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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자살론 16화

[자살론] 감정 안에 잠긴 사람-가수 종현

고통을 품은 존재의 마지막 응답

by Mind Thinker


자살론 5편 2장


1. 가수 종현


가수 종현(1990~2017)은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감성과 예술성 모두를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뛰어난 작곡가이자 섬세한 가사로 공감을 이끌어낸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예술적 성취와는 달리, 그의 내면은 깊은 고통으로 점철돼 있었다. 이 글은 그의 유서와 생애를 통해, 초민감성과 감정의 구조가 어떻게 한 존재를 침묵으로 몰아가는지를 분석한다.



난 속에서부터 고장 났다

이 문장은 단순한 자기 비난이 아니라 감정조절 시스템이 고장 난 것에 대한 자각이다. 종현은 감정의 가장 깊숙한 곳이 흔들렸고 그것의 해석 가능성을 놓아 버리고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켰다. 종현은 고통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신경계 전체를 잠식해 들어오는 경험을 반복했다.


HSP의 특징 중 하나는 ‘감정 자극을 내부화하는 깊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감정을 통과시키지 않는다. 끝없이 돌아가고 끓고 휘몰아치는 감정 구조 자체가 그의 존재 안에서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는 고백이다. 때문에 그들은 감정을 사건이 아닌 정체성 차원에서 받아들인다.


그들의 감정은 스쳐 지나가지 않고 내면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래서 고통은 순간의 느낌이 아니라 존재의 손상으로 느껴진다.


천천히 날 갉아먹던 우울은 결국 날 집어삼켰고, 난 그걸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날 미워했다.

HSP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감정 안에 머물며, 감정과 함께 존재하려 한다. 때문에 감정이 신체를 점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종현은 들어온 우울을 회피하거나 흘리지 않고 흡수했다. 그것을 내부로 받아들여 그 감정 안에 머물렀다. 감정을 분석하려 했고, 극복하려 했지만, 그 감정은 스스로를 넘는 감각으로 확장되었다. ‘갉아먹는다’는 표현은 그 느낌을 말하고 있다. 감정은 그의 생리 구조와 인지 능력 그리고 정체성 전반을 서서히 침식하고 있었다.


그는 고통을 느꼈고, 버텼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 감정에 의미를 부여할 언어를 내부에서도 그리고 외부로부터 발견하지 못했다.


날 책임질 수 있는 건 누구인지 물었다. 너뿐이야. 난 오롯이 혼자였다

감정은 외부 자극에서 오지만, 그 해석과 수용은 관계적 언어를 필요로 한다. HSP는 타인의 감정을 민감하게 감지하면서도 자기감정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의심과 고립된 해석 구조에 빠지기 쉽다.

종현이 느낀 ‘혼자 있음’은 단순한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감정을 함께 감당할 공명자가 없었다는 의미다. 자신의 감정을 받아줄 타자가 없고 자아 스스로와도 감정을 나눌 수 없었다. 결국 감정은 내면에서 시작되어 벽 안에서 맴돌다가 자기 안에서 종료되었다.


이것은 HPS가 가장 고통받는 문제다. 그들은 감정을 타인과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니라, 혼자 감당하고 해석하고 끝내려 한다. 따라서 외부로 흘러나가지 못한 감정이 때로 자기 해석의 폭력성으로 전환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난 도망치고 싶었어. 나에게서 너에게서.

이것은 고통을 유발하는 자기와 타자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절규다. 감정에 갇힌 사람은 결국 감정의 주체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부의 자아 분열이 일으킨다.


내부의 '나'는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나는 고통을 겪는 주체이고, 또 다른 나는 그 고통을 감당하라고 채근하는 타자이며, 또 하나의 나는 무기력하게 침묵하는 자아 안의 타자들이다.


그는 스스로를 향해 말한다.

거기 누구냐고 물었다. 나라고 했다. 또 나라고 했다. 그리고 또 나라 고했다.

이 세 번의 '나'의 반복은, 자기 동일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나조차도 나에게 응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조근한 목소리로 내 성격을 탓할 때, 의사 참 쉽다 생각했다

의사는 아마도 전형적인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HSP가 단순한 기질이 아니라, 그들의 감정 처리 구조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간과했을 수도 있다. 의사의 조근한 말투는 종현에게 진단적 기계음처럼 들렸을 것이다. 때문에 종현은 그 말투에서 공감 없는 단순 해석을 보았을 것이다.


'의사 참 쉽다'는 문장에서 의사의 감정적 비감응성과, 감정의 구조와 깊이를 하나의 '성향'으로 축소해 버리는 진단의 단순성을 폭로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의사는 그에게서 병리적 문제나, 뚜렷한 외상, 그리고 특정한 환경 요인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성격 문제'라는 판단은, 실제 임상에서 종종 진단의 한계를 덮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종현에게 이 말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전체에 대한 사회적 해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몇 번이나 얘기해 줬잖아. 왜 내가 힘든지.

종현은 감정을 표현했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충분히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왜 내가 힘든지, 그 걸로는 이만큼 힘들면 안되는거야? 더 구체적인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거야?

라고 되뇌일만큼 더 크고 강한 아파야 할 이유를 요구받았다. 그는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 해'라는 사회적 기준에 대해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외부로 향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터졌다.
HSP는 감정에 구체적 ‘사건’이 없어도, 정서적 맥락이나 분위기 그리고 관계적 파열만으로도 압도당할 수 있다. 사연이 부족한 고통은 사회가 해석하지 못하는 고통이다. 사회가 보기에 종현의 고통의 원인은 극적이지 않았지만, 그는 극단적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부딪혀서, 알려져서 힘들더라. 왜 그걸 택했을까.

HSP는 사회적 피드백과 타인의 시선뿐 아니라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의 정서에도 민감하다. 그런데 그는 아이돌 스타였다.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다.
남들이 보기에 축복이었만 그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는 단지 감정에 고통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감정을 외부에 노출했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유명인’은 구원이 아닌 부담이었고, 그는 아이돌 스타가 되었기 때문에 더 큰 통증을 느꼈다. 그는 존재 자체가 감정적으로 발가벗겨지는 상태를 끝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에게는 상처를 창 끝으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냥 수고했다고 해줘

이 마지막 문장은 사후적 해석에 대한 유언이이다. 자기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다. 그냥 나 자체를 이해하고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다. 자신의 감정을 끝까지 품었던 존재가 자신의 고통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요구한 말이다. 나를 알던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판단이 아닌 수고의 언어를 요청한 마지막 간절한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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