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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l 25. 2021

무릎꿇은 노년의 사랑

은교

일단 3가지 부분으로 소설 "은교"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더듬어"라는 단어를 썼다. 소설속으로 글쓰는 사람의 마음이 일단 발을 담그고 있다는 표현이다.

17세 소녀와 69세 노인과의 불균형한 관능의 사랑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하니까. 

(이 글은 책에 관한 리뷰다. 영화 은교의 사진들을 독자 서비스 차원으로 올린다.^^)




* 사 랑


17살 미성년자와 50살 차이가 나는 할아버지와의 사랑이 가능하냐고 난리들이다. 소설속에서 그런 것들을 섬세히 그렸다. 평생을 가정을 일구지 못하고 살아온 노시인에게 그녀는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이었다. 참 묘한 단어, 등롱.. 대나무나 쇠 따위로 살을 만들어 겉에 종이나 헝겊을 씌우고 그 안에 등잔을 넣어 사용하는 등을 일컫는다고 사전에 나온다. 반딧불같은 소녀 은교가 노인의 삶에 들어왔다. 거죽만 노인인, 이적요 시인의 본능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마음과 몸이 함께 반응하게 된것, 그는 이렇게 말한다. "늙은 육체는 외피에 불과했다. 은교와 만나는 나의 감각들은 몸서리쳐질 만큼 살아있었다" (202쪽)

"늙는 것,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범죄. 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이의 욕망은 더럽고 끔찍한 범죄이므로, 제거해 마땅한 것,이라고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있었다." (209쪽)


이적요 시인은 자신의 감정과 세상의 시선앞에서 당황하고 있다. 섹스를 다스리는 것은 식은죽 먹기로 쉬웠던 그에게 형벌처럼 은교가 버티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망들을 결국 잘 참아내는 것같다. "그것은 고유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311쪽)

또한 이렇게도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충만한 경배가 놀라운 관능일 수 있으며, 존재 자체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 삽입의 순간보다 더 황홀한 오르가슴일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꿈엔들 상상할 수 있으랴." (314쪽)


시인은 은교와의 사랑을 나름대로 완결한다. 그러나 은교와의 사랑 가운데 침입자처럼 얽혀있는 서지우가 문제다. 그는 존경하는 스승이 작은 소녀에게 눈멀어 그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한다. 단지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자신도 "합의 원조교제" 당사자인 은교를 자신의 방식으로 다룬다. 욕망이 끓어오를 때면 끌어안고, 성교까지 한다. 그걸 시인이 발견한다.




그러니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은교를 더럽히는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 


* 작가라는 직업


"나는 2009년 이름 봄에 죽었다. 그렇게 믿는다. 아닌가. 어쩌면 겨울이 가기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 (7쪽)

소설은 이렇게 강렬하게 시작한다. 죽은자가 말한다. 죽은 다음에 글을 쓰지 않았다면, 죽기전에 이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는 걸 알려준다. 이미 죽은자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추모의 마음을 지니며 페이지를 넘긴다.
죽은 뒤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소설가를 제외하고는. 소설이란 문학장르가 갖는 매력이다.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은 자신을 실명으로 등장시켜, 엽기적으로 살해당하게 하더니, 박범신 작가는 주인공의 죽음을 놓고 소설을 만들었다. 박작가는 "은교"라는 작품을 1달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데만도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릴텐데, 구성과 수정, 그 모든 것을 1달안에 끝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어쨋든 작가라는 직업은, 할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작품을 쓰고나서 자신의 모든 것이 흐물흐물 빠져나간 느낌을 받고 누웠다고 했다.
이적요 시인이나 박범신 작가같은 사람들은 쓸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돌봐야할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변의 특별한 인내와 이해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소설속 서지우 작가같은 사람. 그는 문학에 꽂히긴 했으나, 이적요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멍청하고 무지"하다.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고 그를 비난한다. "감수성이란 번개가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같은 것일진대, 그에겐 그게 없었다" (68쪽)고 단언한다.
그러나 서지우는 문학을 놓지 못한다. 이혼을 할 지언정 그길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스승을 찾아온다. 괴팍한 혼자 사는 노시인을 보필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시만 쓰고 잡문 하나, 인터뷰 한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이적요 시인은 몰래 써온 시가 아닌 다른 글들을 보관하고 있다. "신비주의"로 포장해 온 것은 세상과 문단을 속이기 위한 이적요 시인의 고도의 문학적 전략이다. 이 시인은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는 서지우에게 장난삼아 글을 한편 준다. 서지우는 그것으로 세상의 이목을 받게 된다. 말하자면 "간신히 등단한 문학가에서 스승의 글을 사기친 사기문학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적요 시인은 글에서 "문학을 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서지우같은 인간들일 것이다.


