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5장
2007년, ‘시골국수’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던 한 개인 투자자가 파생상품 시장에서 큰 손실을 입은 뒤 자살했다. 그는 선물, 옵션 투자로 인해 14억 원의 빚을 진 상태였고, 그 충격과 절망 속에서 온라인에 유서를 남겼다.
그는 자신을 '승부에 지면 목숨을 반납해야 하는 승부사'로 표현하며, 파생시장을 '인간의 물욕이 만들어낸 도박판'이라 고발했다. 자신이 겪은 절망과 실패가 누군가에게는 경고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남겼다. 그에게 수치는 단순한 돈의 단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과, 존재 자체를 계산 가능한 형식으로 환원시키는, 잔혹한 언어였다.
2020년, 미국 일리노이주의 20세 대학생 알렉산더 커언스(Alexander Kearns) 역시 숫자 앞에서 무너졌다. 로빈후드(Robinhood) 앱에서 옵션 거래를 하던 그는 어느 날 계좌에 ‘마이너스 75만 달러’라는 잔고가 표시된 것을 본 뒤 자살했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이는 단순한 시스템 오류였다.
하지만 그가 이미 자신을 회복 불가능한 실패자로 여긴 이후에야 밝혀진 사실이었다. 그에게 숫자는 자신의 의미를 판단하는 최종 심판자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주식, 옵션 시장의 숫자 정보가 얼마나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2022년 5월, 루나, 테라 폭락 사태 직후.
한국의 암호화폐 커뮤니티에는 '한강 간다, 이제 끝...'이라는 의미의 글들이 쏟아졌고, ‘마포대교’ 검색량은 평소 대비 두세 배 이상으로 급등했다. 경찰은 실제 투신자살을 우려해 순찰을 강화했고, 일부 이용자들은 하락 중인 특정 코인의 실시간 그래프를 '내 생명선 같다' 표현했다.
경제적 손실이 삶의 가능성과 인간 존재의 가치가 함께 사라지는 감각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일본 도쿄에서도 반복되었다.
외환(FX) 시장에서 엔화 급락 사태로 하루 만에 2억 엔 가까운 손실을 입은 30대 남성 투자자는, 손실 사실을 블로그에 실시간으로 기록한 후 마지막 글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글에는 이런 문장이 담겨 있었다.
'나는 지금 텅 빈 숫자들 사이에 있다. 모든 게 사라졌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무너졌다’고 하지 않았다. ‘사라졌다’고 말했다. 자산은 그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그 자신이었고, 그 숫자들이 사라지자 정체성과 존재를 구성하던 모든 틀도 함께 무너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감정은 더 이상 순수한 내면의 반응이 아니다. 감정은 외부의 정보, 특히 실시간으로 변동하는 수치 데이터에 의해 조절된다. 주식 시장, 가상화폐, 부동산, 소비자물가지수, 유가 같은 실시간 지표는 개인의 감정을 유발하고 증폭하는 새로운 기폭제로 작용한다.
개인은 뉴스를 통해 자신의 삶을 예측하고, 앱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확인한다. ‘하락했다’는 알림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감정의 직접적 자극이며, 심리적 충격의 서막이 된다.
사람들은 수치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감정을 투사하며, 그 감정은 다시 행동을 촉발한다. 즉, 경제는 숫자가 아니라 감정의 인프라다. 이 구조에서 감정은 개인의 경험보다 경제적 지표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스템이 된다.
삶은 이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측하고 반응하는 감정의 피드백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이 구조에서 감정 곡선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그것의 시스템적 결과로 자살이 일어난다.
주가, 코인, 매출, 금리, 세금 통지서, 연체 고지...
이 모든 수치는 단지 금융 정보가 아니라 정서적 언어다.
현대인들은 수치를 ‘읽고 나서’ 반응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수치를 읽는 순간 자동으로 반응한다.
특정정보 자체가 정서적 반응을 자동으로 유도하는 구조 안에 놓인 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특정 수치는 그 자체로 불안, 우울,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
<마이너스 30%>라는 말은 경제적 손실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는 상징적 신호로 해석된다.
이때 불안은 정서 반응이 아니라 데이터에 의해 유도된 반사 반응이다.
감정은 외부에서 밀려드는 수치 정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는 자동 감정 체계로 작동한다.
이 반응은 단지 감정적 기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복시킬 수 있는 실존적 파장을 동반한다.
그리고 어느 날, 침묵 속에서 행동으로 진행된다.
감정경제는 단지 감정의 순간적 반응을 조정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그것은 불안, 수치심, 자기혐오, 우울이라는 지속적인 감정의 압박 상태를 생산해 낸다. 수치 기반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성취 대신 비교를, 확신 대신 불안을 주입한다.
2024년, 미국 정신건강협회(American Mental Health Association)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주식시장 하락기에 항우울제 처방률이 유의미하게 증가하며,
암호화폐 시장 참여자의 우울증, 불면증 발병률이 일반인 대비 1.8배 이상 높았다.
