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3편-3장. 미디어가 설계하고 SNS가 지운 자기감정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의 존재 없이는 자아를 구성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이 관계를 급진적으로 왜곡시켰다. 현대인은 단순히 타인의 눈을 신경 쓰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타인의 눈에 담긴 나의 눈으로 보는 나’에 갇혀 있다.
이것은 단지 외모에 대한 예민한 인식이나 평가 민감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방식 자체가 이미지로 구성되는 상태, 즉 ‘연기하는 나’로 살아야 하는 현대 사회의 구조를 의미한다.
한국계 독일인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은 감시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투명하게 만드는 존재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시를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노출한다. 이 자기 노출은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 방식이다. 나는 보여야만 존재한다. 이것이 오늘날 ‘자아의 조건’이다.
프랑스 철학자 가이 드보르(Guy Debord)는 현대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라 불렀다. 이 개념에 따르면, 현대인은 더 이상 실재(reality)로 살아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지를 살아간다. 실제 경험이 아니라, 경험의 재현과 그 재현이 불러오는 인상 속에서 존재를 유지한다.
그 안애서 인간은 더 이상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며, 감각은 세계를 받아들이는 창이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하기 위한 무대가 된다. 이 모습은 SNS를 통해 더욱 극단적으로 전개된다.
인스타그램: 삶을 시각적 콘텐츠로 압축하고, ‘좋아요’로 평가받는 이미지 자아의 플랫폼. 감정은 필터링되고, 기억은 피드의 구성물이 된다. 삶은 연출되고, 고통마저 스타일링 된다.
페이스북 / 블루스카이: 자신의 정체성과 신념을 ‘브랜드’처럼 포장해 내놓는 무대. 사람들은 서로의 ‘의견’에 반응하며 공감받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만, 그 공감조차 진짜 감정이 아니라, 동조 여부에 따라 판단되는 신호로 작용한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의견에 반응한 결과물’로 존재한다. 정체성은 살아 있는 감정의 조합이 아니라, 누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구성되는 소비용 프레임이 된다.
틱톡 / 릴스: 짧고 빠른 자기 과시의 반복. 소비되는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정체성 자체다. 정보는 빠르게 휘발되고, 주체는 끊임없이 포즈를 취한다. 인식의 피로는 정체성 분열로 이어지고, ‘나는 누구인가’는 ‘내가 어떻게 소비되는가’로 대체된다.
유튜브 / 쇼츠: 삶의 순간을 편집하고 서사화하는 1인 미디어의 시대. 여기는 ‘연결된 고립’의 공간이다. 긴 형식의 브이로그와 짧은 쇼츠는 공존하지만, 공통점은 같다. 내가 느낀 감정이 아니라, 타인이 반응할 감정을 설계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라 알고리즘 최적화의 소모적 객체가 된다. 영상은 삶을 기록하지 않는다. 영상은 삶을 디자인한다.
이런 사회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감정의 내면적 지속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적된 반응의 총합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그 반응은 자기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맞춰진 콘텐츠 전략이다. 자기표현은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시장을 향한 신호이고, 정체성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 가능한 프레임의 문제가 된다. 현대인은 느끼는 존재에서 ‘반응받는 존재’로, 삶의 쉼 쉬는 모습에서 ‘계산된 이미지’로 이행하고 있다.
SNS는 처음엔 단순한 도구였다. 멀리 있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생각을 나누고, 기억을 저장하는 플랫폼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SNS는 ‘나’를 만들어내는 무대가 되었고, 그 무대 위에서 현대인은 관계를 ‘연기’하고 감정을 ‘공연’하게 되었다.
이제, 현대인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쓰지 않는다.
이 말을 쓰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이 사진은 너무 평범한가?
이걸 올리면 ‘좋아요’ 몇 개나 받을 수 있을까?
혹시 누군가 기분 나빠하진 않을까?
이건 너무 나약해 보일지도 몰라.
이러한 생각들은 내면화되었고, 그것에 맞추어 끊임없이 타인의 반응을 ‘예측’하면서 감정을 조율한다.
