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었네
여행의 경험이 많다고도 적다고도 말할 수 없으나, 여행지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현지인들과 소통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이 안통하는 곳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어권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쉽지않다. 여행을 같이 간 동행자들과의 인간관계가 거진 다가 된다. 작게 스쳐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나눈 기억은 부풀려져서 기억창고에 저장된다.
지난번 글에서 만났던 할머니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기억이 나는 만남들이 있다.
그 첫만남을 기억한다. 남편은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고, 나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그날도 김치를 담갔던 것 같다. "새롭게 하소서" 방송을 틀어놓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그날은 피아니스트 김지영 목사가 나왔다. 그분이 경영하는 카페가 있다는 이야기가 귀에 꽂혔다. 전망좋은 카페에 가서 커피마시며 글쓰고 싶다,가 위시 리스트에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마무리를 하고,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김지영 목사가 경영하는 카페는 삼청로에 있었다. 정말 쾌청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백팩에 컴퓨터와 책, 노트를 챙기고 길을 나섰다.
삼청로에 있는 카페 "보드레 안다미로"로 찾아가는 길은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을 지나 계속 나아갔다. 아름드리 나무가 많은 그 길은 운치가 있다. 돌아나올 때는 몇정거장 걸어보리가 생각해본다.
글을 쓰면서 보드레 안다미로의 뜻을 찾는데, 꽤 오래 검색해야 했다. "보드레"는 부드러운, 안다미로는 "그릇에 넘치도록 많이"라는 뜻을 가진 순우리말이다. 이 카페에 대한 리뷰를 찾는중에, 카페 입구에도 이 글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보드레 안다미로"를 외국어로 생각했을 때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는데, 좀 나아질 것같다 .
이 카페는 복합문화공간을 꿈꾸며 설계되었고, 새롭게 하소서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곳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한다 하였다. 음악회 전시회 등이 수시로 열리고, 특별히 배우들이 이 공간을 자주 방문하는데, 그 내용은 그 목사님의 인터뷰에 나온다.
어쨋든 나의 홀로 여행코스로 이 삼청동 "부드러운 것이 가득찬 공간인, 보드레 안다미로"로 정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그곳에 가니, 일하는 젊은 여성 한사람이 보인다. 그분은 "2층에 자리가 있을까, 모르겠네요" 했다. 1층도 꽉 찬 느낌은 나지 않았는데, 그건 테이블이 띄엄띄엄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일단 2층에 올라갔다. 2층도 공간에 비해서 테이블이 느슨하게 배치되어 있고, 그랜드 피아노가 한 장소를 차지하고 있었다. 4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어서 일단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매끈하게 꾸며진 카페라기 보다는 손을 보다 만 것 같이, 땜질한 시멘트도 보이고, 좋게 말하면 선이 굵은 인테리어를 한듯싶다.
한참 있어도 누구도 주문받으러 오지 않았다. 사람들을 보니, 손님들이 직접 자신이 먹을 음료와 디저트를 들고 나르는 것 같다. 아, 내가 직접 가야 하는구나, 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커피를 시키고 만들어지길 기다리는데, 모녀 사이로 보이는 두사람이 카페로 들어왔다. 아까 그 점원은 다시 그들에게 말한다. 아마도 자리가 없을 거에요, 라고. 낭패한 표정을 짓는 그 둘을 쳐다보다가,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제가 2층 4인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합석해도 될것 같네요. 그리고 나는 2층으로 올라왔다. 조금 후에 두사람이 자신들이 주문한 음료를 들고 올라왔다. 찬송가 음율이 마음을 데워준다. 나는 자리를 비켜주며 두사람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려고 했는데, 자연스럽게 서로 소개를 하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캐나다 교민이라고 인사를 하자마자, 더욱 자리가 부드러워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자리를 함께 했던 그분의 딸이 캐나다에서 6개월간 선교훈련을 받았다고 했다. 말을 트고보니, 꽤 많은 공통점이 찾아졌다. 그분의 신앙여정과 딸로 인해 남편과 아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된 이야기가 흥미로왔다. 딸은 앞으로 다시한번 캐나다에 가고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그분도 김지영 목사의 인터뷰를 듣고, 딸의 비번에 이곳을 방문했는데, 자리가 없어서 실망했었다는 말까지. 그분이 살고있다는 일산에 언젠가 가게 되면, 그분이 다니는 교회(예수인)를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카페 투어를 함께 한 신앙이 좋은 새댁(최근에 결혼했다고)을 보니, 대견했다. 젊은날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은 쉽지 않기에 더욱 소중하게 생각된다. 어쩌면 다시 사용하지 않을 연락처를 주고받기까지 했다.