핀란드의 보건복지연구소의 종단 연구(2023)에 의하면, FX 및 암호화폐 거래자들 중 41%가 우울증 진단 경험이 있으며, 자살 충동을 경험한 비율은 비거래군 대비 23.4% 더 높았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수년 전부터, 이른바 ‘비트코인 블루’라 불리는 정서적 이상 반응이 보고되었으며, 비트코인, 주식 투자 중독 관련 상담 건수는 해마다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2030 세대 사이에서는 '손이 떨린다, 남이 수익 냈다는 얘기에 마음이 요동친다, 하루 수백 번 이상 스마트폰의 주식창을 들여다 본다.'는 고백이 커뮤니티에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또한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주식 급락이 유발하는 스트레스 수준은 ‘친한 친구의 죽음’이나 ‘직장 상사의 교체’와 유사한 정도로 평가되었다.
이는 주가 하락이 단순한 금전적 손실을 넘어, 정체성과 삶의 지속 가능성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투자 실패를 경험한 이들은 단순한 좌절감을 넘어,
‘무가치함, 고립감, 자기혐오, 나는 실패자다’라는 자의식적 낙인,
그리고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절망감에까지 빠지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의 일시적 상태가 아니라,
숫자에 의해 구성되고 강화된 정서 구조다.
수치는 감정을 유도하고, 그 감정은 다시 정신질환으로 응결된다.
결국, 이는 감정이 단지 왜곡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서 구조적으로 조작되고 고착된 결과인 것이다.
한 온라인 투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30대 남성은 마지막 글을 남겼다
<나는 마이너스 80%다. 내 계좌가 아니라, 내 존재가.
누구에게도 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실패자라는 사실은 나만 안다.>
여기서 ‘마이너스’는 금액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평가하는 감정의 단위이자, 우울의 언어다. 수치가 만들어낸 감정은 더 이상 휘발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경계에 침투하고, 수면 패턴, 식욕, 성욕, 판단력까지 서서히 무너뜨린다.
그렇게 침투한 감정은 몸 전체를 감염시키는 질병이 된다.
그리고 그 질병은 결국,
한 개인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오류 난 데이터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우울은 단순한 슬픔이나 무기력이 아니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립된 무력감이며,
자기 존재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깊은 통증이다.
그리고 그 통증을 말로 해소할 수 없고, 관계로도 완화할 수 없을 때,
현대인은 그것을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벗어나려 한다.
그 순간의 자살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통증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되어버린다.
최근 자산 손실형 자살 사건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한 가지 특징이 눈에 띈다. 이들은 대체로 외부에 큰 신호를 보내지 않았고, 극단적 선택은 갑작스럽고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현장을 정리해 두고 유서를 간결하게 남긴 경우가 많으며, 주변인들조차 전조를 알아채기 어려웠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자살은 감정이 폭발한 결과라기보다, 감정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즉 감정 표현의 경로가 완전히 차단된 결과에 가깝다.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거나 요청할 언어가 사라졌고, 감정을 전달할 관계적 접속도 끊겼으며, 감정을 느낄 자기 자신조차 체계 내에서 점차 소거된 결과다.
문제는 단지 외롭거나 힘든 감정을 겪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표현할 수단 자체가 제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경제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감정에 비우호적이다. 기업 실적, 자산 변동, 소득 흐름 등은 모두 정량화된 정보로 작동하며, 이 구조 안에서 감정은 '비합리', '비효율', '불안정'으로 간주된다. 그 결과, 감정은 점차 사적 영역에 격리되고, 공적 언어에서는 배제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자신의 상태를 감정으로 설명하기보다, 수치나 성과, 결과로 압축해서 보고하는 문화가 형성된다.
'힘들다'는 말 대신 '마이너스 30%다'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
자살을 준비한 이들이 '특별히 문제없었다'는 주변의 말속에서 발견되는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내재되어 있다. 감정은 있었지만, 그것은 체계 안에서 유효한 언어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국 현대 자본주의 구조는 감정을 지우는 체계로 구성되고 있다.
성과 중심의 서열 구조, 실시간 경쟁적 비교, 감정의 비가시화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드러낼 방법을 차단한다. 감정은 문제 해결의 자원이 아니라, 실패의 증거가 된다. 그리하여 감정을 드러낼수록 불안정한 존재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점점 더 침묵하고, 조용히 무너진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살은 개인의 충동이나 선택이라기보다,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구조에서 감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죽음은 마지막 선택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온 사회적 소외의 정점이자,
감정의 기능 중단이라는 시스템적 귀결이다.
'데이터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인간 정체성의 소멸 증상이며,
감정 없는 체계가 만들어낸 감정적 고립의 종착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예외나 돌발 상황이 아니라,
이 구조가 지속되는 한, 언제든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내적 필연으로 고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