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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l 10. 2021

정말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들쑥날쑥 2021년의 캠핑

이번 캠핑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조화, 평화, 사랑, 헌신, 기쁨이 함께한 시간들이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대가족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이제 어떤 시간들이었나 되짚어보려는 찰나, 이 문장에 스며든 낱말들을 하나씩 해부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진부한 단어들이지만, 그 의미가 결코 퇴색될 수 없기에. 과연 이런 황홀한 단어들을 우리가 경험했을까? 캠핑은 지난 6월 25일부터 7월1일까지 였는데, 25일 갈수 없었으니 26일부터라고 하는게 좋겠다.


조화:

어우러짐, 서로 삐죽빼죽 크기도 달라야 하고, 색도 다양해야 하고, 성질도 달라야 한다. 그러나 그안에서 조화를 얻으려면, 이것들이 어울려 어떤 큰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일주일간 캠핑 사이트를 빌렸다. 예약먼저, 계획은 그 다음에 이런 모토로 시작된 일이었다. 토론토에서 딸과 사위가 3박을 할수 있다고 했고, 남편은 저녁에 사이트에 합류하여 아침이면 가게를 열러 떠나고 밤이면 다시 올수 있었다. 그 와중에 오웬사운드 언니와 키치너 동생이 일요일날 합류하기로 했고, 동생은 2박을 언니는 4박을 했다. 사촌오빠와 올케 그리고 두 손자가 하룻밤을 지내고 갔고, 월요일 딸부부는 친구만나러 다른 동네로 떠났다가 오기로 했고, 저녁식사 시간에 동생 친구 부부가 와서 머물다 갔다. 29일에는 캠핑장을 떠나 집에 갔다가 밤에 오기도 했다. 마지막날에는 드디어 은퇴의 시간을 갖게된 옆 마을 K 언니부부가 방문해서 하룻밤을 우리와 함께 했다. 전체 등장인물들이 14명이었지만, 그 멤버들이 들쑥날쑥했기에 사이트는 언제나 조금씩 다른 멤버들과 함께 하는 역동적인 시간이었다. 일요일에는 눈 딱 감고 가게문을 닫고 남편도 합류했다. 가족들이 많이 모이는 일요일부터는 캠핑 트레일러 사이트 하나, 텐트 사이트 하나 빌려서 두군데를 오고가며 지낼 수 있었다. 두군데라야, 캠핑 트레일러앞에 텐트 사이트가 길건너 있고, 물가여서 마치 본집이 있고, 카티지가 옆에 있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오랫만에 텐트도 치니, 그것 또한 새롭다. 2살 애기부터, 20대 젊은 부부와 열심히 일하는 50대와 70을 향해가는 은퇴자까지 다채로운 캠퍼들이 자리를 빛냈다.




평화:

자칫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가장 적은 수의 숫자가 있을 때는 나와 언니 2명이었던 아침도 있었다. 모두 떠나고, 점심때쯤 도착할 새로운 게스트가 오기전, 우리 둘이 아침을 먹었다. 나는 그날 10시에 줌 미팅이 하나 있었다. 사람이 많이 있었으면 포기했었겠지만, 이해심이 많은 언니와 단둘이 있었기에 집에 있는 것마냥,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줌미팅에 참여했다. "노인학대"에 대한 공부를 하는 중,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공부하는 느낌도 좋았다.

캠핑장 예약된 첫날, 정말로 많은 비가 쏟아졌다. 아이들도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그래서 그 다음날 가기로 결정했는데, 비워놓은 사이트에 지불한 돈이 아깝기도 했다. 오래전에 예약을 해놓아서, 취소를 할수도 없었고. 그 다음날 내가 가게를 보고 남편과 애들 부부가 가서 캠프를 셋업하기로 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할뻔한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그 덕분에 늘어났다.


