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버킷 리스트의 나라
어깨가 꾸부정한 노인이 기우뚱거리며 병원에서 주로 쓰는 워커에 의지해 한발 한발 물가로 다가간다. 처음부터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아니다. 야자수 나무로 엮인 초가지붕처럼 생긴 비치 우산 아래, 세상 편한 비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날씨가 그리 덥지 않아서 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비치의자에 누워 독서삼매경에 빠져있거나, 선탠을 하거나, 또 흥이 있는 사람들은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그런 사람이 많은 날이었다. 나는 노인이 왜 워커를 밀며 물쪽으로 가는지 의아해서 계속 관찰하게 됐다. 드디어 물에 워커가 먼저 닿았고, 노인은 조금 더 워커를 물속으로 들이민다. 쿠바에 왔으니 바닷물을 만지고싶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잘 걷는 사람에게는 가까운 거리지만, 노인에게는 물까지 가는 것도 큰 도전으로 보였다.
물에 가까이 다가간 노인은 워커를 물속 한 군데에 단단하게 고정시켜 놓는듯했다. 그러더니 몸을 빼기 시작해서 나는 노인이 중심을 잡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노인"이라고 지칭하고 보니, 그녀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수가 없다. 이제는 노인이라고 하지 말고 늙은 그녀라고 하자. 내가 보기엔 70대말이나 80대로 보였기에 말이다.
늙은 그녀는 물에 깊숙이 들어가더니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바뀌는 것 같았다. 지상에서 뒤뚱거리던 늙은 그녀가 아니라, 오래된 친구를 만난듯 물속을 자유자재로 헤엄치는데, 유연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수영을 나는 입을 벌리고 바라본다. 한동안 물속에 있어서 가라앉는 것 아니야, 홀로 조바심치다가 그녀의 고개가 올라오면, 한숨을 쉰다. 자신의 워커가 고정되어 있는 그 바닷물 근처에서 더 깊이 들어가서 그녀가 할수 있는 모든 종류의 수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 그래 내가 어렵게 이 물에 들어왔구나, 이렇게라도 너와 만나고 싶었어, 하는 그녀 마음의 소리가 들리고 만족한 미소의 표정이 떠오른다. 한동안 그녀의 수영을 지켜봤다. 그런데 나의 걱정은 계속되었다. 그녀가 물에서 나올때 워커를 의지해 중심을 잃지 않고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인가가 말이다. 그녀에게 관심두는 사람들이 없는지, 일행이 없는지 휘둘러봤다. 한참 후에 같이 온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것을 보게 됐다.
조금 안심하고 다시 그녀에게 집중했다. 사실 달리 할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올림픽의 수영선수를 지켜보듯, 그녀의 아름다운 수영실력에 감탄에 감탄을 하면서. 그녀가 물밖으로 나올때까지 관람하고 싶었으나, 점심먹으러 가자고 일어서는 아이들과 함께 아쉽게 그녀를 바다에 두고 먼저 떠나야했다. 잘 걷지 못하는 불쌍한 노인에서 올림픽보다 더 집중하고 봤던 수영선수가 된 그녀를 본 것은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하는 나의 좁은 시야를 깨는 최고의 장면이었다.
비치에서 아이들은 수영도 했지만, 독서를 꽤 많이 했다. 둘째는 물감을 가져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막내와 나는 해변을 따라 멀리 걷기도 했다. 비치에는 시가를 사겠냐는 쿠바인들이 많았고, 과자 봉지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소라껍데기를 파는 사람등, 호시탐탐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물건을 팔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올때쯤 되니, 그 해변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안면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대부분 스패니쉬를 하기에 영어를 하는 우리들과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둘째부부는 쿠바인과 한참 이야기하더니, 그에게 남은 물건을 주기로 했다고 한다. 나름대로 절박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가져온 것중 골라서 주겠다면서 숙소로 가서, 물건을 가지고 나와 주기도 했다. 우리는 소라를 팔려고 다니던 사람에게 남편이 쓰고있던 모자를 벗어주었다.
리조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자주 팁을 주곤 했는데, 그 작은 돈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 같다. 1달러 미화가 있다면서 5달러 짜리로 바꿔주기를 원해서 호텔 청소부, 웨이트리스에게 돈을 바꿔주기도 했다.
식당에서 많은 서비스를 받으면, 내가 대표로 2불에서 3불을 놓으면, 사위가 또 그만큼 테이블에 올려놓아서 더 풍성해졌다. 어떤 때는 막내까지도 팁에 합세해 꽤 많은 팁이 놓이면, 그들의 얼굴이 기쁨이 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둘째는 서비스를 잘 받았다고 생각하면 직접 그에게로 가서 팁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그들의 서비스는 한이 없어서 그런 대접을 언제 받아봤나 싶다.
