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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an 26. 2022

"리스크"를 안은 댓가

세미-은퇴는 쉽지않다

세미-은퇴라는 멋진 삶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 첫관문에서 휘청인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나가야 하나, 그런 고상한 고민을 해야 할 것같은데, 지금은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덜덜 떨고있다. 


리스크를 최대한 피해 살았던 우리가, 꽤 험악한 결정을 했다. 가게가 확실히 팔리기전에, 우선 이사갈 집을 계약해놓은 것이다. 모아놓은 다운페이 자금이 있어서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모게지"의 문턱이 어렵다더니,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아직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가게는 며칠후 결정이 나는데, 작자가 새롭게 "연장"해달라고 해서, 그건 안될 말이라고 되돌려보냈다. 며칠후에 다시 가게를 시장에 내놔야한다. 2달간이나 기간을 주었었는데 사는 사람이 이렇게 나오니, 맥이 빠진다. 


너무 쉽게 가게가 팔린다 생각했는데 큰 암초에 부딪친 셈이다. 집을 사고팔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사실 할일이 별로 없고, 기다리는 일이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지난번 리스팅에서는 3명의 바이어를 위해 집안청소를 했다.  2군데서 오퍼를 받았고, 그중 2번째 사람과 계약이 되었다. "잠재적 바이어"가 총 3번 이상 집을 다시 보기 원해서 공개를 해줬다. 그들은 가게 경영에 큰 관심이 없고, 이층에 더 많은 방을 만들어 렌트할 생각이 있어보인다. 그리고 1층에도 비어있는 공간에 아파트를 만들 계획으로 건설업자를 데려와 꼼꼼히 점검했다. 건축물 허가 때문에 자치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서 그들의 결정이 늦어져서 조금 더 시간을 줬으면 한다는 전갈이다. 보통 계약서를 내고, 일반집들은 10일안에 조건해제를 해야 한다. 살수 있는지, 없는지 알려줘야 하는 것이다. 우리 가게 같은 경우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긴 시간을 줬는데 다시 연장해달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줄 수가 없다.


내가 가게를 보는 동안에 낯선 사람이 와서 "너희 가게 판다고 들었는데, 내가 살 생각이 있다"며 말을 걸었다. 나는 아직 조건해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안될 수도 있으니, 그때 연락해달라 했다. 그는 자신의 부동산업자를 통해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우리쪽 부동산업자는 이 와중에 쿠바로 놀러갔다. 그에 따르면 2명의 잠재고객이 있다고 했다. 나 자신을 보면서도 짐작하게 되지만, 이런 큰 거래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자주 바뀌는지 아는 바라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수가 없다. 동네 부동산업자에게 리스팅을 했는데, 사실 가게가 딸린 건물은 토론토 한인 부동산업자에게 내야 더 활발히 거래가 성사될 수도 있다. 안면이 있고, 매주 가게에 들리고, 또 우리집에서 일했던 메리 아줌마의 아들이어서 못미더워도 그에게 맡겼는데, 조금씩 원망하는 마음도 든다. 외국에 갔다오면 또 며칠간 격리해야 할텐데, 내 급한 마음은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예민해진다)


