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나의 희망에게 하는 이야기 이다. 여러 가지 고민의 시간을 보내는 지금 현재 자신을 판단하는 중심에 자책을 두고 있다면 이 글을 쓰는 타이밍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집을 나서기 전 이어폰을 귀에 꼽아 외부 소음을 차단한다. 내 하루의 세계는 귀에 들리는 매체에 한없이 슬프기도 기쁘기도 했다. 나를 비우고 외부의 모든 것으로 채워 넣고 또 다시 비우는 삶을 살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몇 해가 지났을까? 심리적으로 탈진이 왔다. 더 이상 이어나갈 자신도 생각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가슴에 끊어진 틈을 비집고 나와 구정물 같은 무언가가 바닥에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를 잡아 삼킬 부정적인 감정들인 것이다. 최소한의 옷 티셔츠 세 벌과 바지 세 벌만 챙겨 나로부터 멀리 도망쳤다. 그곳은 녹색 숲이 어지럽게 넘실대는 곳이었고 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위로에 나는 힘없이 마음과 몸을 맡겼다.
어슴푸레한 새벽 아침, 한사람만 걸을 수 있는 좁은 숲을 혼자 걸으며 조심스럽게 이어폰을 빼보았다. 처음으로 나의 발소리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속도로 걷고 있는지, 나의 숨소리는 가쁜지 아니면 편안한지. 내 몸에서 나는 소리와 속도를 관찰하며 ‘살아 있구나.’ 라고 느꼈던 그날 그렇게 작은 숲길에서 희망이란 걸 주워 왼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모두와 함께 하는 모습을 꿈꿔보았다. 내가 '나'로써 살아갈 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지켜봐준 사람들이 곁이 있어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했고 뜨겁게 희망했다.
아침마다 뒷산을 산책하며 새벽이슬에 양말이 젖을 만큼 길고 깊은 숲을 걸었다.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조용히 주머니에 주워 담는 희망들로 나의 하루를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더니 관계가 변하고 상황도 변했다. 희망이 과거가 되어 차갑게 식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지금 빡빡한 도시에서 숨통이 여간 편안하지 않다. 함께 하고자 하던 것들이 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주머니에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변화의 시간 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슬펐다.
아빠는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 아침을 먹고 나와함께 병원 정원을 산책을 하다 은행나무 앞 휠체어를 멈추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딱 5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는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삶의 마지막 시간을 절망으로 소진해버리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 이다. 하지만 희망으로 소진할 수 도 없다. 그러나 대부분 죽음 앞에서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투쟁을 시도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희망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가지고 있던 희망들을 끝까지 잡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일까? 아니면 저승세계가 이승보다 편안할 것이라는 것을 희망할까? 나 또한 주머니에서 계속 도망치는 희망을 줍고 잃어버리며 죽음의 순간까지 희망을 희망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사람은 결핍을 가지고 있기에 희망을 존재하게 한다. 결핍 없이는 희망이 존재할 수 없지만, 결핍에 잠식되어도 희망을 얻을 수 없다. 중국 작가 루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희망이라는 것은 본래 있다고 할 것도 없고, 없다고 할 것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도 같다. 원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이 많으면 곧 길이 생겨난다.” 그렇다. 희망은 스스로 가질 때 존재하고 희망을 갖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있다고 기뻐말고 없어졌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다. 그래서 막연하고 뜨거운 희망보다 적절한 희망들을 다시 주워보기 위해 오늘도 가장 가까운 숲을 찾아 새벽처럼 나가본다. 숱한 시작 그리고 다시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