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자살론 06화

[자살론] 뇌의 제거 명령

자살로 향하는 감정의 3층 구조

by Mind Thinker

자살론 3편 5장

5장. 뇌의 제거 명령


죄책감은 용서받을 수 있다. 사과하고, 참회하고, 벌을 받으면 그 감정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수치심은 다르다. 수치심은 ‘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뿌리 깊은 감각이며, 존재 자체에 대한 무가치함의 감정이 내면화된 상태다.


죄책감은 관계를 복원하려는 감정이지만, 수치심은 관계 자체를 끊고자 하는 감정이다. 그것은 자아의 내부에서 ‘나 자신과의 관계’를 절단시키며, 내 존재가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호로 작동한다.


때문에 수치심은 회복이 아니라 도피를 부른다.
그리고 도피할 수 있는 공간마저 사라졌을 때,
그 감정은 더 이상 숨지 않고 존재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순간, 인간은 선택하지 않는다.
존재가 스스로를 포기하는 회로가 작동할 뿐이다.


자살은 무책임한 도피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이 내리는 마지막 판결이다.



자살로 향하는 감정의 3층 구조


자살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다.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자아를 지탱할 수 없고, 자아가 오랫동안 거짓 연기를 하며 채 고립된 끝에 도달하는 구조적 소멸의 결과다. 그 귀결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토대가 무너지고, 타자의 응답이 사라지며, 자신이라는 실체가 증발하는 세 겹의 해체 과정을 거쳐 다다르는 끝이다.


가장 바깥의 층,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존재는 끊임없는 판단의 눈길 아래 놓여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초자아(superego)를 외부의 도덕적 기준이 내면화된 감시 기제로 보았다. 그러나 초자아는 단순히 규범을 전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때로 부모보다 더 무자비하고, 타자보다 더 잔혹한 심판자가 된다.

/너는 잘못됐다, 너는 실패했고, 벌을 받아야 한다./

초자아는 자아에게 존재 그 자체의 유죄를 선고한다. 그때 수치심은 발생한다.
그것은 실수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비가치적이라는 판결에 응답하는 감정이다.
수치심은 자아가 스스로를 삭제하고자 하는 감정의 첫 구조다.

그러나 그 감정이 생겨난다고 해서 모두가 자살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은 자아가 감정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반드시 타자의 공감과 지지와 같은 정서적 반응, 곧 ‘자기대상(selfobject)’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기대상이란 단순한 위로자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비추어주는 거울이자, 고통을 함께 견디는 정서적 공간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이 거울을 잃었다.
타자는 이상적 이미지만을 반사하며, 진짜 감정에는 응답하지 않는다. 타인은 나의 슬픔을 듣기보다 내가 보여준 이미지에만 반응한다. 공감은 사라졌고, 관계는 조건화되었으며, 감정은 좋아요의 수로만 측정된다.


그때 감정은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이 되고, 그 침묵은 자기 해체로 이어지는 고립이 된다.

더 이상, 자아는 말하지 못한다. 감정을 설명할 공간이 없고, 감정을 견뎌줄 타자가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는 감정적 무효감이 자아의 중심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의 내부 무대가 무너진다.


도널드 위니컷(D. W. Winnicott)은 환경이 진정한 자기를 지탱하지 못할 때, 인간은 ‘거짓자아(False Self)’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가면이다. 처음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쓰지만, 오래 쓰면 자신조차 그 가면 속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잊는다.

/SNS에서 괜찮은 나, 회사에서의 유능한 나, 가정 안에서 역할을 다 하며 실망시키지 않는 나/
그 모든 ‘나’는 타인의 욕망에 맞춰진 복제된 자아들이다. 진짜 자아는 너무 오래 침묵했고, 그 침묵은 결국 가면의 피로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자아는 선언한다.

/나는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있을 수가 없다./

초자아는 존재를 단죄하고,

자기대상은 사라지며,

거짓자아는 소멸한다.
이 세 층이 무너지는 그 순간, 자살은 감정의 마지막 문장이 된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침묵이며,
충동이 아니라 구조며,
죽음에의 욕망이 아니라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감정의 소멸이다.

초자아는 말한다. /너는 잘못됐고, 벌을 받아야 한다./
자기대상은 침묵한다. /나는 너의 감정을 지지하지 않는다./
거짓자아는 소멸한다. /나는 더는 나를 연기할 수 없다./

이렇게 감정의 세 층이 무너져 겹쳐질 때,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도 감정적으로 해석되지 못한 채 무(無) 속에 존재하게 된다.

자살은 바로 이 구조적 무너짐의 감정적 표현이자,

존재가 마지막으로 내뱉는 해체의 언어다.

그렇게, 세 겹의 해체를 지나
마침내 ‘나’의 소멸이라는 강으로 흘러간다.



뇌의 명령 -존재하는 것은 위험하다. 제거하라.


수치심은 단지 부끄러움의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자기 거부로 이어지는 신경계의 전방위적 반응이다. 감정은 의식 이전에 신경적으로 반응하며, 그 반응은 감각이 아니라 해석이며, 때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이 된다.


뇌는 수치심을 생존을 위협하는 정서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신체적, 인지적, 감정적 대응을 즉각적으로 가동한다. 이것은 단지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신호로 처리되는 위기 반응이다.

수치심이 유발될 때 뇌에서는 세 가지 주요 회로가 중심적으로 작동한다.


편도체(Amygdala)는 정서적 위협에 즉각 반응하는 시스템으로, 수치심을 포함한 공포, 불안, 당혹감 등을 탐지하고 강화한다. 이곳은 원초적 생존 감정의 경보장치다. 누군가의 앞에서 모욕당했을 때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 반응은 바로 이 편도체의 경고 작용이다. 이 단계에서는 수치심을 생존을 위한 긴급 신호로 간주한다.