이런 와중이니, 이사짐을 싸지도 못하겠고,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던 우리들이 떠난다는 소식이 동네 사람들에게 들리고, 많은 인사를 받게 된다. "보고싶을 거야" "너희에게는 잘된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좀 서운하다" 이런 말들을 하면, "응, 아직 모든 게 결정된 건 아니야. 아직 집이 팔리지 않았어. 조금 더 지켜봐야 해" 하고 대답하는 얼빠진 나자신을 보게 된다.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그날 모게지 심사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을 받고, 한국에 있는 큰딸을 빼고는 모두가 모여서 축배를 들었다. 근 1년여만에 만나는 두 딸은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그야말로 기쁨의 순간들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 모든 것이 왔구나, 하면서 큰 감사함을 느꼈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다시 모게지센터에서 마지막 과정에서 꼬투리를 잡고, 모게지 계약서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private mortgage로 다시 한계단 뛰었다. 이율은 더 높아지고, 이것저것 심사는 더 까다로와지고. 모든 재정상태가 샅샅이 드러나고, 담당자는 렌더(빌려주는 회사)가 물어보는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묻고, 어떤 물음은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은행 담당자는 더이상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렌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우리를 자꾸 코너로 모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그 담당자와는 더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오랫동안 거래해왔던 은행이라, 그동안의 신용으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수입이 높지않은 자영업자의 고충과 일을 할 나이가 아니라 은퇴할 나이쯤 되니, 은행에서 찬밥대접인가 싶어 서운하다.


몇주전에는 조카가 소식을 듣고 은행에서 일하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집에 찾아왔다. 우리의 사정을 듣더니 좋은 조언을 해줬다. 은행의 생리에 대해서, 월급자를 좋아하고 안전한 곳에 투자하기를 좋아하는 은행과, 개인이 가진 자산을 전체적으로 고려하고 다른 자산이 있으면 수입이 많지않아도 돈을 빌려주는 은행이 있다는 말이 도움이 되었다. 


움추려들었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그동안 자문을 받았던 예전에 알고지냈던 한국인 부로커에게  우리 일을 맡겼다. 고소득 월급자가 아닌 이상, 모게지 받기가 까다롭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어떻게들 집들을 팔고 사는지 대단해보인다. 


부동산이 광적으로 오르고, 모게지 얻기가 너무나 힘들고,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겪고있다. 참으로 "돈"이 엮인 일만큼 하기힘든 이야기가 없지만 사람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은행에서 돈나오기를 기다리는 이 심정은 그야말로 살면서 겪고싶지 않은 경험이다.


이 일을 지나면서 엄마를 생각했다. 어린 자식들 공부시키려면, 새학기면 언제나 돈이 궁해 돈을 빌릴 수 있는 사촌언니네 옷가게를 찾아가 말할 기회를 엿보며 하루종일 옷정리 하다보면, 사촌언니가 "얼마나 필요해서 그래?" 그렇게 물어줬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렇게 고마웠었다고. 엄마는 매일 일수를 찍었고, 그것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떳떳해보이지 않았다. 계주에게 언제나 굽신거렸던 것만 같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에게 앞번호를 줘서 타게 해서, 애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게 했던 당시의 엄마 친구분들이 은인이라고 하셨다. "계집애들 학교보내서 뭐해, 그만해"하고 핀잔했던 친구는 덤으로 서운하게 기억하신다.


막판에는 누군가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것 아냐? 하면서 혼자 으스스 몸을 떨어보기도 했다. 내가 과연 그 일을 할 수는 있을까?  나와 남편의 자랑은 "그동안 가까운 사람들에게 손벌리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손"을 벌렸지만,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금융기관이었기에 언제나 고개를 들고 살았다. 그런 교만까지도 철저히 깨져야 하는 지점까지 왔다.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사람들의 몇 장면이 떠오른다. 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말했을지, 그럴때 받지 않아도 될만큼 거저 주었을지언정, 돈을 빌려주지 않았던 우리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나름 "영악한 원칙"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돈에 목을 메달고 있으니, 그들의 아픔이 이제서 제대로 보인다. 은행 모게지가 안되면, 프라이빗 모게지로 가면 된다고 보고있다. 한두푼이 아니니, 누군가에게 빌려달라고 할만한 액수도 아니다. 그전에 가게가 잘 팔려서 문제가 해결된다면 기쁘기 한량없겠다.


가장 취약했던 것들을 모조리 지나고 있다. 숫자, 계약, 협상, 위험부담, 돈 등등.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모든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내게 온 시련이라고 본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것이 잘 진행되어 집팔기, 이사하기라는 큰 숙제가 해결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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