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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자살론 15화

[자살론] 감정 안에 잠긴 사람(HSP)(1)

초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의 무게

by Mind Thinker

자살론 5편 1장.


사람은 모두 다르다.
생김새도, 키도, 말투도,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다. 지구상에 똑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8235618650명이 현재 지구의 인구다. 그리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나는, 너는,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 다름은 때로 외모로 드러나고, 때로는 지역과 문화, 언어, 습관, 인종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모이고, 다른 사람들은 배제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현대세계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사회는 이제 ‘다름’을 이상한 것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고유성으로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감정의 다름도 그 안에 포함해야 한다.


외모나 언어의 차이만큼, 감정의 민감성 또한 존재의 방식 중 하나다. 세상에는 유난히 감정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소리에 예민하고, 분위기를 더 깊이 감지하며, 말 뒤에 남은 침묵마저 마음에 담는다. 그들의 뇌는 무심한 표정도, 지나친 배려도, 표현하지 않은 감정도 고스란히 느낀다. 그리고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외면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고, 끝까지 감정을 품는다.


그 감정은 때로 그들을 움직이게도 하고, 표현하게도 만든다. 그러나 더 자주 그들을 지치게 하고, 삶 자체를 견디기 어려운 감각으로 만들기도 한다.




민감한 사람들.


초민감성을 지닌 사람 (HSP, Highly Sensitive Person)이라는 개념은 심리적 분류라기보다 생물학적 기반에 의한 개인적 특성이라 해야 옳다. HSP는 전체 인구의 약 15~20%에 해당하며, 그들은 감각 자극에 대해 타인보다 더 깊고 지속이며 정교하게 반응한다. 그들의 뇌는 소리, 빛, 감정, 사회적 분위기 등과 같은 외부자극을 일반인보다 깊고 강하게 감지하고, 천천히 소화한다. 특히, 타인의 감정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내면의 불안이나 슬픔에도 쉽게 압도된다. 그 감각은 빠르게 닫히지 않으며,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들의 뇌는 감정을 저장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있는 감각으로 유지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는 그것을 ‘예민함’이라 부르고, 그 예민함을 병리적 현상으로 다룬다. 사회는 ‘민감함’을 타자화하고, 사회적 기준에 맞추지 못한 사람이라든 듯, ‘문제 있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과민한 감각은 결함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직한 감정 센서다. 그들의 센서는 멈추지 않고 강하게 반응한다. 그들은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모두 생생하게 느낀다. 그들은 그렇게 너무 많이 느낀다. 그리고 그 감각은 삶 자체를 무겁게 누른다.



<그는 마음이 약했어>
이 문장은 짧지만, 많은 의미를 묻어두고 있다. 개인적 고통의 역사를 지우고, 삶의 복잡성을 압축하여, 죽음에 이른 사람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해버린다. 그것은 마치 죽음이 결함에서 비롯된 듯한 의미를 남긴다. 이 말은 자살자를 평가하면서 동시에 살아남은 자의 정당성을 은밀하게 재확인시킨다. 그것은 <우리는 약하지 않았고, 그래서 살아 있다>는 무언의 윤리적 위계 선언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석은 ‘자살 = 개인의 약함’이라는 1차원적 도식 안에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사회의 자기 방어기제라고 할 있다. 타인의 죽음을 개인의 병적 증상으로 축소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통계와 실제 임상은 다른 실상을 보여준다. 많은 자살자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거나, 자기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끝까지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자살예방센터 보고에 따르면, 완벽주의적 성향과 자아비난 수준이 높은 집단에서 자살 사고의 빈도가 두드러진다. 특히 2020년 이후 국내 대학생 및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구조방정식 분석에서는, 부적응적 완벽주의가 우울, 심리적 고통, 그리고 자살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자아비판 성향이 높은 사람일수록 실수나 실패를 행동의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결함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즉, 자살은 ‘의지력의 결핍’이 아니라, 감정의 과잉과 자신에 대한 혹독한 해석이 겹쳐진 상태다. ‘마음이 약했다’는 말은 진단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축소하고, 그 고통의 층위를 단 하나의 성격으로 바꿔버린 사회적 오역이다. 그 말은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기 위한 감정적 회피이자 윤리적 무능의 언어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감정의 고통을 끝까지 견디려 했던 사람,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버티고 감내하며 싸워왔던 존재일 수 있다.



