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죽음을 부르지 않아도 인간을 해체한다
자살론 5편 3장.
감정은 인간 삶의 근원이다. 그러나 어떤 감정은 너무 깊고, 너무 예민하여 그것을 품은 사람을 해체시키기도 한다. 이 장에서는 가수 종현에 이어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살아가려 했던 여섯 명의 인물 /겐지, 달리다, 플라스, 월리스, 와인하우스, 페소아/ 의 사례를 분석한다. 이들은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감정과 함께 살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술과 언어로 표현하려 했지만, 그 감정은 오히려 그들을 무너뜨렸다. 이 장은 자살을 죽음이라는 단면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구조 속에서 작동한 삶의 실존적 해체의 의미로 바라본다.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 1896–1933)는 ‘농민 시인’, ‘이타적 이상주의자’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작품 세계와 삶을 지배한 것은 단순한 이타주의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잠긴 감정이었다. 그는 공감 능력으로 세계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감정에 점령당했고 끝내 잠식되었다.
겐지는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라는 신념을 철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적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그의 감각 체계와 뇌 구조가 그렇게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신체로 느끼는 사람이었다.
겐지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 식물, 자연환경 전체의 고통을 같은 감각선에서 감지했다. 시 <비에도 지지 않고(雨ニモマケズ)>에서는 자신을 '병든 아이를 찾아가 우는 사람'으로 묘사하며, 타인의 고통에 울 수밖에 없는 자기 존재를 기술한다. 이러한 그의 감정 상태는 다름과 같은 HSP의 전형적 특성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감정적 경계의 약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신경계의 특성
신체화된 감정 체계: 감정이 인지가 아닌 생리 반응으로 전환되어, 내부 장기처럼 작동
거울 뉴런의 과민성: 감정을 이해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받아들이는 뇌의 구조
겐지는 감정을 중계하거나 번역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을 반사 없이 흡수하고 울리는 '감정의 공명체(共鳴體)'로 스스로를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문학 속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시에는 자아의 시점이 명확하지 않다. 1인칭 시점은 종종 해체되고, 자아는 타자화된다. 이는 감정의 주체가 겐지 개인에 머물지 않고, 생명 전체로 확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 외 존재의 고통을 감정적 언어로 전이시키며, 그것들을 시 속에서 의인화한다.
이러한 문학적 특성은 겐지가 단지 타인의 고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생리적, 존재론적으로 감염되어 살았다는 증거다. 그는 아픔을 설명한 사람이 아니라 아픔이 되어 존재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겐지가 품은 감정을 해소하거나 객관화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의 시를 통해 감정을 예술로 전환했지만, 그 전환은 완결되지 않았다. 고통은 시 속에서 반복되었고, 그는 고통을 다시 느꼈다. 그는 감정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공감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말년의 겐지는 심각한 폐결핵에 시달리며 극도의 고립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겐지는 가족이 따르던 정토종과 자신이 신봉한 법화경 불교 사이에서 정신적 갈등을 겪었으며, 이상을 실현하려 했던 자신의 삶이 현실의 벽 앞에서 반복적으로 무력해지는 경험을 통해 좌절감을 깊이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좌절은 그가 끊임없이 타인의 감정에 몰입해야 했던 내적 공감 상태와,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외부 세계의 무감각 사이에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그는 감정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채 삶의 끝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겐지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정신적, 정서적 자살이 반복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감정을 자기 안에서 증폭했고, 그것을 어디에도 흘려보내지 못한 채 자기 내부를 감정의 저장고로 사용했다.
겐지에게 세계는 정보의 공간이 아니라, 파동과 진동이 울리는 감정의 장(場)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내부를 관통해 들어와 소리 없는 폭풍이 된 것이다.
그는 고통을 분석하지 않았고, 고통과 함께 살았다. 그는 감정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감정을 수용했다. 감정을 흘려보내지 못한 사람은, 감정 속에 잠긴다. 겐지는 그 안에서 천천히 침잠해 간 것이다. 겐지의 삶은, 감정은 때때로 죽음보다 더 조용하고, 더 끈질긴 방식으로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달리다(본명: 욜란다 크리스티나 지질로티, Yolanda Cristina Gigliotti, 1933–1987)는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가수이자 배우로, 1950~70년대 유럽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한 외면적 삶과는 달리, 내면은 사랑, 상실, 죄책감, 공감의 중독 속에서 지속적으로 침식되고 있었다.