기타에 대해서 한말씀중인 사촌오빠

기타 훈수를 두던 사촌오빠가 떠난뒤 기타를 가져온 언니와 동생은 서로 소리를 들어주고 연주를 해보는등 시간을 보내더니, "싱어, 이리좀 와봐" 하면서 나를 불렀다. 나는 연주엔 완전 젬병이라 방관하고 있었는데, 나보고 노래를 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셋이 열심히 연습해서  가족방에 올리자고 의기투합했다. 요즘에 와서 피아노를 독학하는 동생은 기타까지 유튜브를 통해서 배우고 있다고 했다. 언니는 원래 교회 피아노 반주를 오래하기도 했는데, 한동안 멀리했던 기타연주를 하기 시작했는가 보다. 나는 엉겹결에 밴드 멤버가 되는 행운을 잡았는데 내 목소리는 완전 알토여서 올라가지 못하는 부분은 책에는 없는 알토 파트를 동생이 만들어 화음을 만들수 있었다.

동생은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는데, 그런 말을 한번도 하지못하고 지냈었노라고 말했다. 아이들 키우면서 그럴 짬이 있지도 않았으니, 그 관심이 어느정도였는지 누구도 알지못했다. 혼자 피아노를 익히면서 노래를 불러 가족방에 올리곤 하더니, 화음을 갑자기 만들어 연습을 시키니, 이 애가 내가 알던 애가 맞나 싶었다. 어쨋든 캠핑장에서 우리는 복음송 1곡과 짧은 축하송 한곡을 취입(?)할수 있었다.


Colpoy만에 자리잡은 블루워터 캠핑장

사랑:

애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것도 이뤄질 수 없었다. 우리가 장을 마련했지만, 누구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황망한 시간들이 되었을 것이다. 동생은 틴에이저 아이들은 참가하길 원하지 않는대서 그대로 놔두고 혼자 올라왔다. 그애야말로 캠핑을 좋아하는 1인인걸 아는데, 언제나 일에 쫒겨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는 많지 않다. 팬데믹으로 가게 문을 열지 않는 대신 정서적으로, 신앙적으로, 가정적으로 많은 성장을 한 사람이 내가 볼때 키치너 동생이다.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음악적 소질을 계발하고 갈고닦는 중이고, 삐딱해질뻔 한 아이들이 엄마를 걱정하고 도와주는 착한 딸들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말이다. 동생은 따지는 것도 많고, 까다롭기도 하고, 게다가 시간도 없어서 그애와 무엇을 도모하는 것이 언제나 어렵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일시에 걷어쳐진 느낌이다. 동생은 오랫만에 아이없이 "어른세계"에 취해보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룽지를 많이 만들어오고, 다음 게스트들을 위해 그 누룽지를 놓고가는 손이 떨리는 것을 내가 봤다. 누룽지를 만들려면 몇시간이고 서서 했을 것이기에 아마도 아까와서 그 손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도로 보내지 않고, 나중에 온 게스트들과 아침식사로 누룽지밥을 만들어먹었다. "동생의 사랑"이라는 이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서 누룽지는 남겨졌어야 했다.


사랑은 많은 순간 음식으로 나타난다. 키치너에서 한국식품을 하는 사촌오빠가 등장할 때는 정말 우리들의 식탐을 꼭 채워주는 맛있는 음식들이 따라온다. 이민 초기에 흔했던 LA 갈비가 해가 갈수록 뜸해지더니, 구경못한지가 오래되었다. 갈비값이 오르고, 교민들의 주머니 사정이 악화되어 가서인지, 그런 큰 인심을 만나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번에 특별히 부탁했는데, 오빠가 그 LA 갈비와 다른 반찬들을 가지고 등장했다. 오빠가 오면 삽시간에 부엌이 풍성해지고, 웃음꽃이 핀다. 키치너에 사는 사람들은 행운아들이다. 오빠와 올케의 손맛은 그야말로 끝내주니 말이다. 둘째 루미와 신랑은 캠핑장에서의 갈비저녁이 평생 먹었던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었다면서 감사인사를 했다.


