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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Dec 29. 2021

내게 온 선물

폭풍 속의 가정을 읽고

마치 예비된 듯이 모든 것이 제때에 일어난 듯하다. 오늘 중점적으로 소개할 이 책을 만난 것도 그렇다.


"이 책은 단순히 가족 가치를 넘어서서 가족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분수령이 될 것이다. 가정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개념을 지양하고, 가정이 크나큰 기쁨의 원천이자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아픔의 원천일 수 있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는 가정을 압박하는 세속 문화의 힘에 저항해 안달하거나 안간힘을 쓰는 대신에, 십자가를 통해 가족을 바라보라고 초청한다. 가정은 성화가 이뤄지는 장이며, 거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비밀을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될 것이다."


러셀 무어가 쓴 "폭풍 속의 가정(The Storm Tossed Family)" 전자책 3페이지에 나오는 책 소개글이다. 이 책이 가진 힘을 잘 압축해 놓아서 옮긴다.


이 책의 제목 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이라는 작은 소제목이 붙어있다. 영어 원제목도 큰 글자 제목 밑에 "How the Cross Reshapes the Home.. 어떻게 십자가가 가정을 다시 만드는지"라고 붙어있다. 


이 책은 이방에 있는 독자님이 내게 권해준 책이다.(이 선물 정말 감사드립니다) 전자책으로 바로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이 가져온 놀라운 "효과(?)"에 나 자신이 더 놀라고 있다. 나는 책에서 많은 것을 배우긴 하지만, 이렇게 속속들이 나를 바꾸는 책을 만나니, 이를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며칠째 고민이다.


그리고 책을 일일이 훑기보다는 이 책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책은 너무나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어서 그것만 옮겨도 한 편의 글이 완성될 것이다.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축복의 원천이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공포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개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십자가도 그렇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죄의 무시무시한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 및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동시에 본다."

 

이 작가의 솔직함은 교리에 갇힌 나의 억압을 해방시켜주기도 했다. 가령 이런 글.


"아주 아일 때부터 핼러윈은 내게 따뜻함과 기쁨을 전해주었다. 어린 나는 어른들이 핼로윈이 '악마의 밤"이고 그날 밤 영의 세계와 우리 세계 사이의 베일이 얇아져서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내가 핼러윈에 대해 좋아하는 점이었다. 핼러윈은 내가 직관적으로 아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것은 바깥세상이 무섭다는 것이었다.

핼러윈은 또한 내가 성경에서 읽은 사실을 강화시켜 주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보이지 않는 힘들이 살아 활동하고, 그중에는 나를 해치려는 것들도 있다는 것이다. 핼러윈은 어른들도 그것을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밤 같았다. 어린 나에게도 타당해 보였다. 바깥세상에 무서운 존재들이 있다면, 하룻밤을 정해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이 글에서는 아이들과 내가 겪었던 핼러윈의 혼란을 상기하게 해 주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큼 핼러윈을 좋아할 수 없었던 엄마인 나는 어정쩡한 구경꾼이 되기도 하고, 괴기스러운 옷보다는 예쁜 옷을 고르라고 눈을 흘기며 종용하기도 했다.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이들을 붙잡아두지도 못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즐겨주지도 못했다. 물론 핼러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모범답안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그에 따라 대처하면 될 것이다. 


이 책은 가정이 모범적이어야 한다거나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은 아니다. 가정은 수치와 불편함과 실망뿐 아니라 더한 것들이 자리 잡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가정을 영적 전쟁의 장으로 본다. 어떤 사람은 평생 부모를 원망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탈 많은 자녀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부모도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이것을 복음 안에서 살피지 않으면 고난 그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 하신다고 하신다. 


"가족은 실로 대단하다. 그리고 가족은 또한 끔찍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분류하는 나름의 기준을 갖는다. 십자가는 우리가 아름다움과 깨짐, 정의와 자비, 평화와 진노를 가정에서 동시에 발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패턴은 십자가를 품은 영광이다. 그것은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의 삶에서도 사실이다."

