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3편-6장, 에필로그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현대 사회를 '모든 것이 드러나야만 존재하는 체계'라고 진단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러한 강박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만이 진실로 여겨지는 체계를 만든다.”
이러한 투명성은 단순한 윤리적 요구나 개방성의 지향이 아니다. 그것은 통제와 자기 검열을 유발하는 시선의 체계이며, 인간의 내면을 조형하는 새로운 규율장치이다. SNS, 실시간 피드백, 디지털 흔적의 공유는 자발적 노출이라는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상 감시가 내면화된 ‘자기 감시의 구조’로 기능한다. 이 사회에서 감정과 존재는 ‘보이는가 아닌가’의 기준에 따라 실재성을 획득한다.
개인은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기록하고 공유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무언가를 느끼기보다, 무엇을 느꼈는지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좋아요’, 조회수, 반응 수치는 감정의 진정성을 대체하고, 존재는 스스로의 깊이가 아니라 외부의 반응성에 의해 측정된다.
한병철이 지적하듯, 투명사회는 궁극적으로 사적 내면의 파괴와 감정의 탈육체화를 낳는다.
고통은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침묵은 오해받기 쉬운 공백으로 간주되며,
감정은 해석되지 않는 주관적 경험이 아니라
정량화되어 유통 가능한 데이터로 환원된다.
이때 개인은 자기 존재를 자신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타자에게 승인받는 방식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나’라는 존재는 실재라기보다, 디지털 거울에 투사된 이미지의 잔상이 된다. 투명함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란 무엇인지를 외부에서 규정받는 환경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환경은 점점 더 감정을 억제하고, 고통을 포장하게 만든다. 고통은 보이지 않아야 하고, 감정은 밝고 명랑해야 하며, 내면은 항상 설명 가능하고, 해명 가능해야 한다.
그리하여 투명성은 더 이상 자유의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침묵을 강요하는 구조이며,
‘느낄 수 있음’의 권리를 잃게 만드는,
자기 소외의 시대적 양식이다.
이러한 ‘투명함’의 강박은 단순한 시대적 유행이 아니다.
그 근본에는 인간 내면의 자발성을 통제하려는 보다 깊은 권력 구조가 놓여 있다.
즉,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 사회는 단순한 표현의 과잉이 아니라,
감시의 내면화라는 더 오래되고 구조적인 문제의 현대적 재현이다.
여기서, 푸코의 권력론과 마주한다.
푸코는 ‘투명사회’라는 개념 이전에, 감시와 규율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형성하는 권력의 탄생을 통찰하고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현대 사회를 '감시의 사회'로 규정했다. 그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판옵티콘(Panopticon)’은 제레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의 구조에서 비롯되었지만, 푸코는 그것을 근대 권력의 보편적 형식으로 해석했다. 중심 탑에서 모든 방을 감시할 수 있는 구조. 그러나 중요한 건 ‘실제로 감시하는가’가 아니다. 감시받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구조’, 그리고 그 감시가 내면화되어 주체 스스로를 통제하게 되는 메커니즘이다.
그는 '감시와 처벌'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옥은 단지 범죄자를 가두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 모두가 스스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권력의 모형이다.”
푸코에게 있어 현대의 권력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억압이 아니다. 그것은 '규율(discipline)'의 형태로, 교육, 병원, 공장, 사무실, SNS 등 일상의 구조 속에 스며든 비가시적 통제다. 이 권력은 우리를 순응시키고, 규범화하며, 자기 자신을 ‘정상적’이게 만들도록 유도한다.
한병철이 말한 ‘투명사회’의 강박은 바로 이 푸코적 통찰 위에 세워진 것이다.
SNS 속의 ‘자발적 기록’은 더 이상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화된 감시 체계에 따른 행동 반응이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반응받을지를 고려한 연출로 바뀐다. 고통은 검열되고, 침묵은 의심받으며, 감정은 스스로 재단하고 축소하게 된다.
자기 감시는 타자의 강요가 아니라 ‘나 자신을 통제하는 나’의 생산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을 감시하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을 자기 안에 심고 사는 존재로 전환된 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자아는 점점 더 ‘내가 나를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로 평가된다.
감정은 진실이 아니라 통제력의 실패로 간주된다.
울음은 미숙함이고, 분노는 미성숙이며, 슬픔은 곧 약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은 타인의 강압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이상적 자아’에 의해 무너진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어디에나 있고, 권력이 없는 곳은 없다.
그것은 억압이 아니라 생산이며, 자아의 생산까지도 포함한다.'
현대인은 이제 감시받기 때문에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다.
감시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감정조차 먼저 통제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자아는 누구보다 치열한 자기 통제의 무대에서
‘정상성’이라는 이상을 연기하며 스스로를 해체해 간다.
