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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Mar 09. 2024

내게 과분한 환경

알맹이를 찾아야 하는데

작은 쿠션이 놓인 의자에 앉아서 글쓰기 창을 열었다. 쿠션이라 중간이 약간 불룩하니, 방석의 기능으론 적합하지 않은 것을 느끼지만, 가끔씩 신세지는 의자여서 그냥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신경쓰여 위층을 갔더니 조금 나은 방석이 눈에 띈다. 그것을 가져다 의자에 깔고 다시 앉았다.


최근에는 꿈꾸던 거실의 소파도 새로 구입했다. "가구"는 절대로 사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지만, 텔레비전을 볼때 다리를 뻗고 앉아서 보고싶었다. 그리고 보다가 피곤해지면, 눕기도 하고싶었다. 우리집의 소파는 3인용 의자가 없고, 2인이 앉는 러브소파가 가장 큰 것이라, 누워야할 때 다리를 쭉 펼수가 없어서 엄청 불편했다. 다만, 이사오면서 많은 가구를 버리느라 고생했기에 더 이상 덩치가 큰 것들은 사들이지 말자고 굳게 다짐했는데, 그것이 올가미가 되어서 남편을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다.


어느날 아침 마당에 떨어진 선전뭉치중에서 가구점의 "마지막 세일"이라는 큰 글자에 꽂혀서 훑어보다가 더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 소파문제를 이야기했다. 그저 한번 가보자, 마음에 안들면 안사면 되지. 50% 이상 세일한다니, 한번 쇼핑해보자 하고 나서기까지, 최대한 고분고분 나긋나긋 했던 것같다. 꼭 사야겠다는 마음을 접었더니, 일이 잘 풀렸다.


그리고 함께 갔는데, 첫 입구에 사진에서 점찍었던 그 소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역자 소파로 한쪽이 다리를 펴고 앉을 수 있는 구조였다. 소파도 크지않고, 나지막하니 내가 찾던 것에 가까웠다. 한바퀴 돌면서 다른 소파도 앉아보고 했지만, 가격과 소파의 생김새 모두가 맘에 들었던 것은 매장 입구에 놓였던 그것이었다. 그렇게 "가족"이라 불리는 가구를 집에 들였다.


이 소파는 텔레비전 볼때 뿐 아니라, 작은 앉은뱅이 책상을 펴놓으면 책도 읽을 수 있어서 다용도로 사용이 가능하다. 나는 이 소파에 앉아서 글한편 완성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다행히 남편도 마음에 들어한다.


기역자 소파, 아주 저렴하게 마련했다.


이렇게 환경을 하나씩 바꾸면서 드는 생각은, 바로 "내용물"에 대한 것이다. 글쓰는 방도 생겼고, 거실에서도 글쓰기가 가능해졌고, 노트북을 들고와서 식탁에 앉아서 글을 써도 되는데, 무엇을 써야할 것인가가 잡히지 않는다.


삶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는 것을 알긴 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서,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됐고, 둘만의 살림살이도 남편이 많은 것을 해주니, 나의 일이 전폭적으로 줄었고,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파트타임이면서 집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단순한 일이라 나의 시간이 참으로 많아졌는데, 막상 그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조금 공기가 훈훈한 1층 거실과 부엌 테이블이 좋아보여서 그곳으로 책과 노트북을 가지고 가기도 하고, 어느곳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이 좋은가, 그런 것만 생각한다. 남편이 집에 없을때, 혹은 잠잘때 글을 썼었지만, 남편이 뭘하든, 있든 없든 내 시간으로 쓸수 있는데도 그것이 좀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그건 나의 조바심으로 그를 혼자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일뿐,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무엇을 하든 내 시간을 배려해주고 있다고 말해도 된다. 아마도 드러내놓고, "나 글좀 쓰겠어" 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글쓰는 사람" 행세를 할 주제가 되는 것이 부담이 되었던 것이지. 그렇게 되면, 무언가 보여줄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니 말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왜 이리 글이 안쓰여지나 더 나열해보자. 원래 글을 썼던 데스크톱이 있는 공부방의 내 책상, 위치가 안좋은가 방을 휘휘 둘러본다. 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생각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해가 보이는 쪽으로, 밖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쪽으로 옮겨야 하나 싶기도 하다.  흠 책상의자도 사실은 마음에 안든다.^^ 이렇게 의자도 바꾸고, 책상위치도 바꾸면 나아질까, 결국 알맹이에 걸려 넘어질 것을 안다.


지난 1월부터 영어 크리스천 북을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을 하고 있는데, 남는 시간 대부분을 책 읽는데 할애하곤 했다. 영어가 달리는 점도 있지만, 내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제대로 내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불치병이 있기에 글을 내게서 떠나보내면 안될텐데, 나의 글에 대한 태도에 문제가 있다. 절실함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쓰면 되고. 누가 뭐라는 사람없으니 마음이 흘러 넘칠때까지 기다리면 되고. 글이 내것이 되기 어렵다면, 어느날 소문없이 타자치기를 멈추면 된다, 이런 무책임함도 갖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MAID(청소부)라는 미국 드라마를 봤다. 싱글맘이 청소부로 일하면서 고군분투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녀는 작가지망생인데, 장학금을 준다는 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하고, 아이와 생존을 위해 처절히 노력한다. 알코올중독 남편, 망상증 환자 엄마, 폭력남편이던 아빠, 새로운 인간관계속에서 부대끼고 남편의 감정적인 폭력으로  쉘터에 두번 입소하게 되고 그녀의 삶은 바람잘날이 없다. 예전에 합격했던 대학에 재지원하여 장학생으로 가게되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녀는 싱글맘으로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것이 보통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300개의 변기를 닦아야 했고, 수많은 상처에서 살아남은 것은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사해주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남의 책상에서 간신히 타이핑한 글을 송고하고, 이메일도 타인의 디바이스를 이용해서 체크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 와중에도 자신이 일하는 내용을 글로 써내는 그녀에게 내게 있는 이 환경을 나눠줄 수 있다면 싶었다. 그녀는 분명 거절했겠지만 말이다. 드라마에서 처음엔 "싹수없는 고객이었던 변호사"가 그런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거절"하고 쉘터로 다시 입주하는 걸 보면서 자신의 일은 자신이 개척해나간다는 불굴의 독립투사 이미지를 그녀에게서 본다. 그 드라마에서 놀라왔던 장면은 본인의 각박한 생활속에서도 아이에게는 "큰 소리 한번 안지르는 사랑스러운 엄마" 역할을 했던 주인공 알렉스의 모습이다. 나는 아이들을 그렇게 대했나 계면쩍었다.


드라마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내 환경이 내게 너무 과분해졌다. 이 과분한 환경에 나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진다. 그것이 꼭 글쓰는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한다. 글을 읽는 것도 될 수 있고, 봄이 오고 있으니 정원을 가꾸는 것이 될수도 있고, 공부를 다시 해보는 것이 될수도 있겠다고. 내게 있어서 알맹이는 무엇인지, 그걸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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