* 가 정


때밀이 엄마밑에서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불우한 가정에서 은교는 자란다. 자신의 육체를 "그까짓것!!"으로 생각할 만큼 성에 대해 개방적인 요즘 소녀다. 청소를 잘하고, 말이 많진 않지만 붙임성이 있는 청순하게 생긴 아름다운 소녀다. 소설속에서 서지우의 요구에 응하는 은교를 보면, "청순하다"는 것은 겉만 그렇다. 이적요 시인이 "거죽만 노인인 것"과 마찬가지다.


서지우는 이적요 시인의 강의에 청강생으로 들어온 뒤, 불운하게도 자신의 길이 아닌 문학의 길에 들어서 인생을 허비한 사람으로 나온다. 아내와는 이혼하고 문학 언저리에서 떠돌다, 예전에 감명을 줬던 이적요 시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온갖 굳은 일을 다한다.


이적요 시인은 평생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애정없이 어떤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을뿐이다. 그 아들에게 피붙이로서의 약간의 책임감뿐, 가깝게 하며 살지 않는다. 아들 역시 제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떠돌며 산다. 그 둘 사이에 어떤 억지도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혈연에 따른 의무와 권리로 사람의 관계를 묶어두려는 일종의 정치적인 속임수라고까지, 생각했다.(중략)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권리와 의무로 꽁꽁 묶여 사는 것이 내가 주위에서 들여다본 가정이고 가족이었다. 내 가슴에 얼이 깃들어 있는 것도 핏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한때 나와 맺어졌던 얼의 어미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얼의 어미에겐 언제나 미안했다. 그게 전부였다." (347쪽-348쪽)



이런 이적요도 은교를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조금 다른 감회에 젖는다. 서지우를 죽이고, 자신도 자신에게 심판의 형벌을 내리기로 결심하면서 시인은 더 이상 은교를 보지 않는다. 은교의 가족이 떠나가는 트럭을 훔쳐보면서 그가 본 것은 "가정"이었다. 의젓한 어미닭처럼 어린 동생들을 품에 안고 있는 그녀에게서, 동생들과 숨결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읽어낸다.

"그때까지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지어낸 허울을 봤을 뿐이었다. 트럭이 금방 공터를 지나갔고,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393쪽) 두 동생을 양팔로 싸안고 있는 너의 모습은 햇빛보다 환했다. 일상적 삶에 깃든 너의 참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94쪽)
그러면서 시인도 깨닫는다. 자신의 평생에 걸친 창작행위와 그 부산물보다, 은교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자신의 시편들보다 훨씬 살아있는 그런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은교는 "할아버지와 서 선생님(서지우)이 더 친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 사람은 조금 특별한 의미의 가족이었다. 그러나 그런 형식이 없었기에,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가엾게도 그안에 "사랑" 대신 "성"이 들어앉았다. 그들이 가족이 될수 없었고, 이 소설이 비극이 된 이유였다.
이적요는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갔다. 흔해빠진 감상에 젖지 않고, 자신의 성적 욕망도 통제하면서, 창작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가족같은 사랑"을 만났을 때 그것을 제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은교에겐 자상한 할아버지가 될수 있었고, 서지우도 자신의 아들처럼 믿고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남"이었다.
사랑이라는 가면의 의무와 권리에서 탈피하여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그가 결국 다다른 곳은 그보다 못한 세계였다. 세상의 흠모와 존경을 받을지언정 결국 살인을 계획하고 자신의 죽음도 당기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이적요 시인이 잘한 것이 있다면 사후라도 허명을 거부하고, 얼마나 흉악한 늙은이였는지 스스로를 공개하려고 했던 것이다.
시인의 살해 의도대로 된 것이 아니라, "사고사"였음이 밝혀지고, 은교가 그나마 시인의 고백이 들어있는 "시인의 노트"를 태워버림으로써 세상에서는 이적요 시인을 고고한 지성의 핵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길이며, 진실은 그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이적요 시인의 사후 밑그림은 이뤄지지 않았다. 자신의 계획대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고, 살인의 고백까지, 사랑의 고백까지 한 그것들은 영원히 미궁속으로 떨어졌다. 세상에 낱낱이 고하라는 그의 의도가 이뤄지지 않았다. 천재 시인도 어쩌지 못하는 세상일이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조종하려 했다.
어쨋든 이적요 시인이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렇게 친했던 서지우에게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뭐 그런 생각도 들고.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장 차이일른지 모르겠다.

일상이 없는 사람들에게 문학은 구원이 되어주기도 한다. 나중엔 일상보다 그것이 위에 선다. 정교한 논리와 아름다운 현란한 언어로 채색된 그것들이 삶의 본질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흠모한다. 시인은 은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이 시의 감옥에 갇혀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은교가 너무 늦게 찾아왔다.  그것이 시인과 주변인들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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