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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Aug 22. 2021

슬픔의 측면

죽음으로 빚어진

그는 오랫동안 나의 괄시를 받았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나의 마음속에선 그를 무시했다. 그가 무시당한 이유는 그의 "끈적한" 웃음 때문이었다. 그랬던 그가 늙어간다. 그리고 어느날 동네친구에게서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며칠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그가 괜찮은지 확인차 문을 두드려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이 조금씩 흐려져가는 것같다고 말한다.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친구가 대수롭지 않게 자신은 그 노인의 죽은 부인 때문에 그를 챙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노인의 부인은 나도 안다. 벌써 이세상을 떠난지 오래되었다.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때 그의 부인 자넷과 함께 학교버스를 타고 연극으로 유명한 스트랫 포드 극장에 함께 갔었다. 나는 학부모 자격으로, 그녀는 자원봉사자 자격이었다.


우리 둘은 한자리에 앉아서 2시간 정도 걸리는 차여행을 같이 했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신과 남편은 은퇴 이후 10여년간의 보트생활을 했단다. 보트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이 작은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배가 기울 때 음식을 만들려면 아주 고생스럽다며, 10여년 지나니 정착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이방인으로 살던 내게 고운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랬는데, 어느날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 얼마후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언제나 깊이가 없다. 사람을 그렇게 떠나보낸다. 많은 이들이 내곁을 그렇게 떠나갔다. 동네친구도 그 자넷과 좋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했다. 친구와 자넷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그의 남편에 대해서 나의 편견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늘 가게에 들른 그는 한손가락을 들어 보여준다. 칼질하다가 손을 베었다며, 늙으면 문제라고 웃는다. 그 노인은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하여, 생각해 온 것을 다 마치고 가게를 나가기까지 인내심이 필요하다. 요즘엔 그가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까지 챙겨준다. 그리고 그의 "웃음"도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마스크를 잊고와서 오랜만에 맨얼굴의 그를 본다. 오늘은 그가 나가려는데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노인이 문을 잡고 있으니, 먼저 나오기를 기다리며 한쪽편에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그 노인은 자신이 문을 잡고 있겠다며, 모든 사람들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서있다. 나는 한쪽눈으로 노인이 잡고있는 문이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손에 힘이 없는 관계로. 그는 무언가 자신이 도움이 되길 원하며 그리 서 있었다.


나의 "괄시"는 내 안에 있는 편견에서 비롯됐다. 나는 그가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이유없는 웃음을 왜 내게 보내는가 말이다. 그러나 웃음은 그의 평생의 습관일 수 있다. 누구나 딱 떨어지는 행동거지를 하지는 못한다. 누구는 너무 쌀쌀 맞고, 누구는 아무런 것에도 관심이 없는 반면, 그 노인은 이런저런 일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자넷이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에게 맞지 않는 남편이라면서.



정말로 선한 얼굴의 그가 어제 아침에 담배를 사면서, 나를 쳐다본다. "어제 우리 엄마 세상을 떠났어요". "아 ~~" 나는 할말을 잊는다. "미안합니다, 그 말을 듣게 되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는 "당신이 저희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어요" 한다. "당신 어머님의 미소를 기억합니다. 언제나 기억이 날거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못했다. 그의 엄마 메리는 참으로 활발했다. 언제나 큰 웃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오랫동안 일했고, 은퇴한 뒤에 좋은 시간을 보내나 싶었는데. 허리가 아파서 수술한 후로 회복하지 못하고, 최근엔 요양원에 있었다. 가끔 가게에 들리는 그의 남편 던과 아들에게 어머니 소식을 물어보면, 좋지 않다고 해왔는데,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는 이야기다.  그녀의 얼굴과 눈물 머금은 아들의 얼굴이 오버랩되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아있을 것 같다.




린다는 결국 마을로 돌아왔다. 아들의 사망소식을 전해듣고 그 마무리를 위해 저멀리 서부로 날아갔었다. 그 린다는 아들이 어린아이일때부터 아들 때문에 속을 끓여왔다. 동네에서 사고뭉치였다. 마약을 팔기도 해서 붙잡혀 감옥에도 갔었다. 그랬는데 그가 서부 멀리로 돈벌러 갔다고 하더니, 결국 비보를 듣게 됐다. 소문으로만 그의 죽음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데, "약물과다"라고도 하고 "자살"이라고도 한다. 부모 가슴에 못을 꽝꽝 박고 떠났다. 그 린다가 동네를 떠났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더니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동네라고 돌아와준 그녀에게 감사하다. "소식들었다. 너의 슬픔에 말할 바를 모르겠다" 했더니, 다시 조금 눈물을 비쳤다가 고맙다고 말한다. 자신도 아직 믿을 수 없다면서. 그 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빛이 1%씩 제색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그녀가 잘살아내기를 기도한다.




또하나의 슬픈 소식이 있었다. 젊은 청년 다빈이 죽었다. 그야말로 "자살"했다. 그는 아주 소담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너무 일찍 아이아빠가 되었고, 혼자 살면서 그 삶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담배 한갑을 사기 위해 거의 매일 가게에 들리던 청년이었다. 나중에는 담배 한갑 살 형편이 안되었었을 수도 있었다. 은행카드가 잔액부족으로 나올 때도 많았으니. 그는 알콜중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목수로 일을 하기도 했으나, 제대로 업무를 수행했는지는 모르겠다. 앞으로 살다보면, 어려움들을 이겨내는 방법이 보였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리 가다니, 그가 세상을 떠난 그 즈음해서는 동네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딸에게 그의 소식을 전해주었더니 그의 페이스북을 찾아냈다. 그 페이스북에는 딸을 안고 있는 그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의 방황이 남일같지 않다. 내 자식도 휘청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막내의 친한 친구도 몇년전에 자살로 죽었다. 그리고 몇몇 친구들을 그런식으로 잃어간다. 막내는 친구가 떠난뒤 엄청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우울증에서 간신히 벗어나나 했는데, 친구의 죽음으로 긴 구덩이에 빠진듯 허우적댔다. 지금은 부모를 떠나 나름대로 살아내려고 바둥거리고 있다. 


내 자식을 비롯,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그런 자각이 들어 슬프다. 그런데, 내가 노인에 대해서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 노인의 웃음이 거슬리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할수 있는 작은 일들이 있었던 것만 같다. 그냥 바라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떤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끈이 나와서 상대방과 나를 엮기를 바래본다. 혹 그 작은 배려가 삶의 희망을 찾는데 도움이 될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빛을 유심히 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흔적이 엷어져가는 것도 지켜본다. 그 모습이 좋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는 약간은 야박해 보이는 말이 맞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슬픔을 몰아내면서 찾아드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서 인것 같다. 떠나면서 그들에게 남긴 유산일 수도 있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힘껏 살아내면서 뿜어내는 고뇌에 찬 기쁨일 수도 있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어깨가 너무 가라앉아있던 그가 평소에 하던 대로, 복권 한장 사면서, "이걸 사지 않으면 어떤 행운도 기대할 수 없겠지?" 한마디 실없는 농담을 하는 것도 즐겁게 받아들이게 된다. 삶은 시시해보이는 것으로부터 자리를 잡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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