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론 4편 6장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의 단독주택 반지하.
어머니와 두 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사인은 번개탄으로 인한 질식사였다.
책상 위에는 흰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엔 현금 70만 원과 함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들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고,
어쩌면 그것으로 인해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세 모녀는 이웃과도 왕래가 없었고 때문에 시신은 일주일이 넘어서야 발견되었다.
이들은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살았고, 결국 ‘죽어 있지 않은 것처럼’ 죽었다.
이 사건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으로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실상 그들은 매우 조용하고 질서 있게, 천천히 사회로부터 사라져간 사람들이었다.
삶의 고통이 있었지만 말할 수 없었고,
더 적극적으로 요구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고,
감정은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한 채 내면으로 침전되었다.
그들은 떠나기 전, 삶의 마지막 정산을 했다.
집세와 유서. 아니, 집세에 대한 설명과 미안함이었다.
그것은 유서라기 보다는 관계의 종결이자 삶의 철수였다.
사람은 단지 돈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다는 사실이, 그 자신을 관계 속에서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존재’로 느끼게 만들 때,
인간은 스스로를 정지시킬 수도 있다.
경제적 실패는 자존감이나 자립성을 논하기 이전에,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는 발단이 된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행위는 '아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적 확신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 세 모녀는 그 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 상실의 감정은,
숫자보다 더 잔인하게 그들을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2015년 1월, 서울 서초동의 고급 아파트.
한 남성이 아내와 두 딸을 목 졸라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실패했다.
그는 외국계 기업에서 임원까지 올랐고, 연봉도, 주거도, 자녀 교육도 누가 봐도 부족함이 없었다.
‘모범적 가장’이라는 사회적 타이틀에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전, 그는 직장을 잃었고, 투자 실패로 수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그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출근하는 척 고시원에 머물며, 두 개의 삶을 병행했다.
고급 아파트의 남편과 가장, 고시원의 무직자와 실패자.
그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점점 철수하고 있었고,
그의 고립은 겉으로는 아무 변화 없이 조용히 완성되어갔다.
그는 유서를 남겼다.
“미안해. 나는 지옥에서 죄값을 치를게. 통장의 남은 돈은 부모님 치료비와 요양비로 써"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가족 살해’라는 극단적 범죄로 보였지만,
실상은 돈을 통해 유지되던 왜곡된 관계 구조가 무너졌을 때 발생한 파행적 결과였다.
그는 오랫동안 두 개의 공간을 살았다.
아파트와 고시원.
가장이라는 위치와 무직이라는 현실.
그 공간을 나눈 벽은 돈이었다. 그는 스스로 돈으로 벽을 쌓았다.
그리고 그 벽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는 모든 관계를 돈의 벽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오직 ‘돈’이라는 언어로만 표현해 왔다.
가장의 위치, 아빠의 역할, 배우자와의 관계, 부모에 대한 도리...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소득, 자산, 부양 능력이라는 형태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불 능력이 사라졌을 때, 그는 관계도 함께 소멸된다고 믿었다.
이 남자는 사회로부터 돈으로 인정받아왔고, 그 돈을 통해 가족 안에서 자신을 증명해왔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그렇게 자신을 지탱하던 모든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성과와 부양능력, 곧 돈의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정은 돈이 아닌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망이다.
그러나 그는 그 반대였다.
가족애보다 돈을 더 근본적인 관계 조건으로 이해했고,
사랑조차 소유의 형태로 전환시켰다.
그에게 자녀와 아내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생명이 아니라,
유지하지 못할 때는 정리해야 할 소유적 책임의 대상물이었다.
그에게는 가족도, 사회도 돈으로 짜여진 관계망이었다.
그가 가족을 죽인 이유는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왜곡된 책임감,
사랑은 있지만, 더 이상 줄 수 없는 존재가 선택한 관계의 폐기 절차였다.
그는 가족을 살해했다.
미워서 살해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살해했다.
그에게 그 행위는 그런 의미였다.
그는 사회를, 가족을... 그 모든 관계의 기준을 돈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떤 종교보다 강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옳긴 것이다.
돈이 없으면 사랑할 자격조차 없다고 믿었으며,
관계는 유지되지 못할 바에야 끝내야 한다고 여겼다.
친구와의 신뢰, 가족간의 사랑...
그에게 관계란 이러한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돈이 흘러야만 유지되는 자본이 만든 핏줄이었다.
그에게 삶의 조건은 감정이 아니라 기능이었고,
사랑의 증거는 감정 표현이 아니라 경제적 성과였다.
돈이 관계의 유일한 언어가 되었을 때,
사람과의 모든 관계가 무너졌고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죽이게 된 것이다.
<나는 지옥에 갈게>
그의 마지막 말은 후회의 고백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사랑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돈으로 이해한 남자가 남긴,
가장 비극적이고도 정확한 자기 인식의 문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