나는 그분을 통해서 1층에 있는 젊은 여성이 인터뷰에 나왔던 그 목사님이란 걸 알게 됐다. 너무 젊어보여서, 아르바이트 학생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떠나가려다가, 사장님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여 조금 더 이야기를 하게 됐다. 자신이 사장인줄 알아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사장이 일꾼처럼 일하는 가게가 많지 않다면서. 새롭게 하소서에 카페 이름을 밝히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 인터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일을 못할 정도로 전화도 많이 온다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 진정이 되리라. 사장님은 다시한번 찾아오라고 말해줬는데,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왔다. 목사님이 꿈꾸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마음이 아픈자들이 찾아와 위로를 얻는 곳으로 계속 잘 성장하길 바래본다.
또하나의 만남은 여수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하기전에, 서두에 밝힐 일이 있다. 우리가 이사한 오웬 사운드는 인구 2만명의 소도시이다. 남편과 거의 매일 동네를 산책했다. 그날도 호숫가를 향하여 가고 있었는데, 그로서리 마켓앞, 주차장과 붙어있는 인도에 한 여성이 쓰러져있다. 오후 4시경쯤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를 스쳐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냥 잠을 자는듯했지만, 맨바닥이었고,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저사람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편은 여자 혼자 누워있어선지, 그냥 가고 싶어했지만, 나보고 가보라고 했다. 그쪽으로 다가가는데, 다른 두명의 여인들이 그 여인에게 말을 시킨다. 당신 괜찮은가? 누구 불러줄까? 라면서. 그녀는 눈을 부시시 뜨고, 잠시 멍한듯 있다가 고개를 흔든다. 다른 사람 한명이 차에서 물을 하나 갖다주자, 그걸 받아들고 일어나 걷기 시작한다.
남편의 짐작대로 대낮에 약에 취한 여자였던 것같다. 호숫가 아름다운 마을에 거리에서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고, 제대로 차려입지 않고 흐느적거리는 청년들도 있다. 호숫가 벤취에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기도 하다.
그날 남편과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대한 못마땅함이 있었을 터이고, 또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겠어서 마음이 뒤숭숭했을 것이다. 나도 잠시 서성였지만, 사실상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무방비이긴 마찬가지이다.
작은 마을에 살때는 그렇게 자주 보던 장면은 아니다. 도시라고 나와보니, 이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우리의 산책에의 열정이 많이 가라앉게 된다. 곳곳에 대마초 지정 판매점이 눈에 띄이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청년들이 있고, 캐나다가 갖고있는 이 어두움은 짙게 이나라를 드리우고 있다.
여수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여수 거북선 공원에서의 일이다. 복잡한 찻길에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오신다. 당신의 자전거에 실린 가방 하나가 찻길에 떨어진다. 남편은 바로 가방을 집으러 달러가고, 나와 몇사람은 할아버지를 불러세웠다. 할아버지는 여러 사람이 제지하자, 자전거를 세우면서 내려서다가 길에 좀 세게 엎어지셨다. 남편은 주워온 가방을 내려놓고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워드렸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한것 같았다. 괜찮으시다며,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려는 할아버지를 만류해서 광장 벤취쪽으로 인도했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한쪽편에 앉히고, 차가운 음료수를 사다 드렸다. 아무래도 좀 취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할아버지 자전거에 낚시대와 가방을 잘 묶어주었다. 할아버지를 도왔던 사람들이 거의 없어지고, 우리만 곁에 남았다. 할아버지는 친구들이 자신에게 술을 권했다며, 껄껄거렸다. 자전거 타기에도 조금 연세가 있어보였고, 게다가 취기에 운전까지 했으니, 너무 위험했다.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했다. 자식들이 성공한 이야기, 손자들 자랑 끝이 없으시다. 다만 최근에 세상을 떠난 아내 때문에 마음이 아프시다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남편을 본다. 오웬사운드에서 주지못했던 쓰러진 자에 대한 미안했던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 이번 여행은 남편의 치유여행이 되어가는 것같았다.
