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1장
공기는 생존에 절대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기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존재하며,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고, 특별한 자격 없이 숨 쉴 수 있다. 공기는 그 자체로 ‘생존의 기초’이지만, 그것은 ‘자격’이 필요 없는 조건이다.
반면, 돈은 다르다. 돈은 의식된다. 아니, 없을 때 비로소 존재 전반을 위협하는 실존의 문제로 다가온다. 공기가 없으면 죽지만, 돈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신체는 살아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삭제된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의 존재 상황이다. 현대인들은 말한다. “돈 없으면 죽는다.” 그러나 그 죽음은 심장마비나 굶주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죽음, 존엄의 박탈, 관계의 단절, 그리고 존재 자격의 실격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에서 돈은 생존의 수단을 넘어서 존재의 조건으로 이행했다. 가난은 단순히 재산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접근할 수 없는 결핍 상태다. 가난한 이는 초대받지 못하고, 소속되지 못하며, 발언할 수 없다.
누군가를 “무일푼”이라 말할 때 그 사람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판정한다.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쓸모없다”, “책임질 수 없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암묵적 평가를 내포한다.
존재는 자본에 의해 서열화되고, 돈은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1차원 인간’에서 현대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자율적 사유’가 아닌 ‘소유의 체계’로 편입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인은 스스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할 것을 주입받고 그것을 소유함으로써만 존재를 증명한다”라고 분석한다. 인간의 내면은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욕망의 소비창구가 되었고, 돈은 존재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언어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자유를 약속하면서 동시에 ‘합리성(rationality)’이라는 이름으로 감정과 고통, 불안, 반항을 도구적 이성에 예속시킨다. 감정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간주되고, 삶의 모든 영역이 기능과 목적, 교환가치로 재편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생산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된다.
자본은 삶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자체를 기능화시킨다.
이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현대 자본주의를 “전체주의적 문화산업”이라 명명하며, 인간의 자율성과 감성이 광고, 미디어, 소비 논리로 포섭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마저 시장성 있는 콘텐츠로 길들이고, 고통과 저항조차 브랜드화한다.” 고 말하는 아도르노에게 있어 돈은 단지 교환의 매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형식, 관계의 모델, 존재의 해석기호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인간은 더 이상 내면의 일관성이나 자발성으로 존재를 구성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회가 요구하는 욕망, 성공, 효율, 밝음, 견고함의 외피를 두르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둔다. 돈은 단지 물질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사회에서 인식되고 승인받는 방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돈은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문법이 되었다.
숨 쉴 수 있어도, 지불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못한다.
말할 수 있어도, 보증할 수 없으면 존중받지 못한다.
감정을 가졌어도, 표현할 수 없으면 감정조차 없는 존재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 모든 조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돈이 있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현대사회를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ebenswelt)’로 구분한다. 이때 ‘체계’란 화폐와 권력이 작동하는 추상적 구조이고, ‘생활세계’는 개인의 감정, 언어, 문화가 작동하는 일상의 장이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체계’의 논리를 앞세워 점점 더 ‘생활세계’를 침식한다는 데 있다. 감정과 관계, 말과 몸의 세계가 화폐의 논리로 식민화된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을 따르는 기능 단위’로 전환된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이 흐름을 더 급진적으로 설명한다. 그는 현대사회를 ‘자기 준거적 폐쇄체계’로 본다. 경제, 법, 교육, 건강 등 각 시스템은 고유한 코드로 작동하며,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은 오직 매개체(medium)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경제체계의 매개는 ‘화폐’다. 루만은 말한다.
“화폐는 경제체계가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코드이다.”
이 말은 곧, 자본이 아닌 언어로는 사회에 접근할 수 없고, 존재조차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뜻이다.
결혼에는 자산이 필요하고, 병원에는 보험이 필요하며, 학력조차도 사교육 자본이 투입되어야 형성된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무엇을 얼마나 지불할 수 있는가’로 바뀐다.
