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3장
한국. 마지막 책임
52세의 K씨.
20년 가까이 서울 도심에서 분식집을 운영해 온 자영업자였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재료를 준비했고, 하루 14시간씩 가게를 지켰다. 아이들 학원비, 대출 상환, 가게 임대료 등 모든 비용이 그의 어깨에 실려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외식 자제 분위기 속에서 매출은 반 토막이 났고, 수개월 동안 임대료와 공과금을 내지 못하면서 카드론과 대출로 연명하게 되었다. 정부의 소상공인 지원금도 일시적일 뿐,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다. 게다가 건강 상태도 점점 나빠져 갔다.
가장으로서 K씨는 묵묵히 버텼다. 아내에게는 “곧 나아질 거야”라고 말했고, 아이들에게는 한 번도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지인들과의 모임도 끊었고, 밤이면 혼자 가게 냉장고의 남은 재료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폐업을 앞두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문장이 남아 있었다.
“고맙다는 말 한 미디 못해 미안했네.
더 이상 빛을 감당하기 어려워. 몸도 계속 아프고.
내가 모두 책임지고 가면 남은 사람들이라도 편할 수 있을 거야."
그는 가게를 닫는 일이 단지 사업 실패가 아닌, ‘가장’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되는 일로 받아들였다.
그는 가족의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무력한 가장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폐기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책임’을 수행한 것이다. 그것은 가장이라는 역할 완성의 극단적 형식이었다.
일본. 가케이 지키기(家計を守る)
버블 붕괴 이후 일본에서는 ‘가케이 지키기’(家計を守る)’ 즉, ‘가계를 지킨다’는 이유로 생을 마감하는 남성 가장들이 등장했다.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망한 중년 남성들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보험금을 남기고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보험금 지급 정책은 자살 후 일정 기간(1~2년)을 지나면 보험금이 유족에게 지급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이를 가족 생계를 위한 ‘유일한 선택지’로 받아들였다.
일본 자살예방센터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유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가족을 지키고 싶었다. 끝까지.”
“아버지로서 마지막까지 버텼다고 생각해 줘.”
이들의 죽음은 생존의 포기이면서 동시에, 역할 수행의 마지막 퍼포먼스다. 그들은 문제를 말함으로써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고 죽음으로써, 말보다 더 ‘설득력 있는 책임’을 수행하려 했다.
즉, 이러한 자살은 실패가 아니라, 가장만이 할 수 있는 책임의 마지막 형식으로 문화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들의 사례는 자살이 가장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가장에게 허용된 죽음임을 드러낸다. 그 죽음은 고통의 도피가 아니라,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을 죽음으로 번역한 언어이며, 삶 자체가 아닌 역할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설계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장’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단순히 가족의 맏이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 젠더, 특정 역할, 특정 감정 규범에 철저히 묶인 사회적 기호체계다.
“아버지는 원래 그런 거야”, “남자는 돈을 벌어야지”라는 말은 단순한 통속적 표현이 아니다. 이 문장들은 하나의 규범적 프레임으로 작동하며, 남성을 존재가 아닌 기능적 구조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남성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피곤하다는 말은 나약함이 되고, 두렵다는 고백은 무책임으로 간주된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미덕처럼 받아들여지고, 침묵은 책임 있는 남성의 상징이 된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가장은 점점 더 내면의 균열을 도외시하게 된다.
감정의 누출은 금기이고, 감정의 표현은 실패의 징후가 된다. 결국 그는 침묵하는 동안 천천히 무너져간다. 그러나 그 무너짐은 말로 표현되지 않기에,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간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상징적 폭력’이라 명명했다. 강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구조를 내면화하고, 스스로 폭력을 감내하며 수행하는 구조. 한국 사회에서 가장은 이처럼 침묵 속의 수행자로 살아간다.
그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고 버팀으로써만 존재를 인정받는다.
가장이라는 위치는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책임의 총합이다. 그리고 이 책임은 실패했을 때 단순한 과오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상실로 귀결된다.
“가정을 지키지 못했다”, “자식을 대학에 못 보냈다”, “집을 날렸다”는 말은 단지 상황의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무가치하다”, “나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낙인의 형태로 내면화된다.
중요한 건 ‘실패’ 자체가 아니라, 그 실패가 남성 정체성의 본질로 내면화되는 구조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실패는 단지 기능의 상실이 아니라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실직, 질병, 이혼, 파산이라는 다양한 사건들이 결국 하나의 해석으로 통합된다.
“나는 가족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남자다.”
이 과정은 문화적 배경과 미디어의 반복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드라마, 광고, 예능은 여전히 묵묵히 참는 아버지, 감정을 숨기는 남성, 절대 무너지지 않는 가장을 미화했다. 그 결과 ‘침묵하는 것’은 도덕이 되고, ‘참는 것’은 생존의 유일한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도덕은 결국 감정의 부재를 강요하고, 존재의 해체를 가속한다.
가장은 실패할 수 없다. 실패는 단지 상황의 무너짐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무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한국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그중에서도 40~60대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이는 단순히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수치는 감정을 표출할 수 없도록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남성성이 감정 구조의 해체를 야기하고, 결국 생존 가능성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감정은 표현될 때 해소되며, 억압될 때는 병리로 전환된다. 하지만 한국의 남성들은 성장과 사회화 과정에서 ‘울지 마’, ‘남자는 강해야지’, ‘그 정도는 참아야지’ 같은 언어를 반복적으로 내면화한다. 이러한 감정 통제의 명령은 내면적 감정 흐름을 해석할 언어를 박탈하고, 자기감정에 대한 접근권 자체를 차단한다.
