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4장
<충북 모 병원 원장, 30억 원의 채무 부담에 농약 마시고 숨져>
병원을 운영하던 오 모 원장은 병원 운영 악화와 수십억 원의 채무 상환 압박 속에서 자신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 여긴 채, 생을 마감했다.
단순한 자산 평가로 보면, 그는 여전히 병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향후 채무 조정이나 법적 절차를 통해 회복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떤 방법으로든 생존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의사, 병원장, 직원과 자족을 책임지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가 감당하지 못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실패한 존재라는 자아 감각, 그리고 그 실패가 불러온 내면의 소멸이였다.
부채는 단순한 경제적 데이터가 아니다.
그것은 자아를 구성하던 의미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정체성의 균열이다.
“나는 빛 갚지 못한 사람이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이 표현들은 경제적 상태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선언이다.
사회학자 모리스 골드버그(Maurice Goldberg)는 빚을 '내면화된 사회적 실패의 기호' 라고 규정한다.
즉, 빚은 단지 돈이 아니라 의미를 지닌 기호이며, 그 기호는 인간의 감정을 해체하고, 자아의 존엄을 부식시킨다.
부채가 삶을 흔드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상환해야 할 수치가 아니라, 회복할 수 없는 실패, 정리되지 않은 관계, 수치심이라는 정서적 진공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채는 갚아야 할 돈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의미로 남는다.
그 의미는 사람을 경제적 고립이 아니라 존재론적 절벽으로 밀어 넣는다.
이때 자살은 금전적 파산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정서적 응답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신용(credit)’은 단지 금융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존 자격의 보증서이며, “당신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같은 의미다.
‘은행 대출, 카드 한도, 이자율, 연체 기록...’
이 모든 지표는 단순한 경제 정보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기호로 작동한다.
이 숫자들은 다음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당신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가?, 당신은 약속을 지킬 수 있는가?, 당신은 사회가 기대하는 기준을 충족하는가?'
이때 신용이 무너졌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빌릴 수 없다는 실용적 불편함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더 이상 신뢰받을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사회로부터 탈락한 존재다'라는 사회적 실격의 감정으로 이어진다.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빚에 대하여(Debt: The First 5,000 Years)'에서 빚을 이렇게 정의한다.
'빚은 단순한 금전적 의무가 아니라, 사람을 특정 윤리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레이버는 빚은 언제나 권력과 윤리의 언어였다고 말한다. 고대 문명에서 빚은 종교적 죄책감, 도덕적 의무, 법적 처벌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관념은 국가와 종교, 폭력과 정서 구조를 통해 지속되어 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오래전부터 빚을 진 자와 빚을 받는 자로 구획되어 왔고, 그 구획은 단순한 경제적 구분이 아니라, 구조적 위계질서를 만들어냈다. 즉, 빚진 자는 ‘아직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인간’으로 규정된다.
이 관념은 근대 자본주의와 금융 시스템에도 뿌리 깊게 내재되어 있다.
현대의 ‘신용’ 역시 단지 돈을 빌릴 수 있는 자격이 아니라, 도덕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승인이다.
신용 등급, 카드 한도, 연체 기록 등은 더 이상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표식이며,
그 지표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숫자가 아닌 수치로 경험하게 된다.
빚은 수치심을 유발하는 구조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갚아야 할 의무가 아니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윤리적 낙인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왜 이렇게도 강하게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믿게 되었는가?'
그 믿음은 도덕적이지만, 실은 구조적으로 주입된 신념이며,
그 신념에 실패했을 때, 인간은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졌다고 느끼게 된다.
현대인 종종 부채를 개인의 무능, 책임 부족, 혹은 단순한 재정 관리 실패로 환원한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숨어 있다.
부채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제도의 언어다.
상환, 이자, 연체, 추심이라는 단어는 단지 계약의 용어가 아니다. 그 언어는 불안, 죄책감, 수치심, 절망을 유도하고, 그 감정은 자아의 존엄과 관계적 감각을 침식시킨다.