푸코가 권력을 ‘행위의 외적 통제’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을 형성하는 메커니즘’으로 이해했다면,
지젝은 그 내면에 자리한 ‘욕망’ 자체가 타자의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고 본다.
즉, 감시는 더 이상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아니다.
감시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 자체에 이미 타인의 시선이 끼어드는 방식으로 전환된다.
푸코가 주체의 형성을 규율로 본다면,
지젝은 그것을 욕망의 연출로 본다.
인간은, 누가 나를 보는가가 아니라,
누군가, 내가 무엇을 원하길 바라는 가에 의해 구성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을 현대 사회에 맞게 재해석하며 이렇게 묻는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 질문의 답은 언제나 타자의 시선 속에 얽혀 있다.”
지젝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애초부터 자율적이지 않다. 인간은 욕망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타자가 우리에게 욕망하길 기대하는 것을 욕망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대상은 나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타자가 내게 기대하는 바를 욕망하게 된 결과인 경우가 많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타인이 자신에게 원하길 바란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좇는다.”
이 구조는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잠식한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따라 욕망을 조정하게 되고, 그 조정된 욕망에 맞추어 감정까지 연출하게 된다. 그렇게 현대인은 ‘밝은 표정’, ‘자신감 있는 태도’, ‘유능한 역할’을 끊임없이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개개인은 점차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
SNS 속의 나는 늘 활기차고 긍정적이어야 하며,
직장에서는 언제나 논리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하고,
일상 속 관계에서는 늘 무해하고 안정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이처럼 현대인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 보다,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아를 꾸리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자기 욕망이 무엇이었는지조차 희미해지고, 감정은 자신에게서 멀어져 간다. 욕망은 탈주체화되고, 감정은 타인을 위해 연출되는 장면으로 변하며, 자아는 점점 자신이 만든 장치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지젝은 말한다.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이다.”
이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인간의 정체성이 얼마나 타자 지향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감정이 얼마나 쉽게 ‘보이는 감정’으로 전환되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명제다.
지젝이 욕망이 타자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할 때,
그 욕망의 대상은 대개 ‘소유하는 것들’이다.
성공, 아름다움, 인정, 사회적 지위.
이러한 욕망은 결국 존재의 깊이보다, 소유의 목록으로 자아를 채우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에리히 프롬과 만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조차 소유의 대상이 되며,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비교 가능한 소비항목으로 환원된다고 경고한다.
지젝이 욕망의 타자화를 말한다면,
프롬은 욕망의 상품화와 감정의 소외를 이야기한다.
독일 출신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분석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존재(Be)’와 ‘소유(Have)’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의 대표작 '소유냐 존재냐'에서 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로 자신을 정의하는가,
아니면 무엇을 ‘느끼고 살아내는가’로 자신을 정의하는가?”
프롬에게 있어 현대인은 ‘존재하는 삶’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점점 더 감정과 내면의 경험을 ‘소유 가능한 것’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자신을 소유의 목록으로 치환하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직업, 재산, 외모, 성과, 타인의 인정, SNS의 좋아요.
이 모든 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 대신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된다.
감정조차 소유된다
프롬은 말한다. 현대 사회는 감정마저도 ‘가지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랑을 한다"는 말보다 "사랑을 가졌다"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슬픔을 느낀다"는 표현보다 "슬픔에 빠져 있다"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언어와 사고 구조는 감정을 생생한 경험이 아니라 소유 대상, 관리 대상, 정량화된 객체로 인식하게 만든다.
프롬은 사랑과 감정은 ‘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현대인은 감정조차 관계에서 느끼는 생생한 교감이 아니라, ‘내가 얼마만큼 애정을 받았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나를 인정해 주는지’와 같은 측정 가능한 가치로 대체해 버린다. 그리하여 감정은 더 이상 존재의 깊이를 나타내지 못한다. 오히려 감정은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 '빼앗길 수 있는 것'에 대한 공포 속에서 축소되고 왜곡된다.
프롬에게 있어 자아의 붕괴는 단순한 심리적 문제나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인간을 ‘존재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비교 가능한 상품’이나 ‘타인의 기준에 따라 조정되는 객체’로 만드는 데서 비롯된다.
존재는 교감 속에서 형성되지만,
소유는 경쟁 속에서만 확보된다.
감정이 경쟁의 도구가 되고, 인간관계가 교환의 수단이 되며, 자아가 성과의 합계로 환원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더 자기 존재에 대한 경험을 잃는다.
프롬은 말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기계처럼 작동하도록 훈련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느끼는 인간’이기를 멈추고,
‘정상적인 기계’가 되기를 요구받는다.”
