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라는 낯선 질문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 중 어느 감각이 가장 예민한지가. 오감 중 촉각이 가장 예민하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몸에 닿는 감촉을 중요시하기에 속옷이나 잠옷은 신경 써서 좋은 재질로 산다고 했다. 일상에서 자주 손이 닿는 수건, 가방, 소파, 의자 외에 펜 같은 물건에도 촉감과 무게를 따지는 편이라고 한다. 카페에서 작업하는 일이 많은 그녀는 심지어 머그잔이 카페를 고르는 기준이라고 했다. 손잡이는 너무 작아서도 얇아서도 안 되며 컵은 적당히 묵직하고 두께는 두꺼울수록 만족도가 높아진단다. 펜이나 머그잔의 감촉을 중시하다니. 나는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감각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친구가 말하는 그 느낌을 알 듯도 했다.
오은영 박사가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촉각이 예민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주변에서 만나다니 신기했다. 당시 함께 TV를 보던 남편에게 본인의 가장 예민한 감각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청각인 것 같다고 했다. 유난히 거슬리는 소리에 민감한 것 같다고. 그리고 나는 오감 중 어떤 감각이 예민한지 고민해 봤으나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 친구의 말로는 주변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시각을 많이 쓰는 사람은 후각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율이 높은 것 같다고 했다. 예를 들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꽃은 향기를 동반하고, 막 구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은 어마어마하게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푸르고 울창한 숲에선 맡기만 해도 치유되는 듯한 나무와 풀 향기가 나는 것처럼.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좋은 향기를 맡고 싶어 하는 욕망 역시 큰 듯하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면 나는 비교적 시각과 후각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시각과 후각이 ‘예민’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다소 웃기지만 이유를 알 수 없던 예전의 다짐이 생각났다. 매일 시달렸던 직장인이었던 때, 회사를 그만두고 수입이 줄어든다면 가장 포기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물건은 무엇 일지에 대해 고민을 꽤 오래 했었다. 매달 기분 전환으로 사던 옷들은 1순위로 줄여야 할 것이고, 비싼 화장품과 미용비도 많이 줄일 수 있을 듯했다. 가방이나 액세서리 등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듯했고. 그렇지만 유일하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자연의 향이 나는 데오도란트. 다른 물건들은 대체품을 찾을 수 있었지만 내 기준에서 이것만큼은 대체품을 찾기도 힘들었다.
로즈마리나 애플민트 같은 향과 비슷한데 맡으면 숲 속에 핀 작은 꽃의 소박하고도 싱그러운 향이 연상된다. 진하거나 오래 지속되진 않지만 나만 느낄 수 있는 잔향도 은은하게 남는다. 그 향을 바르면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하기도, 소박하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존재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내가 아름답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도, 내가 보잘것 없어져도 그 향만은 나를 아름답게 해 줄 거라는 무의식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향에 민감한 사람인 걸까? 고민을 이어가며 샤워를 했다. 욕실에 있는 바디 제품들의 향이 눈에 들어왔는데 대부분 허브향이었다. 그렇다, 나는 허브향을 확실히 좋아하긴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허브향을 유독 좋아하게 된 것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향에 집착하던 시기가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때였다. 틈틈이 허브향의 핸드크림이나 스프레이로 자연의 향을 맡으며 긴장을 완화했었다. 바쁘고 소모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여기저기 한적한 낯선 도시들로 여행을 다니던 시기들도 그 무렵이었다. 먼 북쪽의 작은 마을이나 도시에서 주방의 창가에 허브를 작은 화분에 키우거나 마당에서 허브 나무를 가꾸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저렇게 향기 나는 식물들을 키우는, 여유로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환경에서 지내고 싶다는 바람을 키워갔다.