그녀는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고, 마지막에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생을 마감했다. 남긴 유서에는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달리다의 삶에는 반복적으로 타인의 고통이 들어왔다. 그녀가 깊이 사랑한 세 명의 남성, 루이지 탄코(Luigi Tenco), 리샤르 샹프레(Richard Chanfray), 그리고 장 소비에(Jean Sobieski)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심각한 자해 충동을 보였다. 그런데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품는 '감정의 저수지'처럼 삶을 이었다.
1967년, 연인이었던 이탈리아 가수 루이지 탄코가 자살했을 때, 달리다는 그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인물이었다. 같은 해 달리다도 자살을 시도, 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다. 그녀는 그 후 인터뷰에서 “그의 고통이 내 몸 안에 들어왔고, 도저히 빠져나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연애와 이별을 반복하며, 그녀는 사랑을 할수록 더 깊이 타인의 감정을 흡수했고, 점점 자기감정과 타인의 감정 사이의 경계를 상실했다.
또한 달리다는 대중과의 감정적 연결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와 그로 인한 눈물 그리고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의 저수지였고, 노래는 감정을 흘려보내는 유일한 배출구였다. 그러나 그녀의 감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노래를 통해 부정적 감정이 일부분 배출됐지만 치유되지 않았다. 노래는 그녀의 감정을 표현했지만 자신과 타자에 의해 해석되지 않았다. 그렇게 감정은 흘러갔지만,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녀의 감정은 일종의 순환루프적 감정 회로였다. 타인의 감정을 흡수 → 자기감정으로 착각 → 그 감정을 노래로 배출 → 공감을 통해 다시 자신의 감정으로 되돌아오는 이 감정 루프는, 달리다에게 점차 자기 소멸의 구조로 작용했다.
말년에 달리다는 심각한 우울증과 불면에 시달렸으며, 삶의 의미를 신에게 물었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신의 위안이 아니라 깊은 수렁과 같은 침묵이었다. 그녀는 가톨릭 신앙을 가졌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감정적 절망을 더 심화시켰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그녀는 결국 종교가 감정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달리다는 정서적으로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남겨졌다.
1987년, 달리다는 파리 자택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삶을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단 한 줄로 남긴 이 유서는, 감정이 어떻게 삶의 모든 에너지를 고갈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절제된 비명이자, 감정의 과잉과 포화가 만들어낸 해체 선언이었다.
달리다는 감정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을 사랑했고, 품었고, 무대 위에서 나눴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그 감정을 조절하거나 분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감정을 느끼고 비우고 바라보는 대신, 감정에 침윤되었고, 결국 그 감정 속에 자신을 가라앉혔다.
달리다는 자살이라는 한 번의 사건보다 더 오래 지속된 감정의 자해를 겪은 존재였다. 그녀는 살면서 수없이 무너졌고, 마지막에 단지 그것을 끝냈을 뿐이다.
실비아 플라스(1932–1963)는 시인이었다. 그녀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았고, 감정에 무력하게 휩쓸린 존재도 아니었다. 오히려 플라스는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해석하고 구조화하려 했다. 그녀는 감정을 시로 번역했고, 언어로 고통을 해부했으며, 자기 파열을 텍스트의 형식으로 바꾸려 했다.
그녀의 대표작 <벨 자(The Bell Jar)>는 청춘기의 정신적 혼란을 우울증의 증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플라스는 이 소설에서 감정과 인식이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을 임상기록처럼 냉정하게 추적한다.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는 자아와 사회 사이의 균열을 감정적으로 겪는 것이 아니라, 지각적이고 논리적인 혼돈으로 체감한다. 그녀는 감정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것을 서술한다.
플라스의 유고 시집 <Ariel>에서는 그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편들은 고통과 죽음을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시적 장치 없이 노출하며, 감정을 곧바로 언어로 변환한다. 시 속의 ‘나’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 한복판에서, 부서진 자아의 파편들을 날카로운 언어로 꿰매듯 복원해 낸다. 이를 통해 플라스에게 자살은 어떤 충동의 결과가 아니라, 감정과 인식이 끝까지 밀고 간 구조적 귀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스는 감정을 문학으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지만, 문학은 그녀의 감정을 정화하지는 못했다. 언어는 감정을 분석할 수 있었지만, 감정을 고요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정확히 말할 수 있었지만, 그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감정을 이해하려 했고, 시로 정제하려 했으며, 언어의 형식을 통해 무너지는 자신을 지탱하고자 했다. 그러나 감정은 이해의 언어를 초과했고, 플라스의 시는 어느 순간부터 감정의 통제 도구가 아니라 감정의 잔향 그 자체가 되었다. 시를 쓰는 행위는 구원이 아니라 해체의 조용한 반복이었다.