음식은 중하쯤 되었다 할까? 매일 새롭게 구운듯한 빵과 옥수수, 소고기 등을 좋아했다. 갑상산 기능항진증에 시달리는 막내는 무척 많이 먹고, 매일 세끼 빠지지 않고 가서 식사를 했으니 모두 몸무게가 3kg쯤은 는 것 같다. 식당은 새들이 날아들어오는 막히지 않은 건물이었으며, 한 두어번은 식당 앞 야외에 차려진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리조트는 오래 되어서 손볼곳이 많았다. 물자가 부족해서 인지 유지 보수가 어려워보였다. 오래전에 지어졌기에 해변과 가깝고, 최적의 위치고 동선이 길지 않아서 그것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새로 지어진 리조트는 건물은 깨끗하지만, 비치가 멀고 입지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리조트 온 마을이 고즈넉해지는 해질녘이 되면 나는 해변가로 가곤 했다. 또 어떤 때는 리조트 앞쪽으로 조금 걷기도 한다. 앞뒤로 물이 있는 작은 띠같은 반도 모양의 트리니다드 리조트의 밤이 슬며시 찾아온다.
저녁식사후에는 카페에서 게임을 하곤 했다. 아이들이 가져온 카드로 함께 즐겼는데, 나는 원래 게임에 능한 편인데, 이번에는 한번도 이겨보지 못해서 지금도 분하다. 우노 게임과 유커(Euchre), 치트(cheat) 카드 게임등이었다. 유커는 편을 짜서 하는 것인데, 간신히 배웠는데 다시 하라면 또 배워야 할것 같다. 우노 게임은 같은 숫자, 같은 그림등의 카드를 빼내는 것으로 비교적 쉽다. 치트 게임도 거짓말을 능숙하게 하는 게임으로 많이 웃을 수 있는 게임이었다. 그외에 또 한가지 도미노 게임이라는 걸 했다.
도미노 게임을 이야기하기 전에 당구와 탁구대가 있었는데, 라켓등을 보관서에서 빌려와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게임하는 걸 보다가 사위가 그걸 빌려와서 같이 쳤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잡아보는 당구대였다. 헛손질은 보통이고, 현란한 내 솜씨에 모두 헛웃음을 켜야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곁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 적극적으로 참견해서 조금 심하다 생각했는데, 당구를 좋아하는 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즐기고 그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 다음날 식사후 일찍 당구를 시작했다. 그 당구대 곁에 한 청년이 작은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다. 나중에 당구대 옆으로 온 막내에게 참여기회를 주려고 하니, 그 청년과 게임을 한다고 그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역시나 당구를 좋아하는 씩씩한 아줌마팀이 나타나서 당구대와 공을 넘겨주고 막내가 하는 테이블 곁으로 갔다.
숫자맞추기 게임인데, 도미노식으로 마작같이 생긴 점이 박힌 정사각형 두개가 모인 길쭉한 패를 가지고 하는 놀이이다. 자기 패를 일렬로 세워놓고, 숫자에 맞춰 하나씩 내려놓는다. 맞는 숫자가 없을때 패스하고, 마지막에 가장 작은 숫자의 패를 보유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은 막내와 청년이 시작하다가, 스웨덴에서 온 한 여성이 합류했다. 게임 테이블을 준비한 그 청년과 잘 아는듯 보였는데, 스웨덴에서 왔다는 그녀에 의하면 그 청년은 자신들의 여행가이드겸 운전사란다. 그녀의 남편과 일행이 왔다가 왁자하니 없어졌고, 우리 가족과 그녀가 함께 게임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버킷 리스트"에 쿠바가 있어서 여행중이라고 했다. 태도가 미국인도 캐나다인도 아닌, 뭐랄까 조금 향기가 달랐다는 생각이다.
이 가이드는 아주 즐겁게 도미노 게임을 우리들과 하면서 나중에 자신이 그 게임기를 가지고 있으니 사도 된다고 말했다. 둘째는 그 게임박스를 그 청년에게서 샀다. 아무도 없는 곳에 탁자를 펴고, 도미노 패를 늘어놓으며 손님(?)을 기다리던 그의 책상에는 우리 가족들과 스웨덴에서 온 사람이 게임을 하고 그 일행들이 둘러서서 게임을 구경하는 등, 나쁘게 말하면 장삿속이 있는 청년이었고, 좋게 말하면 여행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준 괜찮은 청년이었다.
그러다보면 야외 무대에서 공연이 열린다. 둘째날인가. 우리도 그 공연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는데 즐길만했다. 특별히 댄스가 멋졌다.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의 빠른 춤사위가 잠자고 있는 느긋한 세포를 깨우는 느낌이었다. 저렇게 몸을 움직이며 살면 정말 신나겠구나, 무대에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을까, 뭐 그런 생각들을 했다. 공연이 끝나갈 때, 사회자가 나와서 앞에 앉아 있던 둘째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캐나다라고 하자, 그는 캐나다에서 온 사람 손들라고 하더니, 모두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렇게 하여 모두 무대위로 오르게 했다. 빠른 음악을 틀고, 옆에 앞에 있는 댄서들을 보면서 함께 춤을 추자고 했다. 내곁에는 예쁜 여자무용수가 있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알려줬다. 몸을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기회를 갖게 되어 기뻤다. 그 다음날도 공연이 있었지만 거의 비슷한 레파토리인 것 같아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직도 그 무용수의 아리따운 얼굴이 생각나고 그날밤 풀장옆 무대와 그 무대뒤 매일 세차례 들렀던 레스토랑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자기전 밤하늘을 보러 바닷가로 갔다. 그 아름다운 장관이라니. 둘째의 아이폰으로 그 장면이 조금은 담겼다. 별자리는 찾지 못했지만, 그런 별이 쿠바에는 매일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