존재는 감정이 아니라 기능으로 정의되고, 그 기능은 화폐 단위로 수량화된다. 감정은 ‘경제적 부담’으로 측정되고, 인간관계조차 ‘수익-비용’이라는 무의식적 계산 아래 배치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관계 이전에 수치(數値)로 정리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확장이 아니다. 그것은 화폐의 개념 자체가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고전 경제학에서 화폐는 교환의 수단이자 가치의 저장 수단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화폐는 단순한 거래 매체를 넘어, 존재의 등가물이자 사회적 승인장치가 되었다. ‘나는 지불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는 이 사회에 소속될 수 있다’는 신호이며, ‘지불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한 소비 불가능이 아니라, 사회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한다.
화폐는 이제 상징(symbol)이 아니라 구조 그 자체다. 그것은 더 이상 실물 가치나 실체에 대한 대리 기호가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대 화폐는 실재를 지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스스로 실재처럼 작동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um)’다.
즉, 화폐는 어떤 실체의 그림자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작동 방식이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무엇을 ‘가리키는’ 상징이 아니라, 의미와 관계, 감정, 자격, 신뢰까지를 결정짓는 구조적 조건이다.
현대의 화폐는 실제적 물질(현금)보다 숫자, 데이터, 디지털화된 추상값으로 존재한다. 현대인은 더 이상 ‘지폐를 소지한 사람’이 아니라, ‘잔고를 보유한 데이터베이스의 항목’으로 평가된다. 이 추상성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더 치열한 통제와 자기 검열의 장치로 전환된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현대 권력의 핵심을 “포섭 속의 배제”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기능하지 못할 때, 사회적으로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하는 구조”를 지적한다.
화폐의 세계에서 이 무가치함은 단지 돈이 없음이 아니라,
자신을 설명할 기호를 잃는 상태다.
신용이 없는 사람은 말할 수 없고,
지불 능력이 없는 존재는 침묵하도록 강요받는다.
결국 현대인은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말하기 위해서는 지불 가능해야 한다.
자신을 증명하려면 삶을 서사화해야 하고,
서사화는 경제적 조건이 허용될 때만 가능하다.
화폐는 이제 삶의 장면들 ‘사랑, 질병, 실패, 회복’을
선택적으로 허용하거나 거부하는 감정의 관리자다.
이처럼 자본은 존재를 형성하는 외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 그 자체로 이행되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존재한다, 고로 느낀다”라고 말할 수 없다.
이제는 “지불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시대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단순한 ‘소유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자격을 선별하는 최종 기준,
그리고 감정을 구조화하는 ‘언어의 구조’가 되었다.
심리학자들이 강조하는 감정의 사회적 성격은,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감정은 본래 내면에서 발생하는 자율적 감각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부분 관계 맥락 안에서 해석되고 표현된다. 우리는 슬픔을 느낄 때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고, 기쁨을 느낄 때 함께 웃는 사람을 찾는다. 감정은 언제나 타자와의 연결을 전제로 하며, 그것은 곧 사회적 기호로 기능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점점 더 ‘경제적으로 표현 가능한 언어’로 환원된다. 사랑, 기쁨, 감사조차도 화폐나 물질을 통해 매개될 때에만 진정성을 확보하게 된다.
“정말 고마워.”라는 말보다,
“저녁은 내가 살게.”라는 말이 관계를 더 잘 유지시킨다.
감정은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경제적 제스처를 통해 '중계된 감정'으로 유통된다.
이것이 문제다. 감정은 더 이상 자기 경험에 뿌리내린 내면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번역되고 검증되어야 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고마움’은 카드 결제 후에야 전달되고,
‘사랑’은 기념일 선물로 구체화된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경제적 외형 없이 표현한 감정은 공허하게 받아들여진다.
돈은 더 이상 감정을 부정하는 대립항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고 검증하는 함수가 되었다. 감정의 진위는 말이나 표정이 아니라, 지불 행위의 무게와 규모로 판단된다. 우정도, 사랑도, 심지어 자존감조차도 경제적으로 중계되고 재현된다.
자기 존중감(self-esteem)은 더 이상 단지 내면의 자아평가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생산적인가’, ‘나는 시장에서 얼마나 매력적인 소비자인가’, ‘나는 인정받을 만큼 충분히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피드백의 누적이다.