말투를 다듬고, 사진을 보정하고, 글을 올렸다가 지우고, 다시 고쳐 올린다. 그 행위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감정을 조작하고, 이미지를 편집해서, 자아를 재설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진행될수록 '나'는 점점 실체가 아닌, 계속 수정되는 스토리보드가 된다. 누군가에게 보일 ‘좋은 버전의 나’, 논란 없고, 매력적이고, 무해하며, 인정받을 수 있는 완성된 캐릭터로서의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자기 제시(self-presentation)의 강박'이라 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표현의 선택이었지만, 점차 ‘진짜 나’보다 ‘보이는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의 왜곡'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혼란 속에 빠져든다.
SNS 속 나는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진짜 나는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야.
나는 내가 지금 어떻게 보일 지를 더 고민해. 정작 내가 뭘 느끼는지는 점점 흐릿해져.
사람들은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 하나도 안 괜찮아. 엉망이야.
이것이 SNS가 강요하는 감정 노동의 실체다.
보이지 않는 청중을 의식하며,
그들의 반응을 미리 상상하고,
그 상상 속 표정에 맞춰 나의 감정을 꾸며내는 삶.
결국, 현대인은 나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예측하며 사는 존재가 되어간다.
오늘날 자아는 더 이상 내면에서 스스로 자라나지 않는다. 그 대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요구되는 세 가지 이미지에 따라 조각되고 덧칠된다. 그것은 외모, 성공, 평가라는 이름의 가면이다.
이 가면들은 자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살아남기 위해 써야만 하는 생존 도구로 작동한다.
1) 외모 가면 – 몸의 자아, 이미지 중독의 첫 관문
자아는 이제 자신의 얼굴과 몸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리하고 연출해야 하는 프로젝트로 인식된다. 필터, 보정 앱, 다이어트, 메이크업, 성형은 단지 미적 추구의 수단이 아니라, '보이는 자아'를 살아가기 위한 생존 기술이 되었다.
이런 경향은 특정 성별이나 연령층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 심지어 청소년과 어린이까지, 외모를 기준으로 자아를 해석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 산다.
특히 SNS와 유튜브, 틱톡 같은 시각 기반 플랫폼은, 한 번의 비호감 사진, 한순간의 부정적인 인상이 되돌릴 수 없는 수치심과 존재감 상실로 이어지게 만든다.
그 결과, 신체이형장애(Body Dysmorphic Disorder, BDD)처럼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식 장애가 확산하고 있다.
2) 성공 가면 – 자아의 내면을 바깥 수치로 환산하다
한때 성공은 선택지 중 하나였고, 성과는 ‘결과’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자아에게 성공은 정체성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스펙, 연봉, 직위, 팔로워 수, 프로젝트 결과 등 측정 가능한 지표들이 곧 성공한 삶의 증거가 되었고, 그 지표를 잃는 것은 곧 '실패한 자'를 의미하게 되었다.
많은 현대인들은 이렇게 느낀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실패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직장인, 학생, 프리랜서, 전문가, 예술가, 자영업자까지 거의 모든 직업군이 ‘성과를 보여줘야만 살아남는’ 경쟁 구조 안에 놓여 있다.
이러한 환경은 자아를 내면에서 길러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성취 지표에 맞춰 맞춤 제작되는 상품처럼 만든다.
3) 평가 가면 – 타인의 눈에 박힌 ‘나’라는 환영
과거의 관계성은 신뢰 위에 쌓였지만, 오늘날의 관계성은 ‘인상 관리’와 ‘이미지 조작’에 더 가깝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질문은 이제 자아의 일상적 운영 원칙이 되었다.
'댓글 내용, 좋아요 개수, 언급 빈도, 바이럴 반응...'이 모든 것이 ‘나’라는 인간의 사회적 안정성과 존재성을 평가하는 지표처럼 여겨진다.
문제는, 이것이 지속적인 피드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한 번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그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더 향상해야 한다. 그 결과, 자아는 점점 더 불안정한 확인 중독 상태에 빠져든다.
그렇게 '내가 괜찮은 사람인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되고,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만 자신을 규정'하려는 병적인 회로가 만들어진다.
이 세 가지 가면은 처음에는 자아를 사회에 연결시키기 위한 통로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가면 없이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 결과 자아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비교하고, 의심한다.
/외모는 괜찮은가? 성과는 충분한가? 평가는 좋은가?/
이렇게 끝없는 자기 점검은 결국 불안과 수치심을 낳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라는 방어기제로 도피하게 된다.
감정은 차단되고, 자아는 무감각해진다.
살아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는 단절된 존재로 변해간다.
