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정신과 전문의 지인을 만났다. 직업상 아동과 청소년 내담자들을 볼 때는 꼭 부모님과도 상담을 하는데, 내가 엄마가 된 뒤에는 부모님들을 대하기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때로는 어처구니없게 그런 엄마가 되어 버리더라. 나쁘려고 작정한 게 아닌데,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그냥 그렇게 되어 있겠더라.
그런 엄마. 나쁜 엄마라고 하기에는 악의 없는 모성의 노고를 알기에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비단 엄마들뿐이랴? 부모 딴에는 한다고 했는데도 바삐 살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면 아이가 엇나가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내 아이만큼은 잘 살기를 바라서 했던 행동들이 독이 되고, 부모의 마음이 병든 채로 사랑을 주어서 탈이 나기도 한다. 잘못된 양육 방식을 감싸려는 건 아니지만, 양육의 모든 책임을 부모 개인에게만 귀속시키는 건 너무 가혹하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자신이 있었다. 꽤 헌신적으로 자녀들을 키워 오신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으니, 내 DNA 속에는 부모로서의 기본 소양이 저장되어 있을 거라 믿었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크게 배척당하지 않았고 종종 좋은 친구로 불리는 영광도 누려왔기에, 내 인격에 대해서도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었다. 전공 역시 하필 심리학, 그중에서도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다루는 임상심리학을 공부했으니 양육과 관련된 지식도 부족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 마디로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첫 일 년은 할 만했다. 다들 아이 키우면서 잠 못 자는 게 제일 힘들다던데, 수련생 시절에 새벽 3시부터 머리를 쥐어짜며 보고서 쓰던 생활을 몇 년 간 해왔기에 머리 안 쓰고 젖만 물리면 되는 일은 오히려 할 만했다. 우리 아이는 까다로운 성향이라 두 돌이 될 때까지 통잠을 자본 적이 없었음에도 첫 일 년 동안은 큰 불만이 없었다. 새벽에 출근하지 않는 게 어디냐며, 같이 누워서 쉬게 해주는 게 어디냐며… 이렇게 쓰고 보니 수련 생활이 아니라 수용소 생활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원래 왕년엔 모두 어마어마했던 것!
여하튼 나는 인형 같은 아이를 품에 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밤하늘처럼 까만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이 아기 천사를 혼낼 날이 올까? 그런 일이 가능은 한 걸까?”라는 대단한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귀여움에 취해 살짝 미쳐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초보 엄마의 깜찍한 포부는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요즘은 그 시절의 착각을 반증이라도 하듯 매일 아낌없이 잔소리와 꾸중을 남발하는 중이다. 체력이 고갈된 날에는 훈육과 악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기도 한다. 가장 만만한 약자인 아이들을 감정 쓰레기통처럼 대하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차라리 나 자신을 쓰레기통에 넣고 싶을 때가 많았다. 도저히 재활용도 안 될 인간쓰레기, 그것이 딱 내 인성의 수준인 것 같아서 비참했다. 이러다가 실수로라도 아이를 학대하게 되면 어쩌나, 진심으로 고민해 본 적도 있다. 외부 치안을 걱정할 게 아니라 엄마인 나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아이를 키울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 오는 죄책감에 베개를 적시며 잠든 날들이 태반이다.
현실 육아의 세계로 내려온 나에게 더 이상 거창한 포부 따위는 없다. 그래도 아직 소망 내지 다짐 정도는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애들한테 큰 해를 끼치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해내기가 생각보다 너무, 너무, 너무 어렵다.
최근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의 아들은 서른아홉 명의 사상자를 낸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이다. 저자의 아들 역시 현장에서 자살을 했지만,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할 수도 없었다. 소설이라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자녀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주제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회고록이라서 읽고 싶었다. 거기에는 끔찍한 괴물을 탄생시킨 나쁜 양육의 사례가 담겨 있을 테고, 그 길만 피하면 적어도 최악의 부모는 면할 테니까.
(* 저자: 수 클리볼드, 출판: 반비)
그러나 나의 모든 기대와 달리 저자는 지극히 평범했고, 아니 평범하다 못해 좋은 엄마에 가까웠다. 나는 그녀보다 더 잘 해낼 자신이 없다. 그렇게 키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비극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셈이다. 저자는 여느 때와 같았던 어느 날 그런 비극을 맞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말이다.
글 초반에 등장한 그 전문의 지인은 “어처구니없게"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나도 종종 그 말을 곱씹는다. 누구나 어처구니없게, 나쁜 부모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