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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식탁 문화

캐나다에서 엄마직에 종사합니다_코티지에서의 하루 2

by 누스

<코티지에서의 하루 1>

https://brunch.co.kr/@mindwalk-yj/165



나도 이런 부엌이면 하루 종일 요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원래 글 못쓰는 선비가 벼루 탓 한다지만, 잡지 속에나 있을 법한 이곳에서라면 그 어떤 똥손이 와도 금세 요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완벽한 주방을 총괄하는 셰프는 내니의 어머니(가칭 S)였다. 그녀는 이탈리안계 캐나다인으로, 조상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아니면 그냥 개인적인 관심에 의해서인지 엄청난 요리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찍이 그녀가 직접 베이킹한 각종 디저트를 맛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후로 우리 부부는 웬만한 디저트는 성에도 안 차는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칭찬에 인색한 우리 남편도 내니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내 디저트에 대한 찬사를 전했으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차리는 S에게서 익숙한 여인의 향기가 났다. 먹이고 또 먹이길래 친정 엄마인 줄 알았다. 한국이나 지구 반대편이나 엄마들은 다 똑같구나. 그날 우린 바지 고무줄이 팽팽해지도록 먹고 또 먹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도저히 수저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수분이라곤 전혀 없는 줄로만 알았던 그 퍽퍽한 닭가슴살에서는 촉촉하고 산뜻한 육즙이 배어 나왔고, 달콤 짭조름한 바비큐 립과 소시지는 쉴 틈 없이 구미를 돋우었다. 저마다 다른 맛을 내는 각종 샐러드와 이탈리아인에 의한 이탈리아인식 파스타까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디저트 배가 따로 있는 건 만국 공통의 법칙인지, 본식보다 더 화려한 후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칸파이, 브라우니, 초콜릿쿠키, 그밖에 정체는 모르지만 맛은 끝내줬던 쿠키들… 저녁 식사 후에는 얼마 전 생일을 지낸 남편을 위해 수제 딸기초코크림치즈 케이크를 깜짝 선물로 받았다.


음식은 비단 몸의 허기뿐 아니라 심리적 허기까지도 달랜다. 푸짐한 상차림에는 낯선 이방인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설레는 만찬이기는 했지만 어린아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던지라, 혹시나 실수하지 않을까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알게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우리였다. 게다가 서툰 영어로 소통해야 했기에 본모습에 비해 더 어수룩하게 비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탁 곳곳에 배어 있던 세심한 배려와 정성이 살짝 얼어 있던 우리 모두의 마음을 녹였다.


음식의 맛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식탁을 둘러싼 그들의 문화였다. 그들의 부엌은 누구 하나만의 독박 희생으로 운영되는 공간이 아니었다. 식구 모두 작은 역할이라도 맡아서 참여하는 공동의 작업장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칠 즈음 S는 두 딸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소개했다.

I have two dishwashers.

두 딸 모두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늘 그래왔다는 듯이 군말 없이 고성능 식기세척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던 이 집의 가장도 부엌일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우리 부부에게서 주문을 받아 부지런히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향긋한 커피 향이 집안을 메우는 동안 S는 각종 디저트를 준비했다.


코티지의 부엌은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면서도 중간중간에 가벼운 농담과 장난과 웃음이 곁들여지고 있었다. 내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은 코티지에 가면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고, 또 다음 음식을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해.

구성원 모두의 참여가 있었기에, 그 모든 과정은 힘든 노동이 아닌 가족 전체의 유희가 될 수 있었다. 흔히 음식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지만, 그건 이렇게 모두의 참여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만일 코티지에서의 식사가 한 사람의 고된 노동으로만 성사되는 것이었다면 그 식탁에는 화합이 아닌 갈등만이 넘쳐났을 것이다. 명절 증후군을 앓는 어느 나라의 주부들처럼, 음식에 열정적인 S도 진작에 드러눕고 말았을 것이다.


가족 모두의 수고로 차려진 식탁에서는 활발한 대화의 장이 열렸다. 각자 근황에 대한 일상적인 주제부터 가치관에 대한 심오한 주제까지 편식 없이 대화가 이루어졌다. 매일 평화롭기만 한 건 아니라고 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면 토론을 너머 언쟁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끊임없이 대화했다. 쇠털 같이 무수한 날 동안 무수한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가족 간에 두터운 신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생각이 달라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건 이런 모습 아닐까? 모두의 기여로 만들어진 식탁에서, 몸의 허기뿐 아니라 마음의 허기까지도 달래는 밥을 먹는 것. 그 모든 과정 과정마다 눈빛과 웃음과 가벼운 한 두 마디가 빈틈없이 시공간을 메우는 것. 그래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아무리 다른 생각이라도, 우리는 가족이기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쌓이는 것.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야 말로 “식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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