조앤언니가 캠핑장에서 먹을 우동을 준비해왔다. K언니 부부가 오는날, 나는 줌미팅을 했고, 언니가 손수 점심을 준비했다. 언니의 소박하고 담백한 성격처럼, 언니표 우동이 만들어졌다.

내가 준비했던 음식들은 순두부, 감자수제비, 삼겹살, 물만두, 김치찌개 등이었다. 콩국수도 준비해갔는데 보관을 잘못해서 약간 상한 느낌이 들어서 그건 먹지못했다. 밑반찬으론 오이지를 만들어 무쳐갔다. 계란 샌드위치도 만들고, 메밀부침개도 하고. 남편은 캠핑음식의 단순화를 해야한다고 매년 주장한다.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는데, 여러날을 지내야 하니 챙겨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K언니는 상추와 쌈장을 가져왔다. 빨간 손바닥만한 양상추였는데, 쌉쌀한 맛이 그만이었다. 홈메이드 잘만든 쌈장과 함께 김치찌개를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 두텁떡을 가져와서 함께 나눴다. 언니부부는 결혼 기념일을 우리와 함께 지냈다며, 잊지못할 날이 될것이라 말해줬다.

아 그리고 사위의 핫초코렛이 생각난다. 사위는 선선한 아침에 핫초코렛을 모닥불에 데워서 한잔씩 선사했다. 때때로 오슬오슬 추웠는데, 그럴때 먹는 핫초코렛은 잊을 수 없는 맛이다.

어쩌다보니 그야말로 사랑 파트에는 음식이야기가 들어갔다. 뭐 연구논문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이해하기로 하자. 음식은 사랑이라고.


남편, 루미와 트리스탄(사위)


헌신:

동생친구 부부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사실 애들 부부가 친구만나러 다른 마을에 간다고 했을때 비어있는 시간이 있어서 친구들이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박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시간을 보내자고 유혹을 했건만 통하지 않았다. 캠프 사이트가 우리들이 사는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랬는데 동생의 친구 카티지가 근처여서 동생에게 놀러오라고 했다는 말을 했다. 동생이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친구 부부를 캠프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런 돌발상황"을 엄청 즐긴다. 계획에 없던 일들, 선물이 되어 다가온다. 독일계 남편과 친구가 도착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스토리를 갖고 있는 크리스천이었다. 하나님 이야기로 함께 된 우리들은 신이났었다. 하고싶었던 말이 많았던 사람처럼 그간 있었던 여러가지 일들을 이야기해주는데, 정말 믿거나 말거나 그런 내용들이었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예전에 들었다면, 무슨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가, 할만한 캠프사이트 발 "새롭게 하소서" 이야기들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조기 은퇴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섬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가슴이 뛴다. 나는 어떤 은퇴의 길을 걷고싶은지, 가끔씩 생각한다. 내가 해야할 일, 할수 있는일이 나타나길 기도한다. 노인학대에 관한 강의를 들으니, 노인들을 돌보고싶기도 하고, 내 아이 또래의 젊은이들의 휘청임을 보면, 그애들을 위해 할일이 없을까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이번 캠핑에서 동생 친구 부부를 통해서 그런쪽으로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


K언니 부부에게서도 새롭게 하소서 2탄이라도 찍어야 할 것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지역사회에서 그들이 떠남에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표현했고, 지역신문에 소개되기까지 했으니, 한국인의 아름다운 은퇴모습이 되었을 것같다. 그분들이 아름다운 은퇴의 시간을 보내시기를 기원해본다.


이번 캠핑을 위해 가장 헌신한 사람은 남편이다. 여러 사람이 놀고있을 때 그는 가게에서 일하고, 문을 닫고 오면 저녁 9시가 된다. 함께 저녁을 먹고, 그 다음날 새벽이면 가야한다. 새벽 6시 19분에 일어났는데, 옆에 있을 줄 알았던 남편이 이미 떠난뒤여서 미안하면서 고마왔다. 일요일날 문을 닫았기 때문에 일찍 가서 준비할 것들이 많아서 빨리 갔노라고 했다. 용기를 내서 마지막날 7월1일 캐나다데이에 하루 더 문을 닫기로 했었는데, 오후 3시쯤 문을 열었다. 가게에 왔다 돌아가야 하는 손님들 생각에 캠프에서 돌아와서 그냥 집안에 있을 수는 없었다.


