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7장
<밥 한번 먹자>
흔히 말하고 흔히 듣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밥 한 끼는 가볍다. 그런데 이 말이 무거운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밥 한 끼’에서 시간과 비용, 감정의 에너지, 그리고 체면을 느낀다.
지갑이 비어있는 사람은, 오랜 친구든 새로운 사람이든 누군가와의 만남은 ‘여유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와 밥을 먹으려면 커피값도 필요하고, 교통비도 들고, 옷차림도 갖춰야 하고, 무엇보다도 ‘나의 근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 근황이 ‘실직 중’이거나 ‘딱히 하는 일 없이 지낸다’ 일 경우, 약속 자체를 미룬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이 관계의 시작이 아니라, 침묵의 구실이 되는 순간이다.
관계는 말 그대로 비용이 든다. 그리고 그 비용은 돈이 없는 사람에겐 현실적이고 감정적인 벽이 된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만, 그 만남이 ‘자격을 증명하는 자리’로 느껴질 때, 사람과의 만남은 멀어진다.
돈이 끊기면 사람은 이웃을 피하게 된다.
아파트 관리비를 못 냈다는 사실이 동네 슈퍼에서 마주치는 인사의 의미를 바꿔버린다. "밥 먹었어?"라는 인사의 말이 진짜 '밥'을 먹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궁금함에 대한 답이 아닌 궁핍함에 대한 답처럼 들릴까 봐 대답을 회피하고, 눈빛조차 버거워 만남을 차단한다.
그 결과, 감정은 더 이상 외부로 발산하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맴돌다 굳어진다. 이웃은 더 이상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고, 공동체는 더 이상 공감의 거울이 아니다.
이러한 감정적 퇴장은 물리적 고립과는 다르다.
사람은 여전히 그 공간에 존재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쓰레기를 버리고, 우편함을 확인한다. 하지만 누구와도 감정을 나누지 않고, 누구로부터도 감정을 기대하지 않으며, 점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자신에게 막을 두르게 된다.
이 현상은 실직자, 중장년 남성, 고령자들에게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친구와의 연락을 끊고, 동창회나 모임에서 멀어진다. '나가봤자 돈만 든다'는 생각은, 사실상 '나는 자격을 상실했어'라는 자기 비하의 번역문이다. ‘만날 수 없다’는 감정은 서서히 우울로 흐르고 이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까지 다다르기도 한다.
돈이 없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돈이 없을 때 사람은 스스로를 사회적 무대에서 퇴장시킨다.
그 퇴장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자격 박탈에 대한 감정적, 정서적 반응이다. 현대 사회에서 ‘돈이 없는 자의 관계’는 /의도적 관계, 애써 유지해야 하는 관계, 스트레스가 축적되는 관계/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돈을 기반으로 설정된 관계에서는 위기 시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멀어진다. 사랑을 기반으로 한 가족은 전쟁 중에도 목숨을 내놓고 서로를 보호한다. 하지만 돈을 기반으로 한 가족은 돈이 사라지면 가족을 죽이기도 한다.
가족은 가장 친밀하다.
그러나 사랑이 아닌, 돈의 혈액이 흐르는 핏줄로 연결되어 있을 때 친밀성의 가격은 무거워진다. 그때의 가족은 따뜻한 쉼터가 아니라, 돈에 액수에 의해 자격을 확인하는 관계가 된다.
돈을 전제로 한 가족에게, 친밀성의 가격을 지불할 여유가 있을 때, 가족은 사랑과 평화의 공간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실패한 자는 그 공간을 누릴 수 없다. 그의 말은 줄어들고, 가족과 눈빛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식사 자리에는 늦게 나온다. 대화에 끼어드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 기념일에는 선물을 대신해 사과의 말을 준비하고, 자녀에게는 농담 대신 근심을 읽히고, 배우자에게는 소통이 아니라 침묵을 남긴다. 그렇게 그는 점점 '식구'가 아니라 '눈치'가 된다. 사람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확신이 무너질 때, 가족 앞에서조차 자신을 감추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진다.
가족은 그를 이해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가 가족이 이해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실망할 거야. 이 말까지 꺼내면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
그런 생각들이 말을 봉인하고, 그 봉인은 곧 한 인간을 투명한 얼음으로 만든다.
이 실존적 투명화는 단순한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경제적 능력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배분하는 구조가 만든 파멸적 결론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인간을 고유한 감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기능과, 효율과, 성과로 변환한다.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쓰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시대에서 돈을 잃은 자는, 곧 인간 사회에서 추방된 자가 된다.
돈이 혈액이 되어 흐르는 사회에서 돈이 없는 존재는 점차 창백하게 변하게 된다.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투명하게 변한다.
이름은 그대로이지만, 누구도 부르지 않는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으나, 아무런 감정도 흐르지 않는다.
그는 공간 안에 있지만 대화 밖에 있고, 일상에 서 있지만 기억 밖에 있다. 관계가 아니라 기능으로 존재해 온 이들은 기능을 잃은 순간, 관계에서 삭제된 존재가 된다.
자살자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의미들이 담겨있다.
/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라져도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가족, 친구, 이웃 공동체, 사회 전반에서
조용히 흐름을 늦추어 왔던 존재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위치를 언어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것은 세상에 항의하는 문장이 아니라,
말이 사라지고, 감정이 굳고, 관계가 멀어진 끝에서
더 이상 흐르지 않는 자신을,
세상밖으로 밀어내는 퇴고의 마침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