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아버지를 잃은 경험이 없다면 이 책을 읽고 방점은 다른 곳에 찍혔을 테다. 빠르게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감을 주었던 작고 가벼운 책은 이내 초반 속도를 올리지 못하며 책에 적응을 요했다. 익숙하지 않은 전라도 사투리는 문자 그대로 읽어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가며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나이 많은 등장인물이 말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머릿속에서 대사를 재생해야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해방 이후 현대사를 관통하는 어느 전라도 시골 마을의 이야기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금세 흥미가 붙었다. 드라마 같은 인물 묘사에도 깊이 빠졌지만,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죽음 후, 화자가 장례를 치르며 다양한 시간과 인물, 장소를 오가며 몰랐던 아버지를 만나는 흐름에 크게 공감이 일었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다.”
실제로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그 후의 일들을 지내오면 또 다른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나에게로 말을 걸어오는 아버지의 지인들과 친척들, 아버지가 없기에 나에게까지 닿은 아버지의 사람들, 그들에게서 듣는 아버지의 사정과 아버지의 뿌리와 아버지의 추억들.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남은 가족들이 해결하기도, 아버지의 울분을 대신 느껴야 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고향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함께 하면서.
아버지가 계셨을 때 지금처럼 아버지의 지인들을 같이 만나고 고향을 함께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느끼는 아버지에 대한 깊어진 다각도의 마음을 아버지와 함께 느낄 수 있었다면, 그때는 몰랐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실 아버지의 죽음이 없었다면 함께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고 고향을 갔더라도 지금 같은 마음가짐은 전혀 아니었으리.
아버지가 없고 나서야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지인과 고향과 속사정은 조물주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삶의 순리 같기도 했다. 새싹이 난 후에야 꽃이 피고, 꽃이 핀 후에야 꽃이 저무는 그런 자연의 원리처럼. 함께 할 수 없는 후에야 아버지를 더 그리워하게 만들려고, 그래서 사랑을 더 느끼라고.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았던 자식도 못 했던 것만 생각난다고들 하더라.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어도 더 함께하지 못한 많은 일만 유독 곱씹었었다. 그런 마음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더 짙게 했고, 새롭게 느껴보는 사랑의 형태로 깊어졌다. 아버지가 없는 아버지의 세계에서 오늘도 그 사랑을 마음으로 마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