1963년 2월, 두 자녀가 자고 있는 새벽, 아이들이 있는 위층 방에는 아침 식사용 빵과 우유를 미리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녀는 부엌의 문틈을 젖은 수건과 테이프로 밀봉하고 오븐의 가스를 틀었다. 이 행동은 즉흥적 결단이 아니었다. 수차례 자살 시도 이후, 그녀는 이미 여러 번 삶의 마지막 문장을 예행연습해 왔다. 그녀의 죽음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언어화된 감정이 도달한 정제된 종결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자살은 감정을 인식하고 해석하고 구조화하는 모든 노력이 때로는 감정 자체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자살은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화가 더는 불가능해졌을 때의 침묵이었다.
그녀는 감정을 말할 수 있었지만, 그 말이 그녀를 살릴 수는 없었다.
그는 감정을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감정은 분석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삼켰다. -우리는 윌리스의 삶이 이 말들을 증명하고 있음을 본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는 감정을 ‘이론의 언어’로 번역하려 했던 사람이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가장 정교한 방식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시도했다. 그의 작품 <무한 Jest> 속의 캐릭터들처럼, 월리스 자신도 감정의 정체를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논리화’하려 했다.
그러나 감정은 논리적 개념이 아니다. 감정은 파동이고, 진동이고, 흐름이다. 월리스는 이 흐름을 텍스트로 정지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감정은 더 큰 불안이 되어 돌아왔다. 그가 종종 “자살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불타는 방에서 도망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듯,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생존 불가능한 내면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는 고통을 분석했고, 고통을 안에 두고 사유했다. 그러나 분석은 구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분석은 고통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끝없는 피로를 유발했다. 월리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너무 자주, 너무 깊이 그리고 너무 집요하게 분석했기 때문에 무너졌다.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1983–2011)는 감정을 감추지 않는 예술가였다. 그녀의 목소리와 가사, 인터뷰와 무대 위 행동까지 모두 감정의 직접적인 분출이었다. 그러나 그 분출은 해소가 아니라, 제어되지 않은 감정의 과잉 폭발이었다.
그녀의 대표 앨범 <Back to Black>은 자신이 감정의 파편 속에 어떻게 조각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잔해 위에서 어떻게 다시 노래하고 하는지를 담고 있다. 그녀는 감정을 통과하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 그 자체로 존재했고, 그 상태는 곧 자기 소멸로 이어졌다.
그녀는 대중 앞에서 고통을 연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을 무대에 그대로 올렸다. 그러나 그 무대는 감정을 정화하거나 공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이 더욱 응고되어 그녀 내부에 맴도는 순환의 공간이 되었다. 그녀의 노래는 치유가 아니라 고백이었고, 고백은 종종 감정의 ‘배출’이 아니라 ‘폭로’였다.
에이미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러 차례 자해를 했고, 극단적인 감정 상태에서 약물과 알코올에 반복적으로 의존했다. 2011년, 사망 당시 그녀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사망을 유발할 수 있는 수준(0.416%)을 훨씬 웃돌았다. 이는 우발적 사고사로 분류되지만, 감정 조절의 상실로 인한 사실상의 자살에 가까운 죽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고 싶었지만, 감정이 그녀의 의지를 초과해 버렸다. 그녀의 생애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은 삶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감정의 방식으로 해체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감정을 품는다는 것은 곧 그것에 휘둘릴 가능성을 함께 품는 일이다. 에이미는 그 정직함의 끝에서 자기감정의 충돌 속에 가라앉은 존재였다.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1888–1935)는 감정을 분할하고 구조화하는 실험으로 생애를 보낸 시인이자 철학자다. 그는 최소 70개 이상의 헤테로님(heteronym: 페소아가 창조한 자기 안의 또 다른 자아들로서, 각각 고유한 문체와 철학을 지닌 문학적 인격)을 창조했으며, 이는 단순한 필명(pseudonym)이 아니라, 각기 명확한 전기·문체·철학을 갖춘 완전히 각기 다른 자아였다.