금융은 수치를 통해 감정을 구성하고, 인간을 해석하는 사회적 명령 체계다.
프랑코 비포베라르디가 “현대 금융은 인간의 신체와 감정을 채권–채무의 구조로 재편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 구조 안에서 인간은 ‘감정 있는 존재’가 아니라, 상환을 전제로 존재하는 채무 단위로 기능하게 된다.
빚으로 유발된 수치심(shame)은 감정인 동시에 판단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정체성 전체에 대한 정서적 선언이며,
존재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자기 부정의 구조다.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작동하지만,
그 시선은 시간이 흐르며 내면화되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겨누는 눈이 된다.
이 구조 속에서 부채는 수치심을 가장 정교하게 유발하는 계기가 된다.
빚을 진다는 것은 단지 돈을 빌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의존적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자기 내부에 각인하는 행위다.
그것은 존재의 균열을 남기는 감정의 칼날이며,
그 칼날은 수치심이라는 이름으로 자아를 조용히 가른다.
한국인 K씨는 40대 중반의 중소기업 대표였다. 팬데믹으로 매출이 급감했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결국 그는 법정관리를 신청했지만, 끝내 자신을 ‘부도난 인간’이라 칭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직원들 월급을 못 주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그는 돈을 잃은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자격을 잃었다. 그에게 부채는 회계 장부의 항목이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살아있을 의미 있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부정의 응답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중심에서 많은 미국인들이 주택과 신용을 잃었다.
그 중 53세의 여성 C는 42개월간 대출금을 상환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경매 통지서를 받은 날 남편에게 “은행이 집을 가져가기 전에 나는 죽을 거야”라는 메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43세의 부동산 사업가는 약 2,600만 달러의 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스스로 살충제를 마시고 사망했다.
이들 사례는 문화도, 세대도, 배경도 다르지만 하나의 감정 구조를 공유한다.
경제적 실패 → 자기 존재의 부정 → 수치심 → 자살
자살은 그 가능성이 끝났다고 느껴질 때, 찾아오는 감정적 단절의 결론이다.
오염된 자아는 두 가지 선택지 앞에 선다. 하나는 그 오염을 정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구조에서, 정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빚은 숫자가 아니라 존재의 실패를 상징하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살은 회피가 아니라, 형벌의 완성이 된다.
누군가에게 죄를 사과하고, 용서를 빌 수 없는 대신,
자신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감정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자기 규율의 극단적 실행이다.
부채로 인해 생을 마감한 이들의 유서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범죄 사실이나 법적 책임보다 도덕적 고백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믿음을 저버렸다. 나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미안하다.”
그들이 말하는 ‘잘못’은 법을 어긴 행동이 아니라, ‘해야만 했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윤리적 실패감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실패가 외부로부터 주어진 낙인이 아니라, 내부에 각인된 형벌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애브러햄 카플란(Abraham Kaplan)이 말하는 ‘도덕적 자기 낙인(moral self-stigma)’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수용 불가능한 존재’로 간주하는 감정 구조다.
그 낙인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면화된 판단과 기준에 의해 새겨진다.이 낙인 구조 안에서 자아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기 해명이 불가능해진 자리에서, 한 인간은 자신을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더 이상 쓸모없다. 나는 사라지는 게 맞다.”
그리고 자살은, 그 스스로가 자초한 ‘형벌’을 끝까지 수행하는 방식이 된다. 그것은 사회가 강제한 죽음이 아니라, 내면화된 초자아가 요구한 상환의 완성이다.
부채는 이 구조를 가장 교묘하게 작동시키는 언어다.
지불하지 못했다 ----> 책임지지 못했다 ----> 존재할 자격이 없다.
이 세 단계는 금융의 언어로 포장된 형벌의 문법이며, 인간은 그 문장을 자기 안에서 완성한다.
죽음은 그 문장의 마침표다.
그리고 그 마침표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채,
자기 내면에서만 울려 퍼지다가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