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나물, ‘머위’ 아닌 ‘머우’
생각지도 못하게 머우가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처음 본 아저씨에게 머우를 받았다. 가지고 있던 봉지를 보여주며 너무 많으니 좀 가져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신랑과 나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아.. 네' 하며 멀뚱멀뚱하는 사이, 아저씨는 이미 몇 움큼을 우리의 비닐봉지에 넣고 있었다. 뜻밖의 호의가 감사해서 마침 2+1으로 산 새우깡 한 봉지를 아저씨의 비닐에 넣어드리려고 했으나 극구 사양했다. 집에 와서 꺼내보니 양이 꽤 많았다. 나에게 머우가 생기다니. 그 말은 즉 내가 직접 손질하고 삶아서 어찌어찌 해 먹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머우는 몇 해 전부터 내 기억에 존재했다. 그즈음부터 본가에 자주 오가며 엄마가 머우 나물을 봄마다 말 그대로 ‘쟁여놓고’ 드시는 걸 봤다. 입맛이 없을 때도 머우 나물에 어간장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이라면서. 봄이 지나도 한동안 먹을 수 있도록 김치냉장고 등에 저장해놓고 여름이 지나서 까지 아껴먹는 머우는 엄마가 손에 꼽는 반찬이었다. 덕분에 나도 해마다 그 맛을 보는데 언제 먹어도 첫입은 쌉싸름한 맛 때문에 놀라지만, 두 번째 숟갈부턴 쌉싸름한 맛을 좀 더 즐기며 먹을 수가 있다. 신랑도 그때부터 머우 맛을 알고는 엄마가 준비해주는 반찬으로 있을 때마다 맛있게 먹곤 했다.
주방에 선 나는 숙제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마침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이 머우를 조리하기 좋은 때라는 생각을 했다. 그간 시골에서 친정에서 가끔 받아온 손질 안 한 나물들은 대부분 썩혀서 버린 적이 많았으므로 이번에는 그때의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마음이 컸다. 그날은 엄마에게 물어볼 상황도 안되어 유튜브로 머우를 삶는 법과 양념장 만드는 법을 찾아봤다. 끓는 물에 데친 후 줄기와 가까운 이파리 부분은 생각보다 여러 번 꼼꼼히 씻어야 했고, 난관은 줄기 껍질을 까는 일이었다.
예전에 엄마를 도와 머우 줄기를 까긴 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줄기의 빳빳한 껍질을 까서 보들보들한 면이 나오면 된다고 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렇게 까보아도 뭐가 빳빳한지 뭐가 부드러운지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하.. 이파리가 50장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냥 먹을까 생각도 했지만 뭔가 빳빳하다 하니 먹기 불편할 것 같아 왠지 까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얇은 줄기의 끝에서 아주 작은 원 단면의 1/4 정도를 손톱으로 잡고 주욱 아래로 잡아서 깠다. 기다랗게 주욱 껍질이 가끔 잘 까지긴 했으나 짧게 잘리는 때가 많았다. 심지어 줄기를 까고도 이게 깐 건지 안 깐 건지 색깔이 연두색으로 비슷해 구분이 안 되었다. 초집중을 해서 나물 하나를 서너 번 까서 완성을 시켰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맞게 껍질이 제거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잎 한 잎 사투를 벌이다 열 장 넘게 손질했을 때쯤에 생각이 났다. 바로 엄마가 알려준 머우 줄기 손질하는 방법이! 줄기 끝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 위쪽을 잡고 한쪽으로 똑 부러뜨린 후 밑으로 주욱 잡아당기면 깔끔하게 껍질 반쪽이 벗겨졌다. 그리고 다시 반대편을 똑같이 윗 줄기를 부러뜨려 껍질을 제거해주었다. 이렇게 하니 대략 두 번 만에 손질이 완성되었다. 그런데도 이파리는 무수하게 남아있었다. 갈 길이 멀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껍질을 벗긴 보들보들한 줄기의 감촉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렇게 조용히 묵묵히 손질만 하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늘은 간만에 여러 밑반찬을 만들어 한식으로 먹기로 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진이 다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신랑은 우리 집에서 머우 나물을 보게 될 줄이야 라며 맛있게도 먹었다. 함께 준비한 양념장도 잘 만들어져 나의 첫 머우는 꽤 성공적이었다. 알싸한 자연의 향과 맛이 왠지 심신을 차분하고 맑게 해주는 것도 같았다. ‘외국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이런 쓴 나물을 먹겠냐 하겠지?’ 라며 신랑은 연신 맛있다는 듯 우리 집에서의 첫 머우 쌈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머우’가 아니라 ‘머위’인데 라고 말했다. 대충 느낌이 머위가 표준어고, 머우가 사투리 같긴 했으나 알 게 뭔가, 나는 ‘머우’로 처음부터 알게 됐고, 심지어 이 머우 쌈도 내가 만들어줬는데.
