 때 더욱 그렇다. 그들은 가졌고, 이루었고, 빛났고, 남들이 부러워하던 자리까지 도달했다. 그런데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너무도 쓸쓸하다.
“느낌이 없다.”
“마음이 비었다.”
“살고 있는데, 사는 것 같지 않다.”
이 말들은 가난한 자들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이룬 자들, 정점에 선 이들, 세상에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의 고백이다. 그 말들은 ‘감정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냉정하게 들려준다.
앤서니 보데인은 그랬다. 그는 전 세계를 여행했고, 수많은 사람들과 음식을 나눴으며, 누구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호텔 방에서 스스로 삶을 멈췄다. 그가 죽기 전의 며칠, 동료들은 그가 “이상할 정도로 무표정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감정이 없었다. 기쁨도, 피로도, 불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로빈 윌리엄스도 그랬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줬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내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있었지만, 나 자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음악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수만 명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서도, 나는 그저 연극을 하고 있다는 느낌뿐이다. 나는 나로 살고 있지 않다.”
이 고백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들은 단지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고 있다는 느낌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현대인은 삶을 ‘성과’로 측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벌었는가, 어디까지 올라갔는가. 그러나 그런 질문은 인간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즉 ‘자신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그리고 '타자를 느낄 수 있는 능력' 간과한다. 살아 있다는 건, 나의 고유한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상태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눈물도, 웃음도 모두 그 증거다.
성공한 자들의 공통된 고백은 이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 고백은 현대인의 감정적 실종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성과와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그 역할이 너무 완벽해질수록, 진짜 ‘나’는 점점 더 사라진다.
자살은 실패의 끝이 아니라, 성공 이후의 정지된 감정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를 단순한 정신질환이나 일시적인 충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조적 현상이며, 감정의 단절이 낳은 존재의 무너짐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이 시스템은, 인간이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기에 적절한 구조인가?
이룬 자조차 스스로를 버리는 사회라면, 그 성공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성공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지금, 정말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
인간은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 보다 근원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왜 살고 싶은 마음을 잃는가?
사람들은 자살을 종종 '죽고 싶은 마음'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은 ‘살고 싶은 마음의 고갈’에서 비롯된다. 살고 싶은 마음이 말라붙었을 때, 죽음은 더 이상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면의 정적, 무(無)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된다.
살고 싶은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생존을 향한 본능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나의 감정으로 살 수 있는 구조’ 속에서만 생겨난다.
자아가 자극에 반응하고,
슬픔을 감당할 수 있고,
기쁨에 흔들릴 수 있고,
사랑과 실패와 상실을 견딜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 삶을 ‘살고 싶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감정의 구조를 파괴했다. 사회는 우리에게 목표를 줬지만, 의미를 주지 않았다. 성과를 요구했지만, 감정을 다루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이뤄라, 올라가라, 증명하라.”
그러나 아무도 묻지 않았다. “지금, 당신은 살아 있는 느낌이 드는가?”
사회는 인간을 ‘업적’으로 축소했다. 자아는 하나의 역할이 되었고, 감정은 효율을 방해하는 노이즈로 간주되었다.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은 말한다. “자기(self)란 타인의 거울 속에서 유지된다.” 그러나 오늘날 타인의 시선은 자아를 지지하기보다, ‘비교와 평가’라는 칼날로 자아를 해체한다. 그 거울은 이제 온통 왜곡되어 있다. 그 안의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니다.
살고 싶은 마음은 그래서 점점 줄어든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 때, ‘나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함께 말라간다.
자살은 심리적 병리로 취급된다. 우울증, 불안장애, 충동성, 약물의존, 외상후 스트레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조건들이 생성되는 문화적 구조와 서사적 맥락을 간과한다. 즉, 이 사회는 '살고 싶은 마음'을 서서히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이에게 목표는 가르치지만, 감정은 억제하게 만들고,
직장인은 일의 효율성을 평가받지만, 존재로는 존중받지 못하며,
창작자는 트렌드를 읽지만, 자기 감정의 언어는 말할 수 없다.
현대사회는 성취를 ‘살 이유’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성취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의 부산물이다.
삶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삶의 감정, 존재의 진폭, 자아의 반응성. 그것이 있어야 인간은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과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을 이루었는가?에서 --> '무엇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로
'얼마나 일했는가?'에서 --> ' 일을 하면서 살아 있음을 얼마나 느끼는가?'로
'무엇을 증명했는가?'에서 --> '무엇을 감당하고 품고 있는가?'로
이 전환은 단순한 감성적 변화가 아니라, 존재 구조의 재설계를 의미한다. 정신분석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거울자아’(mirror-self)에서 ‘느낌자아’(affect-self)로 전환해야 한다. 외부의 인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구조에서, 내부의 감정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구조로 옮겨가야 한다.
자살은 우리 사회가 실패한 곳에서, 가장 민감한 인간이 보내는 경고다. 그리고 이 경고는, 단지 통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삶의 해체로, 정지된 파동으로 우리들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만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얼굴이며, 우리가 만든 세상의 결과이며, 한 사람의 죽음 속에 숨어 있는 우리 전체의 감정 구조의 무너짐다.
사회는, “그는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에서 멈추지 말고,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살고 싶은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었는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 물음에서부터, 우리 모두는 다시 삶을 설계할 수 있다.
성과 대신 존재를,
목표 대신 감정을,
수치 대신 느낀 것을 중심에 둘 때,
비로소 살고 싶은 마음이 다시 살아난다.
다음은, 자살론 제3편 〈타자의 눈 – 수치심, 이미지, 모래성의 자아〉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