기쁨:

캠핑중에 둘째딸의 졸업식이 있었다. 올해 졸업식은 유튜브로 하게 됐다면서 그다지 기대할 필요없다는 게 아이의 말이었다. 남편이 있는데서 함께 참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화요일 저녁 (6월29일) 집에 돌아왔다. 언니가 동행했다. 남편의 한의원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참여했다.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 사돈네와 줌으로 만나 함께 건배를 했다. 둘째 시어머니는 딸에 대해서 덕담을 하고, 나는 사위에 대해서 덕담했는데, 그게 사실 진심이다. 둘째는 이번에 법대를 졸업했다. 졸업전에 "최우수 에세이 졸업생"이라는 소식과 "상위 9%안에 든다"는 편지를 학교측으로부터 받았다. 졸업모자만 학교에서 보내주었지만, 캠핑첫날 졸업선물로 사준 검은 드레스를 입으니, 졸업식 가운이 굳이 필요없이 예쁘다. 착하고 따뜻한 둘째가 좋은 변호사가 되길 기도한다. 이것이 우리 부부의 가장 큰 기쁨이라면 기쁨이었다. 이날을 위해 이모 두명과 함께 루미에게 주는 축하송을 녹음했다. 그리고 멘트까지 넣어서. 루미는 그 영상편지를 보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나는 루미와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아이가 가운데서 나와 남편의 팔짱을 낀 포즈로 찍었다. 이건 내가 한번 연출해보고 싶었던 그림이다.


학교 졸업식 유튜브에 제 이름이 나올때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졸업식은 딸의 이름을 듣고 바로 시청을 끝냈다.


오빠네 손자 두 아이와 함께 산책로를 걸었던 기억도 너무 좋다. 호기심이 많은 첫째 다온이는 배가 보이면

"저거 타고싶어"

"저거 우리게 아니어서 못타"

"왜 우리 게 아니야?"

"주인이 따로 있어."

"왜 주인이 따로 있어"

이렇게 끝이 없는 질문공세를 펼친다.

나중에

"네가 타고 싶으면 나중에 커서 배 항해하는 것 연습해야 해."

"빨리 커서 배타고 싶어."

이런 대화를 계속 나눴다.

낚시하는 사람들보면 낚시하고 싶다고 하고.

너무 하고싶은 것이 많은 꼬마 다온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걸었던 그 길이 생각난다. 있는 힘껏 돌을 던졌던 콜포이(colpoy) 호수에는 아이와 우리들이 던져넣은 돌 때문에 수면이 조금 높아졌으리라.


오빠의 두 손자 다온이 하온이


나는 캠프사이트와 연결된 트레일을 두번 걸었다. 한번은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했고, 나중에는 동생과 둘이 걸었다. 동생은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걸어야겠다고 했다. Bruce Trail의 한구간으로 우리가 묵었던 Wiaton Bluewater Park Camogroud에서 총 2시간이면 가능하다.


막내 동생 케이

그리고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꽤 된다. 트레일러에 화장실이 있지만, 넘버2(넘버1은 작은 놈이고..^^)는 화장실에 가서 하는 게 좋다. 스마트 워치로 걸음수를 보니 화장실 한번 갔다오는데 2천보가 된다. 캠프 사이트만 헤매고 다녀도 하루 1만보 걷기는 식은죽먹기다.

먼데로 화장실을 걸어다녔던 기억도 기쁨에 속한다. 가면서 다른 캠퍼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의 장비는 어떤지, 슬금슬금 훔쳐본다.