경제적으로 위축된 사람은 감정 표현에도 제약을 받는다. '밥을 한 끼 사줄 수 없는 사람'은 미안함을 넘어, 감정조차 자유롭게 표현할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여기에는 단순한 심리적 위축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감정 계급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감정 억제(abstinence of expression)라는 심리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말할 수 없음’은 ‘느낄 수 없음’으로 이어진다. 감정은 표현되지 않으면 퇴색하고, 사회적 승인 없이 지속될 수 없다.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증명해야만 하는 구조’ 속에서 감정은 점점 더 왜곡되고, 자본의 형식을 따라 포장된다.
결국 돈은 감정의 표현 방식뿐 아니라, 감정의 내용 그 자체까지 재편한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라는 감정은,
어느새 ‘나는 충분히 벌고 있는가’,
‘나는 가치 있는 소비자인가’라는 질문으로 번역된다.
감정은 ‘경험’이 아니라 ‘성능’이 되며,
관계는 애정의 깊이보다 거래의 대칭적 가치로 평가된다.
자본은 감정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사용 가능한 자원으로 전환한다. 감정은 더 이상 내 것이라기보다, 사회가 허용한 형식 안에서만 느껴지는 감각이 된다. 우리는 ‘느낀다’고 말하지만, 그 감정이 타자에게 유효하게 해석되고 소비될 수 있을 때만 감정이 승인된다.
자본주의는 감정마저 자본의 언어로 쓰게 만든다.
경제적 자살은 종종 단지 ‘돈이 없어서’ 벌어지는 일로 간주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살은 실제로 무언가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잃게 될 것이라는 상상적 예감에서 시작된다. 아직 망하지 않았지만, 곧 망할 것 같다는 불안. 아직 집이 저당 잡히지 않았지만, 부채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는 공포.
지금이 아니라 미래가 나를 죽인다.
이러한 감정은 단지 불안(anxiety)이 아니다. 그것은 예측된 상실에 대한 감정적 마비이며,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이 서서히 소거되어 가는 과정을 미리 겪는 경험이다.
이런 심리는 ‘결핍’보다 ‘상실’이 인간에게 훨씬 강한 정서적 충격을 준다는 인지심리학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손실 회피 편향(loss aversion)’이라고 부른다.
이 편향은 단지 경제적 의사결정의 비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 구조가 상실에 대한 공포를 얼마나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상실은 단지 ‘물건을 잃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 관계, 존엄, 역할, 신뢰받는 자로서의 자아를 통째로 상상 속에서 잃어버리는 시나리오다.
한 50대 가장은 아직 직장을 잃지 않았지만, 회사의 구조조정 소문과 부동산 대출 이자 상승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러다 내가 가장이 아니라 짐이 되겠구나”라는 상상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자식의 학원비, 아내의 병원비, 노후에 대한 불확실성. 현실에서 무너지지 않았지만, 미래의 파산 시나리오는 그의 감정에 실제 파산 이상의 충격을 가한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곧 다 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이 집과 사회에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
이러한 감정은 시간을 초과하는 감정적 현실이다. 상실은 미래에 있을 일이지만, 그것을 감지한 순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자아의 기반을 흔든다. 상실은 과거가 아니라 예측된 미래에 뿌리를 두고, 그 미래는 감정 안에서 이미 현실처럼 체험된다.
자영업을 하던 40대 여성이 있다. 그녀는 아직 폐업하지 않았다. 가게도 열려 있고, 하루에 손님이 몇 명은 온다. 그러나 월세는 4개월 밀렸고, 카드사는 연체 통보를 보냈으며, 딸의 대학 등록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곧 무너질 것이다’라는 공포 속에서 밤마다 눈을 뜬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유서도 남기지 않고 가게 안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그녀의 자살은 ‘현재의 결핍’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실될 ‘존재 자격’에 대한 상상이 너무도 선명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그녀에게 지금을 견딜 수 없는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결과였다.