스티븐 버그(Stephen Berg)는 '침묵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감정이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상실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이 침묵은 단지 조용한 상태가 아니라, 감정 해체의 징후이며, 자살로 향하는 내적 전조다. 남성은 이 침묵의 심연에서 누구에게도 구조 요청을 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 안에 갇힌 감정을 무기화하여 자기에게 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감정을 조직하게 되고, 자살은 감정의 표현이 아닌 감정의 단절이 낳은 마지막 결과가 된다.
이 같은 현상은 수치로 확인된다.
세계보건기구(WHO)와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40~60대 남성 자살률은 최근 10년간 10만 명당 25~40명 수준으로,
영국(19~23명),
프랑스(17~19명),
캐나다(22~26명),
그리고 OECD 평균(약 11.9명) 보다 현저히 높다.
일본 역시 40~60대 남성 자살률이 30명대를 유지하며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 수치가 단지 ‘경제적 스트레스’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높은 자살률을 보이지만, 그 차이는 문화적 감정 구조의 탄력성에 따라 완충된다.
다시 말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문화는 자살을 지연시키지만,
감정을 억누르는 문화는 자살을 정당화고 가속화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가장은 침묵해야 한다’는 정서 규범이 강한 사회에서는, 자살이 개인의 고통 표현이 아니라, 역할의 수행 종결로 기능하게 된다.
‘표출할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표현을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을 번역할 언어를 상실했다는 것, 즉 감정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상징 시스템의 소멸을 뜻한다.
감정은 단지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인식되고 규정되는 사회적 구조다. 그러나 남성 가장들은 이 구조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약함의 신호로 간주되고, 약함은 곧 무가치함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면 고립된다. 고립된 감정은 점점 타자화되며, 자기와 분리된 적대적 요소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재조직된다. 이것이 자해 혹은 자살 충동의 기저 구조다. 실제로 많은 남성 자살자의 유서는 다음과 같은 언어로 채워져 있다.
“미안하다.”, “내가 부족했다.”, “책임지겠다.”
이 언어는 단지 유감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표출할 수 없었던 감정의 마지막 요약이며, 동시에 존재의 폐기 선언이다.
심리학자 토마스 조이너(Thomas Joiner)는 자살을 세 가지 요소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고통, 고립, 감정의 무기력.
이 구조는 특히 감정 표현을 금지당한 남성에게서 더 급격하게 작동한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주체 내부에서 쌓이지만, 배출구를 갖지 못하기에 자기 해체의 방식으로만 퇴로를 찾는다.
감정을 표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존재의 생물학적 생존마저 언어와 의미로부터 단절시키는 일이다. 말할 수 없다는 건 살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가장은 책임져야 한다.”
이 문장은 한국 사회에서 도덕이 아니라, 감정 억압의 명령어로 기능한다.
‘책임’은 미덕처럼 이해되지만, 실상 그것은 감정의 부재, 고통의 사적 처리, 침묵의 내면화를 요구하는 문화적 기제다. 가장은 고통을 말해서는 안 되고, 흔들려서도 안 되며, 반드시 버텨야 한다.
이 구조는 단지 정서적 기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제도이며, 남성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감정을 금지하도록 만든다.
사회학자 게르트 호프스테드(Geert Hofstede)는 한국과 일본을 ‘감정 억제 지수’가 세계 최고 수준인 문화로 분류했다. 특히 한국은 남성성과 책임이 결합되어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존경의 조건이자 생존의 형식이 되는 국가다. 여기서 책임은 더 이상 사회적 신뢰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를 드러낼 수 없게 만들고, 감정을 외면한 채 존재를 유지하라는 명령이다.
이 감정의 억압이 제도화된 형태로 내면화될 때, 사람은 고통을 표현하는 법을 잃고, 감정을 조용히 눌러서 죽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구조 안에서 인내는 덕목이 아니라 감정의 해체 비용이며, 그 인내가 끝나는 지점에서 자살은 ‘무너짐’이 아니라 ‘책임 완수’의 왜곡된 형태로 출현한다.
여성의 자살은 주로 관계적 고립, 돌봄의 과부하, 정서적 상처와 관련되는 반면, 남성의 자살은 역할 수행 실패, 경제적 무능감, 그리고 감정적 침묵과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
차이는 생물학이 아니라 문화적 젠더 규범에 의해 만들어진다.
사회학자 레이윈 코넬(Raewyn Connell)은 이를 '헤게모니적 남성성(hegemonic masculinity)'이라 정의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치들을 남성의 이상형으로 강요한다.
강인함
감정 통제
경제적 주도성
타인에 대한 책임
자기희생
이 구조에서 남성은 감정을 표현할 수 없으며, 실패할 수도 없다.
실패란 단순한 역량 부족이 아니라 존재의 자격 상실로 간주된다.
그리고 사회는 그런 남성을 지켜주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 사회는 이 ‘남성 규범’을 유독 강하게 내면화한 구조다.
여기서 책임은 도덕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남성은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면 단지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때 자살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표출할 수 없는 감정, 감당할 수 없는 부채,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말없이 정리하려는 방식,
즉 스스로를 폐기함으로써 역할을 끝내는 행위로 기능한다.
이것은 개인의 감정 문제라기보다 정체성의 문제다.
남성은 기능으로 규정되고, 기능이 멈추면 존재도 정지된다.
그리하여 ‘감정을 표출하지 못했던 가장’은 결국 살 수 없게 된 사람이 된다.
자살은 이 사회에서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 결과이자,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역할의 파국이며,
감정을 잃은 자아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해석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