A 씨는 서울의 명문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사며 미국의 유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SNS 속의 그는 언제나 성실하고, 계획적이며, 미래가 촉망되는 사람으로 보였다. 논문 발표, 연구 활동, 외국인 친구들과의 교류, 캠퍼스의 푸른 잔디 위에서 책을 읽는 사진들까지, 그의 타임라인은 마치 ‘성공적인 청년’이라는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성된 하나의 프로필 같았다.
그의 SNS를 팔로우하던 사람들은 그를 응원했고, ‘멋지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댓글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가 남몰래 견디고 있던 것은, 그 이미지와 자신 사이의 깊은 단절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조용히 사라졌다. SNS는 더 이상 업데이트되지 않았고, 메신저의 회신도 끊겼다. 몇 달이 지나서야 가족은 학교로부터 자퇴 처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친구들 사이엔 조심스럽게 그의 자살 소식이 퍼져나갔다.
표면적으로 그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학업은 순조로웠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 듯했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몇몇 지인들은, 그가 종종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나는 그냥, 나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이 응원하는 나는, 사실 진짜 내가 아니야.
내가 느끼는 불안은 아무도 모르고, 나는 그걸 숨기느라 더 힘들어./
그는 실패해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은 자기감정의 실종, 그리고 보이는 나와 느끼는 나 사이의 끊어진 끈 때문이었다. 하루하루,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자기 안의 불안을 묵묵히 지워내고, 표정, 말투, 게시물 하나하나에 ‘괜찮은 나’를 삽입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점점 더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곳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삶은 충분히 존재했지만, 그 자신에게 살아 있을 이유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한 유학생의 비극적 모습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보이는 나’가 ‘살아 있는 나’를 대신해 살아가는 현상, 그 구조가 자살이라는 극단으로 연결되는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다.
이미지는 가볍다. 빠르고, 선명하며, 매끄럽다.
그것은 설명 없이도 전달되고, 해석 없이도 소비된다.
반면 내면의 자기감정은 가볍고 무겁다. 느리고, 빠르고, 단순하고, 복잡하며, 일관성 없이 움직인다.
이미지는 충돌을 피하지만, 감정은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이미지는 정리되어 있지만, 감정은 언제나 잔여와 파편을 남긴다.
현대 사회는 이 차이를 ‘효율성’과 '성공'이라는 잣대로 구분 짓는다.
사회는 더 이상 진짜를 원하지 않는다. 보기에 좋은 것을 원할 뿐이다.
실체보다는 인상, 맥락보다는 장면, 관계보다는 반응 속도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자기감정’이 아니라 ‘이미지’가 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대신, 멋지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법을 학습한다.
기뻐도, 괴로워도, 상처받아도, 그래서 울고 싶어도 그 감정을 보여주기보다 조율하고 다듬고 포장한다.
감정은 공유되지 않고, 이미지 속에 봉인된다.
이 과정이 매일 반복될수록, 자아는 점점 더 자신과 멀어진다.
느끼는 자아는 숨고, 보이는 자아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 보이는 자아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수록,
진짜 나는 더더욱 말할 수 없어진다.
/나는 괜찮지 않아./ 이 말을 꺼내는 순간,
그동안 만들어온 ‘멋진 버전의 나’가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면의 감정을 숨긴다.
아니, 감정을 던져 버리고 잊는다.
그리고 그렇게, 내면의 느낌과 감각을 천천히 포기해 간다.
하지만 감정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징후다.
감정 없는 인간은 기능할 수는 있어도, 존재할 수는 없다.
숨을 쉬고 움직일 수는 있지만, 더는 ‘나로서’ 살 수는 없다.
이미지는 숨을 쉬지 않는다.
이미지의 심장은 차갑다.
이미지는 멋있게 보이고 소비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는 언제나 흔들리고, 망설이고, 부서진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너무 조용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자기감정을 포기하고, 자기 내면의 파동과 이야기를 외면하고,
타인의 눈에 적합한 자아로 살아가는 연기를 하다 보면,
자신이 언제부터 무너졌는지도 모른 채 사라지게 된다.
자살은 큰 소리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조용한 순간에,
모든 연기가 멈춘 그 ‘무표정의 밤’에 찾아온다.
자신의 감정을 버리고 이미지만을 선택한 자는,
내면의 침묵 속에서 자아를 잃고,
끝내 삶을 지탱할 이유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자살론 3-4.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자아 – 자살로 연결된 이미지 붕괴의 사례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