이처럼 자살은 때때로 현재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예측된 미래의 붕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감정적 과잉 반응으로 작동한다. 이는 비합리적이거나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과 경제, 신경과 정체성이 얽힌 복합적 구조다. 감정은 단지 ‘현재의 느낌’이 아니다. 감정은 예측된 세계 속에서의 나를 사전에 체험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세계가 철저히 파산되어 있을 때, 자아는 미래를 미리 포기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끝낸다.
현대사회에서 감정은 더 이상 인간 내면의 자율적 반응이 아니다. 감정은 끊임없이 외부에 드러나야 하고, 설득력 있게 포장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소비될 수 있어야 한다. ‘느끼는 감정’보다 ‘보이는 감정’이 더 중요한 시대, 감정은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퍼포먼스로 요청된다.
기쁨, 슬픔, 감사, 분노 등 모든 감정은 해석되고 소비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은 상품이 가진 언어와 닮아 있다. 감정은 이제 더 이상 고유하거나 복합적인 상태로 유지될 수 없다. 그것은 ‘깔끔하게 포장되고, 이해 가능하며, 소비 가능한 형태’로 가공되어야 한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도, ‘너무 슬퍼요’라는 말도, 진실 여부보다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지가 중요해졌다. 감정은 표현하는 주체의 내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믿고 싶어 할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때 감정은 더 이상 ‘정서적 사실’이 아니다.
감정은 관계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고, 평가받기 위한 사회적 화폐가 된다.
감정이 평가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감정 구조의 핵심이다. 사람들은 "저 사람, 감정이 과해", "그는 진심이 안 느껴져"라고 말한다. 여기서 감정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상품의 퀄리티처럼 소비자에게 맞는지가 평가 기준이 된다.
슬픔이 진실한가 보다, ‘슬픔이 설득력 있게 보이는가’,
사랑이 깊은가 보다, ‘사랑이 납득 가능하게 연출되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자본은 이 구조를 정교하게 강화한다. 감정은 이제 플랫폼 속에서 재현되고, 매일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더 이상 감정은 흐르고 축적되지 않는다. 감정은 실시간 피드에 맞춰 생산되고, 반응을 유도하는 도구로 최적화된다.
기분이 안 좋은 날조차 "오늘도 파이팅!"이라 말해야 하고,
불안한 순간에도 "괜찮아요, 이 또한 지나갑니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의 감정을 광고 가능한 언어로 가공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견딤’이다. 견딘다는 것은 감정을 숨기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사회적 언어에 맞게 ‘번역하는 기술’을 갖추는 일이 되었다. 결국 감정은 해방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연기력의 지표가 된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으면,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슬픔을 잘 연기하지 않으면’, 진심조차 의심받는다. 감정이 상품화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연출되고 경제적으로 평가받는 구조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뜻이다.
이 구조 안에서 자살은 하나의 역설로 등장한다.
자살은 이 구조에서 감정을 더 이상 포장할 수 없고,
더 이상 상품화할 수 없으며,
더 이상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순간에 발생한다.
슬픔을 ‘보여줄 수 없게 되었을 때’, 감정은 더 이상 사회적 언어로 기능하지 않는다.
감정이 사회적 통화로 인정받지 못하면, 그 감정은 ‘무의미한 고통’으로 전락하고, 존재의 연결이 끊긴다.
그렇게, 자신이 탈락된 존재라고 느낄 때,
그때 감정은 더 이상 말의 형태로 남지 않고,
침묵과 종결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결핍은 단지 물질의 부족이 아니다.
자본이 존재의 자격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돈의 부재는 곧 존재의 부재로 해석된다.
“돈이 없어서 죽는다”는 말은 이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죽음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존재할 수 없다는 수치심의 구조 때문이다.
돈은 생존의 조건을 넘어 존재의 기준이 되었고,
자본은 삶의 감정을 구조화하는 언어가 되었다.
“돈은 왜 공기보다 더 중요해졌는가?”
공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돈은 존재의 자격을 선별한다.
그리고 이 사회는, 그 자격이 없다고 판단된 자들의 말문을 막고,
침묵의 상태에서 퇴장하길 요구한다.
이것이 사회와 국가, 그리고 공동체가
‘경제적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시대의 감정 구조로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