 

찢기고 고문당하고, 사형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혼자셨다.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했고, 모든 믿는 자들의 맏형이 되셨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쩌면 수치와 고난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 고난을 통과하면서 주님께 의지할 때 새로운 생명에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나의 힘으로 가족을 건사시킬 수 없음을 알게 되는 날, 나의 통제권을 완전히 놓아버리게 되는 날,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심을 느끼게 됐다. 나의 경우에. 하나님의 힘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잘 느끼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도 하나님은 곁에 계셔서 돕고 계셨지만, 나는 그 도움을 전연 알지 못했었다.


"또한 가족은 우리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우리 안의 허식과 가면을 벗겨준다. 가족은 조만간 우리의 가족이 필요로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허상 앞에서 벌거벗겨지며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결국 우리의 민낯을 보게 될 것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십자가를 등에 질뿐 아니라, 칼이 우리 영혼을 찌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족을 통해서 나의 나됨을 자랑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된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상처와 고름은 되도록이면 직시하기를 거부한다. 당연히 곪고 터질 수 있다. 어려서부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젊은 가정을 보는 것은 내게 하나의 부러움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다른 고통들이 없을까? 우리는 이미 악이 만연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악이 들어오기도, 내가 악을 행하기도 한다. 그럴 때 주님이 섭리하심을 알고 있을 때 상황은 그대로지만 다른 태도로 문제를 보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건강한 가족을 지향하려면 우리 모두가 역기능 가족에 속한다는 사실과 씨름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아담의 가족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형제간의 살인부터, 태중에서부터 싸우는 에서와 야곱,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형제들의 악등 모든 것들이 나온다. 가정이 사이비 교단에서 자주 써먹는 "그늘이라곤 하나 없는 완벽히 행복한 그림의 가족"처럼 단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깨어짐이 가정 안에서 일어나고 서로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렇게 깨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니 말이다. 한때는 완벽해 보이는 가정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 때의 맹점은 그 모습에 취해 영적인 세계를 망각한다는 데 있다. 가정 안에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영적인 선물일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을 조금 더 들어보자.


"가족이라는 배경은 우리가 누구인지,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누가가 아닌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하거나 스스로를 유지시키는 신이 아니다. 거슬러 가면 과거로, 앞으로 가면 미래까지 당신과 나는 사람들이 거의 무한할 만큼 내렸던 연속적인 결정들의 산물이다... 만일 나의 할머니가 십 대 때 부모님의 소망을 저버리고 연상의 남자와 도망쳐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무도 우리 할머니처럼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지만(만일 우리 아이들이 그분처럼 했다면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존재해서 기쁘다."


이런 부분도 작가의 시점이 돋보인다. 우리는 신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지만, 어떤 자식은 첩에게서 나오고, 어떤 자식은 십 대 철없는 어미에게서 나오고, 어느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에, 그것을 감사하고 내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자꾸 물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내게 맡겨준 아이들을 주님의 뜻대로 키우고 있는지. 나 같은 경우에는 아이들로 인해 내가 주님께 나아가게 되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지는 오래되었으나,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겨우 몇년 정도 된 것 같다. 그것은 아이들로 인해서였다. 그리고 최근에 남편으로 인해서였다. 나의 기도가 필요한 내 가족들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건 작가가 꾸준히 강조해온 무엇이 먼저인가가 결정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가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필요했지만, 가족들이 하나님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칫 위험해 보이는 이런 말은 하나님은 그렇게 편협하거나 무엇이 부족한 분이 아니시며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가장 아름다운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자유를 얻게 되어 가족을 어느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가족을 움켜잡고 숨 막히게 하던 것을 놓게 되면, 그것이 현재의 가족에 대한 기대이든, 오래전 가족에 대한 향수든, 가족 안의 상처에 대한 흔적이든, 미래의 가족에 대한 걱정이든, 자유로운 가족이 되어 교회 가족이라는 새 피조물 안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과연 가족은 축복이다. 그러나 가족이 최우선이 아닐 때 축복이 된다."


이 책의 내용은 계속된다.

직접 읽어보라고 말하고 나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글의 내용을 훑고 있는데 이제 겨우 4분지 1을 다뤘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바뀐 부분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우선 남편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나에게 남편은 가장 만만했다. 아이들에게 전전긍긍하고,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필요를 돌보고,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함으로 나의 "나대는 마음"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며 살았다. 남편은 나를 이해해줘야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놨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것에 나 자신을 위한 것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모든 것들에 대한 그의 무한한 이해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볼 때는 이유가 안 되는 일에 딴지를 걸고, 나의 진심을 왜곡하고, 내가 가는 길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세상을 홀로 꾸려가야 하는가, 하는 위기감까지 들었었다.