사무실에 근무했을 땐 허브향의 대용량 핸드크림을 책상에 두고 사용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향이 뭔지 물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나의 핸드크림을 사용하라고 말했고, 다들 잠시나마 그 향으로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이쯤 되면 후각에 민감한 사람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둔감한 정도에 가깝다. 어렸을 때 축농증을 경미하게 앓아 병원에 다녔었다. 수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고통스럽게 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냄새를 잘 맡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맡지도 않는다. 냄새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보니 후각이 발달하지 않은 내가 냄새로 괴로웠던 때가 떠올랐다. 스스로 나의 체취를 확인하게 될 때 엄청나게 괴로웠던 기억이. 정확히 말하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나의 냄새가 민망했던 일들이.
요즘은 출근할 때도 운동화를 많이 신는 추세지만 ‘라떼는’ 구두 말고는 별다른 옵션이 없었다. 구두를 신으려면 얇은 스타킹을 신어야 했고, 발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에게 땀 흡수가 안 되는 스타킹은 쥐약이었다. 어떨 때는 괜찮았지만 어떨 때는 그야말로 나에게서 풍겨 나오는 냄새 때문에 어쩔 줄 모를 때가 많았다. 스타킹이나 덧버선을 몇 개씩 들고 다니기도 했고, 수시로 화장실에서 물티슈로 발을 닦으며 내가 피해를 줄 수 냄새가 항상 신경 쓰여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불편을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고, 불편을 끼치는 사람이 정말로 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부턴 진한 향의 향수나 바디 제품들을 멀리해 왔다. 사실 십여 년 전까지는 알록달록하고 달콤한 향들을 좋아하기도 했다. 한창 유행하던 바디 제품들이 있었는데 향이 어찌나 강렬한지 지나가던 이가 사용했다면 누구도 알아차릴 정도의 향기를 뿜어냈다. 그러다 한 번은 택시에서 그 향의 로션을 발랐는데 기사님이 격렬하게 호통을 치셨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예요,라고. 그 후로는 그 향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지친 현대인을 위한 자연의 향들이 선보이게 되면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비교적 호불호가 덜한 허브향을 좋아하게 됐다. 내가 쓰기에도 만족스럽지만 아마 상대방에게 그 향이 의도치 않게 전해져도 불쾌감이 없고, 오히려 긴장이 완화되며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를 줄 수 있는 아로마틱한 향. 그래서 더 즐겨 사용했던 게 아니었나 짐작한다. 타인의 시선보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지만 향과 관련해서는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를 더 의식하기도 했던 거였다. 남들을 신경 쓰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더 중요한 나. 그중 어느 지점을 왔다 갔다 하기도, 양가적 면들이 겹겹이 교차해 쌓여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즈음에 신랑에게 물었다, 나는 오감 중 어떤 감각이 예민한 듯하냐고. (나에게는) 놀랍게도 후각이라 했다. 다른 부분에서는 예민하게 반응한 적이 없는데 냄새나 향에 대해서는 몇 번 민감하게 반응하더라는 거였다. 이사하고 초반에 화장실에서 하수구 냄새가 났을 때라든지 인위적인 향이 나는 방향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싫다는 표현을 했다는 거다. 나는 그나마 후각을 가장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떤 감각이 예민한지 잘 모를 때는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사람마다 발달했거나 예민한 감각이 있을 수도 있고, 없어도 그나마 신경 쓰게 되는 감각이 있을 수도 있는 거였다. 지인 하나는 때에 따라 특정 감각의 예민도가 발현되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오감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 만나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예민하거나 신경 쓰이는 감각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대부분 멈추어 한동안 골똘히 생각했고, 쉽게 찾아내는 사람도 있었으며 나처럼 애매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감을 하나씩 짚어보는 과정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감각과 더불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좋고 싫었던 기억까지 떠올릴 수 있을 터였다. 감각을 통해 나에 대해서 스스로 알아보는 과정은 낯설었다. 그럼에도 잊고 있거나 몰랐던 나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여정이 흥미롭기도 했다. 낯선 질문으로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는 드물고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지 않을까. 앞으로 나는 가끔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물어보게 될 듯하다. 그래서 당신은 어느 감각을 가장 신경 쓰는 것 같나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