페소아는 ‘알베르토 카에이로,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로 드 캄푸스’ 등 서로 다른 철학, 감정, 스타일의 자아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서로를 비판하고 번역하며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고, 내면에서 의견을 주고받는 내적 극(劇)을 이루었다.
그의 주저 <불안의 책(The Book of Disquiet)>은 '베르나르도 소아레스'라는 헤테로님으로 쓰였다. 페소아는 이를 ‘이벤트 없는 자서전’이라 부르며, 내면의 단절과 정체성의 분열을 차분하고 절제된 언어로 기록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상실된 자아 경험을 '나는 여러 사람이다'라고 표현하며, 단일한 자아는 환상이고 오히려 고통의 근원임을 작품 전반에서 드러냈다.
페소아의 작품은 마치 다중인격의 내면 독백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감정을 단일한 시선으로 처리할 수 없었던 그는, 자아를 복수화함으로써 감정을 해체하고 표현했다. 이 다중성은 감정의 깊이와 다체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통합되지 못한 고통의 파편들이며, 동시에 감정에 진실하게 다가가기 위한 집요한 실험이었다.
페소아에게 감정은 하나의 직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분기하는 다차선 도로였다. 그는 자기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자기 안의 자아들을 차례로 분리하고 관찰했다.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기감정을 자기 안에 가두었고, 그 감정들은 밖으로 풀려나오지 못한 채 ‘문학적 해체물’로 남았다.
페소아는 감정을 이해하거나 흘려보내지 하지 않고, 감정과 함께 사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감정 모두를 있는 그대로 품는 삶이 언제나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페소아는 보여 주었다. 감정의 무게는 때로 말보다 무겁고, 그것을 모두 끌어안는 자는 자기 안에서 조용히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장에서 다룬 일곱 인물은 모두 감정을 품고 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감정을 억제하지 않았고, 방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감정을 정면으로 응시했고, 감정과 함께 살려고 했으며, 감정을 예술로, 언어로, 신체로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진실함이 때로는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종현은 감정을 내면 깊숙이 밀어 넣은 채,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통증 속에 침잠했고, 겐지는 타인의 고통에 감염되어 스스로를 ‘공명체’로 감각했다. 달리다는 감정을 저수지처럼 품다가 점차 자아의 경계를 상실했고, 플라스는 감정을 언어화하며 무너져갔으며, 월리스는 감정을 분석하려다 감정 그 자체에 삼켜졌다. 와인하우스는 감정을 제어 없이 폭발시키며 자기 파괴로 이어졌고, 페소아는 자아를 분열시켜 감정의 깊이를 복수의 인격으로 분산시켰다.
이들은 모두 자살했거나, 혹은 자살하지 않았더라도 감정으로 인해 자기 존재가 해체되는 경험을 겪었다. 그들의 삶은 단일한 죽음이라는 사건보다 복잡한 ‘감정적 자해’의 연속이었다. 어떤 이는 죽기 전에 이미 여러 번 무너졌고, 어떤 이는 죽음을 통해 감정의 회로를 종결지었다. 이 모든 사례는 자살이 단순한 생물학적 단절이 아니라, 감정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 실존적 해체의 한 형식임을 말해준다.
자살은 죽음보다 많다. 감정은 죽음을 부르지 않아도 인간을 해체할 수 있다. 이것은, 감정이 예민한 사람들이 이 세계에서 직면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존적 모순이다.
인간은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고통스러우면 움츠린다. 이것은 인간의 결함이 아니라, 생리적 반응이다. 감정은 심장이 뛰고 폐가 숨 쉬는 것처럼, 인간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리듬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이 감정을 너무 많이 느끼면 문제로 간주된다. ‘민감하다, 불안하다, 예민하다’는 말은 결국, '감정을 느끼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사회적 판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고통에 반응하고, 타자의 감정에 공명하며, 상처에 민감하다는 것은 한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 인간은 타자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HSP는 어쩌면 그 ‘너’의 감각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장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너무 많이 감지하는 뇌와 지나치게 깊게 느끼는 몸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닌 배려다.
어쩌면 자살은 감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자가 남긴 마지막 감각적 문장일 수도 있다. 그 문장을 사회는 병리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민감한 감정은 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깊이이자 다채로움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재인식할 수 있도록 사회적 언어와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지지하는 구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