전측 대상회(Anterior Cingulate Cortex, ACC)는 이 정서적 고통을 '통증'으로 처리한다. 수치심을 겪을 때 사람들이 ‘차라리 맞는 게 낫겠다’라고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뇌가 수치심을 육체적 고통처럼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 회로는 감정적 고통을 ‘부상’으로 인식하며, ‘고통을 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감정적 고통이 신체의 회피 반응을 유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내측 전전두엽(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 VMPFC)은 자기 평가와 자기비판을 담당한다. 이 영역은 인간이 /나는 나쁜 사람이다, 나는 실패작이다/라는 도덕적 자기 판단을 내릴 때 활성화된다. 이 판단은 논리적 사고라기보다 뇌가 자동적으로 내려버리는 생존 판단이다. 감정은 판단보다 빠르고, 그 판단은 실체화되기 전에 이미 뇌 속에서 현실이 된다.


이 세 영역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회로처럼 작동한다. 편도체가 경고를 울리고, 대상회가 고통을 처리하고, 전전두엽이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의미를 덧씌우는 방식이다. 이렇게 형성된 회로는 ‘감정적 자기 삭제 회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회로가 활성화될 때, 인간은 자신을 ‘ 위험한 존재’로 판단하게 된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타인의 감정과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다. 내가 사라지면 모두가 더 나아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의식적 판단이 아니라, 뇌의 구조적 반응이다. 이것은 뇌의 회피회로가 만들어낸 생존 전략이다. 이때 뇌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회피를 선택한다. 자살은 이 신경적 착각의 마지막 경로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회피반응은 단지 외부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수치심은 자신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삭제하려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부의 어떤 공간에 대해서가 아닌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반응이다.


이것은 단지 고통스러운 정서를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뇌가 의미 해석 구조 자체를 변형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과정이다. 감정이 자아를 통제하고, 해석을 왜곡하며, 결국 자기라는 존재를 ‘부적합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신경 회로의 고착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된다. 한 번 이 회로가 형성되면, 같은 감정 자극이 반복될 때마다 더 빠르고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은 반복되는 수치 자극을 더욱 깊은 ‘자기 제거 회로’로 고정시킨다. 즉, 수치심을 반복적으로 겪는 사람은 감정을 자아의 부정으로 연결 짓는 뇌의 길을 점점 더 쉽게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자살 실행버튼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를 감정적으로 삭제하기 위한 뇌의 고도화된 전략이다.

자살은 이 구조의 최종적 귀결이다.

그것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감정이 적절한 해석을 통해 해소되지 못한 채 신경적으로 반복되어 쌓인 고착된 회피의 종말이다. 뇌는 더 이상 외부 세계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자기 존재 자체를 제거하려는 방향으로 생존 명령을 반전시킨다.


자살은 절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해석의 실패’와 그 해석을 감당하지 못한 뇌의 오류적 명령이다.

그리고 이 명령은,

인간이 감정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하고,

도피조차 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있을 때 가장 쉽게 발동된다.


뇌는 이때 스스로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존재하는 것은 위험하다. 제거하라>




존재의 가치


자살은 수치심의 종착지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응답받지 못하는 구조, 내면이 해석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감정 주체가 지속적으로 침묵해야 하는 삶 속에서, 자아가 자기감정과의 관계를 완전히 상실했을 때 발생하는 실존적 파열이다.

이로부터 회복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감정을 감정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구조적, 감정적, 관계적 토대를 다시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자아는 감정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정체성은 기억의 구조가 아니라, 감정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구성하는 감각적 일관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감정의 주체가 감정을 느끼기 이전에, 그것을 사회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는지부터 검열하게 만든다. 수치심은 이때 발생한다. 그것은 /내 감정이 정상이 아니라고, 너무 약하다고, 지금 말할 때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타자의 시선이 지시할 때 발생하는 정서적 억압의 결과다.


따라서 치유는 감정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단지 우울을 약물로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감정이 비난받지 않고, 왜곡되지 않고, 안전하게 발화될 수 있는 장소를 사회적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울 수 있는 공간: 감정은 타인의 지지 속에서 ‘말’로 변환되어야 해석될 수 있다. 눈물이 허용되는 사회는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실패를 공유할 수 있는 장: 성공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는 실패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패는 존재의 무가치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정이 흔들리고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새로운 관계와 기회가 열리는 시작점이다.

이미지보다 내면을 먼저 들어주는 관계: 감정의 회복은 거울을 바꾸는 일이다. 이상화된 모습만을 비추는 왜곡된 거울이 아니라, 상처 난 내면의 감정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 공감으로 타자의 정서적에 응답하는 사회적 거울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조의 회복은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회’를 설계하는 일로 귀결된다. 수치심의 본질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는 데 있으며,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사회에서, 자살은 필연적으로 증가한다. 자살은 이 구조가 감정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가장 극단적인 표현이며, 감정이 배제된 사회에서 자아가 표출하는 마지막 절규다.


자살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통계적 접근이나 사후 관리가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는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감정’이 부차적이고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며 관계의 기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위에서 감정의 언어를 복원하고, 타인의 감정에 반응하는 윤리적 감수성을 회복하며, 고립된 자아들이 연결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망을 재구축해야 한다. 즉, 감정이 소외되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 감정이 발화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그리고 감정의 흐름이 곧 삶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의 존재 자체가 의미이고 가치'이기 때문이다.






keyword
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