루소, 버지니아 울프, 니체는 모두 ‘느낌’이라는 감각을 끝까지 감당하려 했던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고통은 단지 통증이 아니라, 삶 전체를 흔드는 지진과 같은 진동이었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느꼈고, 그것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고 썼다.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자기 안의 강물이 얼마나 쉽게 넘쳐흐르는지>를 반복적으로 고백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고통 없는 예술은 없다. 느끼지 않는 자는 진리를 보지 못한다>라고 단언했다.


감정의 깊이는 곧, 자기 존재에 대한 응답성이다. 그리고 이 응답성은 자기의 고통을 감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정 이입도 포함한다. 이것은 ‘감정 과잉’이 단순한 심리적 특성이 아닌, 삶 전체에 대한 감각적 윤리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감수성의 깊이는 동시에 이별의 가능성이 되기도 한다.


울프는 피부를 뚫고 흐르는 내면의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루소는 그는 지식인 사회와 결별한 뒤, 고립과 불안 속에서 은둔의 말년을 보냈다. 니체는 육체의 병과 정신의 광기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은 모두 감정을 뿌리까지 느끼고 견디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자살은 감정의 부재 때문이 아니다. 때로 자살은, 감정이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에 그 해상도를 비출 곳을 발견하지 못한 인간의 절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감정의 깊이는, 우리 사회가 감추려고 하는 가장 인간적인 증거일지도 모른다.



아픔을 판단하기 전에 아프다


초민감성을 지닌 사람(HSP)의 뇌는 일반적인 뇌와 다르게 작동한다. 그들의 뇌는 단순히 감정에 민감한 것이 아니라, 감정 정보를 감지하고 처리하는 회로 전체가 더 넓고, 더 깊게 반응한다.


편도체(amygdala)는 외부 자극의 위협 여부를 감지하고, 그 자극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설계하는 뇌의 경보 장치다. 그런데 HSP의 편도체는 일반인보다 더 민감하게, 더 빠르게 활성화되며, 사소한 표정 변화나 말투의 미세한 떨림에도 위험 반응을 일으킨다. 또한 그들의 섬피질(insula cortex, 감정, 공감 등에 관여)은 타인의 고통이나 긴장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감정이 타자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깊게 내면화시킨다.


문제는 이 감각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 즉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부위가 만성적인 피로 상태에 빠진다는 점이다. 이 조절 회로는 자극이 반복될수록 감정의 필터 기능을 상실하고, 감정은 더 이상 조절되지 않은 채 홍수처럼 뇌 전체로 밀려오게 된다.


이들은 감정을 읽지 않고 흡수하는 신경 구조를 가졌다. 공감은 이들에게 능력이나 선택이 아니라, 신경계에 새겨진 속성이다. 감정을 판단하거나 조절하기도 전에, 타인의 감정은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 system)의 과활성화 때문이다. 때문에 타인의 표정, 말투, 고통의 흔적을 뇌는 거울처럼 반사하고, 그 감정을 자기 내부의 고통으로 번역한다.


아이가 울면, 나의 몸도 아프다. 친구가 수치심을 겪으면, 나도 함께 움츠러든다. 타인의 실패조차, 나의 부끄러움처럼 느껴진다. 이들은 감정적 경계를 설정하지 못한다. 때문에 공감은 넘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감정은 밀려나고, 돌보지 못한 감정은 내면에서 탈진한다. 공감이 축복이 되려면, 그 감정을 흘려보낼 여백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뇌는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감은 노동이 되고, 결국 자기 안에서 ‘정서적 자해’의 행태로 자라난다.


이들에게 '하나의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생리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 된다. 이는 마치 약한 피부는 바람만 스쳐도 상처가 나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스치는 정도의 감정이, 이들에게는 전신을 자극하는 정서적 통증으로 느껴진다. 그 통증은 기억과 연결되고, 반복되며, 축적된다. 그리고 그 모든 단계를 고통으로 감지한다. 그렇게 그들의 몸과 마음은, 고통의 전체 구조를 기억처럼 저장해 버린다.


때문에 '지나갔으면 끝난 거지'라는 말은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나감’은 감정의 단절이 아닌 ‘잔존’이다. 고통의 사건은 지나갔지만 감각은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을 서서히 옥죄고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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