태백 예수원 방문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을 만났다. 예수원은 안수현 의사 책에서 보고 알았다. 기도원에 가보자고 했던 것도 남편이었고, 그대신 템플 스테이도 해보자고 했다. 나는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지만, 어떤 기도원이 좋을까 생각하긴 했다. 템플 스테이는 남편이 찾아보게 될 것이다.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웃하는 남편의 신심인지라, 나는 최선을 다하자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기도원에 간다고 마음먹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예수원은 일반적인 기도원은 아니었다. 태백산 깊은 곳에 위치해있어서 방문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수도원의 느낌이 더난다고 해야할까?
이곳에서는 하루 3번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소침묵과 대침묵의 시간도 있다. 소침묵은 아주 필요한 말만 할수 있으며, 대침묵 시간은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실내 기도실은 항상 열려있지만, 소리는 내면 안된다. 기도를 원하는 것을 노트에 적고, 조용히 기도하게 되어있다. 소리내어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야외기도처에서 할수 있다. 우리가 갔던 그때, 약간 축축하고 추웠다. 태백은 아마도 날씨가 다른 곳과 다른것만 같았다. 예배당과 손님방이 있는 큰 건물이 있고, 도서실과 손님방등이 있는 또다른 건물이 있다. 손님방은 방바닥에서 요를 펴고 자게 되어있다. 화장실은 모두 공동 사용하게 되어 있고, 심지어 샴푸등은 환경에 해로우므로 되도록이면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했다. 모두 2박 3일 일정으로 방문하게 되므로, 고양이 세수만 하고, 머리감는 것도 거의 건너뛰었다.
새벽 6시 예배, 정오 예배, 저녁 예배가 있으며 원하는 사람은 노동에 참여할 수 있다. 나는 하루 부엌 노동을 같이 했다. 찌든 때까지 대여섯명의 여인들이 모여 함께 도우면서 일했다. 남편은 장작나르기, 자르기등 바깥일을 도왔다.
예배도 조금 달랐다. 누군가 긴 설교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느낀 것을 함께 나누게 했다. 어떤 때는 침묵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길게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깊이있는 나눔으로 이어졌다.
예수원에는 상주하는 사람과, 상주하기를 원해서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 그리고 우리처럼 방문자가 있는 것같았다.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했던 한분은 예수원의 상주원(회원)이 되는데 7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강요하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그런 공동체였다. 몇가지 규율을 정해놓고, 자주 어기게 되면 퇴실명령을 받을 수 있다. 금연 금주를 못해서 세상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도 있고, 온가족이 이곳 생활을 하는 가족도 보였다.
예수원에서 가장 좋았던 것중에 하나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티룸이 있어서 때때로 자유시간을 즐길 수 있었는데, 각자가 이곳에 오게 된 동기등 삶을 나누었다. 그중 장애우가 된 동생, 아픈 아빠, 사랑받지 못한 어머니를 가진 아가씨가 하나님을 만나고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의 간증을 들으니, 참으로 이쁘고 고마왔다. 그녀는 나의 기도제목을 자세히 적어서 갔다. 어디가나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고. 그녀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보기도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찬양팀에 속해있다고 들었는데, 마지막날 찬양예배에서 그녀의 고운 찬양을 들을 수 있었다. 찬양사역에 힘을 실어달라고 기도하는 중인 것 같았다.
예수원에서의 식사는 아주 간결했고, 남는 음식이 없을 정도였다. 남는 음식은 그 다음 찬으로 올라왔다. 소박한 하루 세끼 음식, 국 밥 김치, 나물 하나, 요리 한가지(떡볶기는 내가 제일 좋아한 메뉴였다) 등으로 이뤄졌다.
이렇게 2박3일을 지내고 나면, 어떤 헌금이나 회비를 강요받지 않는다. 마음이 가는대로 헌금함에 넣어놓으면 된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을 예수원의 일상은, 이세상과 같지않으면서도, 또 이세상처럼 욕심과 싸움이 있기도 하다고 그곳에 속해있는 사람들이 말해줬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뭔가 선한 일을 위해 싸우는 이들같아 보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야외를 많이 돌아다니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도시보다 10도는 내려가 있어서 방바닥이 미지근한 것이 그리 좋았다.
아하, 글을 끝내려하니 또한사람의 그녀가 떠오른다. 호주에서 온 간호사였던 그녀. 남편의 기침소리가 좋지않다고, 내게 깊은 염려를 나눠줬다. 남편의 건강에 조금씩 적신호가 오나, 생각할 때여서 귀기울여 들었다. 호주에서 함께 나온 친구와 둘이 참여했었다.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줬던 그녀는 장기휴가를 받아서 1년간 엄마와 지내려고 왔다고 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났다. 이렇게라도 기록해놓지 않으면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