프롬의 사유는 바우만의 유동하는 자아, 지젝의 타자화된 욕망, 한병철의 투명사회가 말하는 내면의 공백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는 ‘감정이 사라진 시대’는 곧 존재가 무너진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대의 끝에 자살이 자리한다면,
그것은 단지 비극이 아니라,
감정이 사라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존재의 저항이기도 하다.
프롬이 말한 ‘소유된 감정’과 ‘객체화된 자아’는
오늘날처럼 변화가 빠르고,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 큰 불안과 혼란으로 이어진다.
정체성은 영속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즉흥적 재조립과 연출 속에서 구성되며,
존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감정은 뿌리내릴 곳을 잃는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정성과 자아의 유동성에 대해
보다 구조적으로 통찰한 사상가가 바로 지그문트 바우만이다.
그는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 즉 끊임없이 형체를 바꾸는 유동성의 지배 구조로 설명한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현대사회를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로 규정하며, 그 핵심 속성을 불안정성, 유동성, 지속 불가능성으로 설명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통적 근대사회가 안정된 정체성과 예측 가능한 삶의 구조를 제공했다면, 액체 근대는 모든 것을 빠르게 변화시키며, 고정된 자아의 가능성을 붕괴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인의 자아는 영원히 임시적이다.
언제든 폐기될 수 있으며, 끊임없이 새롭게 ‘꾸며져야’ 한다.”
이러한 자아는 더 이상 내면적 통일성을 기반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 소비문화, 디지털 기술, 이미지 매체 등 외부 조건에 따라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재포장되는 구성물이다. 자아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그때그때 필요한 기능에 따라 조립되는 ‘모듈화 된 주체’로 전락하며, 이는 근본적인 존재 불안을 낳는다.
액체 근대에서 감정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감정은 영속적 관계를 통해 뿌리내리기보다,
즉각적인 반응성과 효율성 속에서 ‘소비 가능한 상태’로 존재한다.
관계는 쉽게 시작되며, 쉽게 끊어지고, 자아는 그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이러한 유동성은 자유를 주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과거에는 소속이 정체성을 만들어줬다면, 이제 소속되지 않는 능력, 계속해서 ‘나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개인의 생존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피로와 불안을 유발한다.
자아는 스스로를 계속 재구성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는지를 끝내 붙들지 못한 채,
표면만을 덧칠해 간다.
감정은 유지될 수 없고, 관계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며, 자아는 고정되지 않고 표류한다.
그리고 그렇게 유동하는 삶 속에서, 인간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나를 얼마나 더 오래 견딜 수 있을까?”
현대 사회는 너무 오래, 자살을 개인의 비극으로만 여겨왔다.
그는 왜 죽었을까?
그 질문은 항상 한 사람의 내면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자살은 내면의 문제만이 아니다.
자살은, 서로의 감정을 해석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발생한다.
사회는 그의 고통을 말하게 하지 않았고,
사회는 그의 감정을 함께 견뎌주지 않았으며,
사회는 그가 흔들릴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인간은 감정으로 존재하는 존재다.
느끼지 못하면 살 수 없고,
느껴도 말할 수 없으면 무너진다.
자살은 이 감정이 끊긴 자리에서 나타나는
가장 정직한 소멸의 언어다.
그는 스스로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느끼며 살 수 없도록 만들어진 구조’에 의해 지워진 것이다.
현대 사회는 말한다.
“드러나야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투명한 강박은,
감정을 이미지로 포장하게 만들고,
존재를 성과로 측정하게 하며,
슬픔마저 유용한 콘텐츠로 전환한다.
고통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자살은 돌연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해석을 상실한 사회에서,
한 존재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마지막 대화다.
그러므로 사회는 자살을 순간적 선택에 의한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본질적 감정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는 얼마나 외로웠는가?
얼마나 오래 말하지 못했는가?
얼마나 깊이 부끄러움을 숨기고 있었는가?
그가 살아온 날들 속에 축적된 침묵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침묵 속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될 것이다.
자살을 막으려는 현수막을 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사회적 시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슬픔이 허용되는 관계,
실패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문화.
이것이야말로 삶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윤리다.
존엄은 감추는 데 있지 않다.
존엄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감각이 사회 안에 설 자리를 가질 때,
인간은 ‘나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설계하는 시대에서
내 감정으로 나를 재구성하는 시대로.
외모가 아니라 느낌으로,
성과가 아니라 감정으로,
타자에게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존재로.
자살은 '자신만의 고유한 감정이 부정된 존재'의 마지막 언어였다.
국가는, 사회는, 공동체는 그 언어를 함께,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더는 누구도 감정을 숨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보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느낌을 위해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