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2장
현대인의 자아는 기능적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일한다, 나는 기여한다, 나는 생산한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 현대인은 내면의 감각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교환 가능한 기능을 통해 입증된다.
“나는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다. 가장이다. 나는 돈을 번다. 나는...”
이것은 단순한 자기 설명이 아니라 자아를 사회적 질서에 연결시키는 생존의 문법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그 맥락은 기능성과 생산성을 기준으로 자격을 부여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존재를 ‘느끼는 주체’가 아닌 ‘기능하는 객체’로 구조화한다. 그리하여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잃는 감각에 직면한다.
이때의 상실은 단지 경제적 조건의 붕괴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어를 잃는 경험이다.
해고되었을 때, 폐업했을 때, 파산하거나 연체 통보를 받았을 때,
사람은 단지 경제적 도구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규정하던 정체성의 언어를 상실한다.
현대인은 스스로를 사회적 기능의 거울에 비추어 평가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실패는 단순한 상황의 악화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거가 무너지는 경험으로 다가온다.
존재는 느끼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것(performance)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패자다', ‘무능하다’는 말은 단지 타인이 무심코 던진 평가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퍈결일 경우는 위험하다.
그것은 존재의 자격을 평가하는 정서적 판결이다.
인간은 평가받는 존재이기에 앞서, 스스로를 평가하는 존재다.
타인의 시선보다 더 강력한 것은 내면화된 자의식이다.
경제적 실패는 외부적 사건으로 시작되지만,
그것이 자살로 이어지는 과정은 감정의 구조가 전환되는 순간에서 비롯된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무능하고 가치가 없다'
이때 감정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정체성을 구성하는 힘이 된다.
실패한 감정은 실패한 자아를 만든다.
이것은 일시적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은 자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문장은 처음엔 객관적인 진술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문장이 반복되거나,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하고 고립될 때, 그것은 ‘나는 실패다’라는 정체성의 언어로 변형된다.
이런 감정의 전이는, 실존적 문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인간이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대상에 의해 도리어 정의될 때, 자유는 감옥이 된다"고 했다. 현대 자아는 스스로 기능과 성과를 자아 정체성의 근거로 설정하고, 그 기능이 멈추었을 때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주체가 되어버린다. 자유로운 반성은 끝내 자기혐오의 기계로 전환된다.
여기서 감정은 더 이상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구조화된 정서, 즉 ‘부정적 감정의 정체성화’로 응고된다.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정체성의 일부가 되며, 이는 점차 언어의 침묵, 사회적 철수, 존재의 소거로 이어진다.
오늘날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존감(self-worth)의 기초이자, 사회적 관계망에 접근할 수 있는 입장권이며,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언어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현대인은 비슷한 대답을 한다.
"나는 회사원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주부다. 나는 자영업자다. 나는 의사다. 나는 교사다. 나는 교수다. 나는 사장이다. 나는 배달원이다. 나는 무직이다. 나는... 나는..."
현대인은 자신을 존재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function)으로 인식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아 정체성의 핵심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기능이 중단되면 존재도 함께 흐려진다.
실직자는 단지 수입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설명 가능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지금 백수야”라는 말이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기 가치의 정지를 선언하는 말이며, 사회적 시선의 외부로 밀려났다는 고백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는 특히 불안정 노동 체계 속에서 더욱 심화된다.
플랫폼 노동, 단기 계약직, 프리랜서 형태의 고용 구조는 노동자에게 지속적인 자기 갱신을 요구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스스로를 마케팅하고, 경쟁력을 입증해야만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실패하거나 중단되는 순간, 사람은 단지 해고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등재 자체가 해지되는 경험을 한다.
불안정한 고용은 불안정한 자아를 낳는다.
때문에 '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자아는 안정된 구조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은 더 이상 ‘현재의 나’를 정체성의 근거로 삼지 못하고, ‘예측된 시장 가치’에 따라 자신을 판단하게 된다.
실직은 단지 고용의 중단이 아니라 존재의 해지로 인식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살을 논할 때, '극심한 상황', '압도적인 스트레스'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실제로 자살로 이어지는 것은 극단적인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감정 해체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실패는 감정의 해석 방식을 바꾸고, 자기 감정에 대한 통제권 자체를 잃게 만든다.
이것은 '경제적 실패 → 정체성 해체 → 감정적 고립 → 침묵 → 자기 부정 → 자살' 의 순서로 흐른다.
경제적 실패는 사람을 단지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해석할 언어를 앗아간다.
고립감은 종종 '존재할 수 없다'는 감정으로 연결된다. 경제는 사회 구조의 일부지만, 감정 구조에도 깊이 침투한다. 자살은 바로 이 감정 구조가 무너질 때 발생하는 존재의 총체적 정지다.
자살은 단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감정이 제도화된 자본주의,
존재가 시장화된 사회,
자아가 성과로만 측정되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이 세계에서 실패는 감정의 파국이며, 자살은 그 구조의 끝이다.
공지입니다. 개인 사정으로 한 주(목, 토) 쉬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