올해 우리집 장비는 훌륭했다. 텐트에서 애들이 자기도 했고, K언니 부부도 침낭만 가져와서 그곳에서 잤다. 나도 텐트에서 하룻밤 자다가 새벽에 트레일러로 옮기기도 했다. 두 사이트에 고작 세명이 잔날도 있었다. 조앤언니는 자신의 차안에 침대를 완벽하게 만들었다. 차문을 닫고 자도 되는 것을 실험을 통해 알게 된 언니는 자신의 차에서 자는 것이 매일 행복해보였다. 동생과 내가 아침산책을 하고 온날,  언니차를 노크하니, 차안에서 개기는 기쁨이 얼마나 좋았는지, 얼굴이 활짝 폈더랬다. 캐나다에 "차박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나도 다음에는 차에서 잠을 자고싶다. 언니는 캠핑을 정말 즐겼다. 몇달전 구입한 전동차는 다른 사람 도움이 없어도 혼자 움직일 수 있어서 다리가 불편한 언니에게 발이 되어주었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장애자 전용이 있어서 언니는 자주 전동차를 끌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올해 최고의 캠퍼는 조앤언니였다는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남편은 15년쯤 된 캠핑 트레일러 바닥이 움푹 들어간 데도 있고 해서 계속 끌탕하다가, 캠핑이 끝난후 바닥을 뜯어내고 있다. 자신이 한번 고쳐보겠다며.


남은 이야기:

작년에 캠핑갔던 때가 생각난다. 가기싫어하는 막내딸을 데리고 갔다가, 여러가지로 힘든 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부르지 않았다. 막내와 둘째는 냉전중이다. 화해의 물꼬가 언제 풀릴지 모르겠다. 막내의 방황의 끝이 화해의 시작일텐데, 이제 조금씩 그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 어쨋든 그랬기 때문에 올해 캠핑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이 주저되었다.

주저하는 내게 사위는 "매년 있는 가족캠핑 적극 찬성한다"며 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한국에 있는 큰딸은 캠핑을 함께 하지 못해서 몸살이었다. 모든 전 과정을 일일이 사진찍어서 보내라는 바람에 비에 축처진 트레일러 천막의 물을 쏟아내는 영상을 비롯해 이런저런 사진을 보내며 캠핑 기어를 올릴 수 있었다.


이제는 이런 행사를 매년 끊이지말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캠핑장에 들어서니, 흙과 물과 나무와 바람이 한가족으로 다가온다. 첫날 몸부림치며 쏟아지는 빗속에 있을 때는 과연 캠핑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는 다시 맑아졌다. 너무 가물었던 자연이었는지라, 땅속에서는 그 음료를 마심으로 잎들이 푸르러졌다. 심각했던 땅의 마름이 그 비로 해갈되었다. 그런 비가 오고 나니, 약간의 흐린 날씨도 그야말로 꽤 괜찮은 날씨가 되었다. 그 자연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마음이 열린다. 생각이 나오고 숨어있던 재능도 쏟아진다. 나도 소리를 꼬약꼬약 지르며 노래를 하기도 했다. 햇빛이 잘드는 텐트속에서 낮잠을 자고 싶었는데, 그걸 하지 못했다. 해의 강렬한 힘, 비와 캠핑, 흐림과 쌀쌀함, 땡볕더위등 모든 시간들이 함께했던 캠핑의 날들이었다.

나는 옆에서 루미 졸업식이 있는 화요일도 문을 닫으면 좋겠다는 둥, 철없는 소리를 했는데, 그런 잔소리에 맞장구도 쳐주며, 아무런 배달이 없는 일요일 하루를 문을 닫고, 휴일이었던 7월1일도 오후까지 문을 닫았던 남편의 결정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장사를 하는한, 누림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도 캠핑 전과정을 참여한 사람은 없었다. 나조차도 말이다. 들쑥날쑥 민주적인 캠핑이었다.


땔감으로 쓸 잔가지들을 모으는 딸과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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