"더 그렌"을 함께 걸으면서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서 의미 있는 한 가지를 해보자, 해서 매일 저녁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하루에 1과씩 읽기로 약속했었다. 다른 사람과 나누면서 좋았던 이 책을 남편과 꼭 같이 읽고 싶어서 한국 서점에 들러 번역서를 구해놓은 게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몇 번의 위기가 왔었다. 그런 날은 책 읽기를 지속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녁 먹고 매일 저녁 한 챕터씩 글을 돌아가며 읽었다. 함께 소감을 나누면 좋았겠지만, 굳이 그런 게 없어도 된다. 함께 다 읽고 손을 잡고 기도한다. 남편은 기도 속에 막내딸을 위한 기도를 꼭 포함하라고 주문하곤 했다. 막내에 대한 내용을 내가 잊고 말하지 않으면, 손을 눌러서 일깨워주기도 한다. 매일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가족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릭 워렌 목사의 책이 끝나고, 이젠 성경 읽기로 이어가고 있다. 우선 창세기를 같이 읽고 있다. 옛 성경 버전은 조금 이해하기에 난해해서 새번역으로 했는데, 훨씬 난 것 같다. 저녁시간 드라마 보는 시간을 없앤 것도 좋은 결정이었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가 쓴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The Good and Beautiful God"은 영어권 크리스천들과 북클럽에서 다뤘던 책이다. 이 책 또한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나의 무지를 깨뜨려 주었는지. 이런 책들이 나와 남편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고 새롭고 단단하게 세워나가게 한다. 


최근 그의 건강에 약간의 적신호가 켜지고, 우리 둘 다 멈칫하는 시간이 왔다. 우리 교회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가정교회"에 대한 약간의 비전을 갖게 되었다. 정말 순전한 마음과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누는 진실한 가정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닌가 하면서 말이다. 이 가정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생각하며 가정교회를 우리 둘이 세워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녁 준비를 정성을 들인다. 고지혈증 약을 처방받은 그의 의기소침에 같은 감정을 느끼며, "그래도 적당한 때에 경고"를 받았음에 감사하며, 식단을 많이 조정했다. 그리고 간헐적 단식을 한다며 오랫동안 아침을 먹지 않았던 나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된다. 어느 날부터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그때부터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늦잠 자는 것"을 자랑스레 말하던 내가 남편의 아침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나 자책하기도 했다. 평생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바꾸지 못할 줄 알았다. 이걸 고쳐야지 했던 것도 아닌데, 정말 최근에 일어난 일중에 또 하나의 불가사의한 일이다.


남편은 "내가 자신의 편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했다. 손님과 문제가 생겼을 때, 딜리버리 맨들과 불협화음이 날 때, 서류가 잘못됐을 때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묻는다. 


하나님이 오래전에 이 사람과 만나게 해 준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우연히 잘 만나거나, 잘못 만나거나 하는 것이 아닌, 이 만남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왔는가, 노력해왔는가가 심각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모든 일에 남편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속으로 생각하는 걸, 되도록이면 표현하려고 애쓴다. 아침을 항상 같이 먹고, 먹기 전에 기도한다. 하루를 한 마음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나의 달라짐이 먼저였는지, 그의 달라짐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책들과, 기도와, 음식이 우리를 치유했고,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지난 일요일에는 갑자기 전기가 나갔다. 함께 노닥거리다 보니,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갔다. 그래서 노트북을 들고 내려와, 함께 예배를 드릴까, 했더니 별다른 반대의사가 없었다. 이런 조그마한 사건에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고 믿는 "광신자"가 되어가고 있다.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서 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닐까, 그렇게 해석한다. 어쨌든 남편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지난주도 한번 더 그렇게 했다. 손님이 오면 받으면서 오피스에서 예배를 함께 드린다. 남편의 마음이 이 정도라도 풀어진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습관처럼 했던 일들, 행동들, 말들을 한번 더 점검하고,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를 보살피는 진정한 아내로 거듭나고 싶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남은 모든 관계에서 거듭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요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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