나는 ‘머우’를 갑자기 ‘머위’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머우와 관련된 좋은 기억들이 많은데 그걸 한 순간에 ‘머위’가 차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상도에 살던 내가 서울서 살게 되면서 ‘정구지 찌짐’을 ‘부추전’이라는 세련되고 맛대가리 없는 말로 부른다는 걸 알았을 때의 당혹감이란. 그렇지만 양쪽에서 산 세월이 거의 비슷해 갈 무렵에는 오히려 ‘부추전’에 더 익숙해졌다. ‘머위’가 나에게 더 많은 경험과 ‘머우’를 넘어서는 시간을 함께하지 않은 이상, 머우는 나에게 ‘머우’이지, 절대로 ‘머위’가 될 수 없었다.
몇 해 전부터 아빠의 고향 시골에 자주 가면서 친할머니댁처럼 가까이 지내는 아빠 후배네에 자주 들르곤 했다. 실은 그 집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친할머니를 대신해서 우리 가족이 친할머니댁처럼 여기는 곳이었다. 그곳의 할머니와 삼촌들은 친할머니와 친삼촌과 다름없을 정도였는데 우리 할머니 대에서부터 친하게 지내오다 보니 서로가 오랜 세월을 나눌 수 있었다. 최근 몇 년은 나도 일 년에 몇 번씩 그 집을 들렀고, 할머니와 삼촌들은 계절마다 갖가지 먹을거리들을 듬뿍 안겨주시곤 했는데 그 중엔 머우도 있었다.
친할머니의 친구였던, 아빠가 엄마로 여기며 찾아뵙던 ‘이가매’ 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지리산에서 평생 나물을 캐셨다.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던 할머니는 아들들의 요청으로 가끔 나물을 캘 때 부르던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여러 버전의 노래가 많았는데 특징은 가사에 ‘나물을 꺾어’와 ‘그 총각’이라는 단어가 항상 나온다는 점이었다. 까맣고 주름진 할머니의 작은 손에는 얼마나 많은 애환이 서려 있을까.
시골에서 머우를 얻어오지 못할 때 엄마는 시장 주변의 길거리에서 바구니마다 나물과 채소를 담아놓고 파는 할머니들에게 머우를 사오곤 했다. 머우를 손질하고 나서 내 왼손 엄지손톱에는 오랜만에 흙먼지가 끼었다. 손 세정제로 깨끗하게 씻었는데도 손톱 깊숙이 들어가서 씻기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손톱을 더 짧게 깎거나 일부러 빼내려면 빼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발견한 흙먼지를 그냥 두었다. 무심하게 흙먼지를 쳐다보고 있으면 거기서 이가매 할머니가, 나물 파는 할머니들이 보이는 듯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할머니들의 세월이 연상돼서 물끄러미 바라보게 됐다. 나흘이 지났는데도 아직 흙먼지가 그대로다. 주말에 손톱을 깎을 때까지는 그냥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사전을 찾아 ‘머우’와 ‘머위’을 차이점을 살펴봤다. 역시나 ‘머위’가 표준말이고 ‘머우’는 지역에 따라 쓰이는 사투리라고 한다. 이제는 곁에 없는 아빠의 어릴 적 별명은 ‘바우’였다. 바위 ‘암’ 자를 부르는 애칭으로 ‘바위’가 아니라 ‘바우’. 머위를 머우로 부르는 시골의 정겨움이 ‘머우’처럼 ‘바우’에도 담겨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엄마에게 자랑하듯 손질된 머우와 양념장 사진을 보냈다. 살림 초보인 나이 많은 딸이 기특하다는 듯 엄마는 놀라움을 표했다. 얼마나 머우 손질이 힘들었는지 고생담을 말하는 내 얘기에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엄마의 고생을 이제야 알겠다며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는 숨은 뜻을 엄마는 아마 알아차렸겠지.
신랑은 그 아저씨가 16층 사람이 맞았지 라고 물었다, 다음에 볼 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며. 아저씨가 건넨 건 그저 ‘머위’였지만 내가 받은 건 ‘머우’라는 선물이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 아저씨에게 또는 다른 이웃에게 문득 작은 호의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