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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Jun 18. 2020

등산화와 땀냄새의 기록

와일드 책 리뷰 .. 셰릴 스트레이드

책을 읽는 것은 모르던 또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일이다. 

이번에 만난 세상은 "야성"의 완성을 보여준다. 셰릴 스트레이드가 적은 "와일드(Wild)"에서는 땀냄새가 배어나오는 것 같다. 지친 그녀의 숨소리와,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야성의 동물들의 눈빛이 책 곳곳에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셰릴과 오가면서 마주치는 "트레일에 목숨건 사람"들을 보면서 그런 세상도 있구나, 충격이 인다. 

어쩔수 없이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작당해서 그 고생의 길로 빠진다. 어떤 고생인가 잠시 살펴보자. 

셰릴이 걸었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은 미서부 남부 멕시코 국경 근처에서 출발하여, 캐나다 브리티쉬 콜럼비아 주까지 이어지는 4285km의 트레일이다. 그 트레일은 여름에 걷더라도 사막의 기후와, 한겨울 눈폭풍까지를 경험할 수 있는 지반을 골고루 통과해야 하는 하이킹 코스이다. 물론 PCT의 일정 부분을 걷는 것은 일반인들이 할수 있는 일이겠지만, 전 구간을 작정하고 도보로 통과하는 "바보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셰릴은 시에라 네바다산이 눈으로 길이 막혀 우회하기도 하면서 트레일의 거의 끝인 "신들의 다리"까지 무사히 도보여행을 마쳤다. 

셰릴의 책은 소설이 아니다. 26살 실명의 여인이 장정들도 혀를 내두르는 엄청난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3개월간 한발 한발 걸은 경험의 기록이다. 그냥 다큐멘타리라고 하기에는 그녀의 삶이 너무 소설같아서 상상력을 발휘해 덧붙인 것은 아닌가 싶기까지도 하다. 그만큼 실감이 난다.  

셰릴이 도보여행을 계획한 동기를 찾기 위해서 그녀가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자. 45살이던 엄마의 죽음, 불륜, 이혼, 마약, 가족의 헤어짐등 현실적으로 상처투성이의 삶의 끝자락에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끝없는 걷기"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을 무렵 둘다 대학생이었다. 딸은 영문학과 여성학을, 대학졸업장이 꿈이었던 엄마는 역사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4학년생들이었다. 엄마라기 보다는 가장 가까운 친구같았던 엄마가 학교를 끝마치지 못하고 폐암 말기 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절규하며 엄마의 병치료에 모든 것을 바치지만 결국 엄마는 세상을 떠난다. 그런 다음 새아빠였던 에디도 떠나고 동생과 언니도 가족관계에서 이탈하려고만 한다. 그녀는 22살 젊은 나이에 한꺼번에 불어닥친 불행으로 말미암아, 마약도 하고, 다른 남자와 자기도 하면서 19살때 결혼했던 남편을 배신하기도 한다. 

그녀는 뭔가 변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장거리 도보여행을 계획한 표면적인 이유들이다. 그러나 도보여행이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배낭 하나에 살아야 할 것을 모두 담아야 한다. 중간중간 물자를 보충하는 것도 계획해야 하고, 삼개월 살아야 할것을 철저히 계산해야 한다. 

그녀는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나 준비가 미비했는지 바로 알아챈다. 발은 첫날부터 부르트고, 부풀어올랐고, 가방을 한번 매려면, 온 힘을 써야 하고, 뒤로 나자빠지기도 하는등, 메고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무게인 가방을 짊어지고 지척거리며 걸었다. 

걷는 길에서는 하루동안 단한명의 사람 모습도 볼수 없기도 하지만, 걷다가 지체해서 뒤에서 오는 사람들과 만나기도 한다.  

셰릴의 이야기는 어쩌면 혹독한 자기시련과 훈련의 기록으로는 의미가 있겠지만, 일반 사람들이 읽기엔 지루해질 수도 있는 소재다. 그러나 셰릴의 문장력과 사람들에 대한 묘사, 발톱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장면마다에서의 기록은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우울함 그 자체로 시작해서, 그녀의 근육이 단단해지고, 위기상황 대처능력도 갖게 되는 등, 겨우 삼개월간이지만, 획기적인 삶의 재구성을 목도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독자는 그녀를 따라 글자행군을 하면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생각을 하고, 트레일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무슨 일인지를 편히 앉아서 읽는다. 그녀가 갈망하는 맛난 먹을 것, 푹신한 침대, 따뜻한 샤워실이 갖춰진 집에서, 보송보송 마른 편안한 복장을 하고 말이다. 그렇다. 독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곳 가정에서 외로움과 배고픔과 두려움에 지친 한 여성의 기록을 읽고있다. 같이 아파하고, 동정하지만 그녀의 고통이 커갈수록, 독자들의 독서희열은 배로 뛰지 않을까 싶다. 

셰릴의 책이 소설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녀의 배낭이 무거워 여행전문가가 배낭정리를 해준다. 필요한 것만 남겨놓고 가차없이 필요없는 것들은 치워버리는. 배낭안에는 콘돔 한뭉치가 들어있다. 길에서 만난 그 여행전문가는 콘돔을 들어올리며 "이게 필요해요?" 묻고는 필요없는 물건들 속에 던져넣는다. 12개쯤이었다지? 그녀는 버려진 그 콘돔중에서 하나만 건져내어 바지 뒷주머니에 넣는다. 이 사건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콘돔까지도 버려야할 정도로 먼지 하나의 무게까지도 신경써야 하는 그 배낭싸기를 통해 본, 장기 도보여행의 어려움과, 트레일하는 중에도 벌어질지 모르는 섹스를 위해 콘돔을 집어넣은 셰릴이라는 여자의 정체(?)다.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도보여행과 섹스.. 셰릴이 남편과 이혼한 것도, 모르는 남자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단다. 그리고 도보여행중 셰릴은 환상적인 "섹스" 경험도 하게 된다. 셰릴을 통해 볼수 있는 "성"에 대한 개방성이 이 사회에 만연된 것이 아닌가 또 흠칫한다. 물론 이런 것들은 셰릴의 마음방황을 증명해주는 단서들이 되기도 한다. 여행이 끝나고 그녀는 앞으로의 삶은 달라지리라는 예감을 받는다. 

어쨋거나 논픽션에서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다 내려적었다는 것이 큰 놀라움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리화나를 아이들이 있는 데서 피우고, 셰릴도 폐인처럼 남자친구와 마리화나를 흡연하던 시기가 있었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아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마리화나의 세상인 것도 이책을 통해서 다시한번 깨닫게 된다. 

그녀가 걸었던 퍼시틱 크레스트 트레일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이어 있다. 그녀는 오르막만 있는 곳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내리막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내리막은 올라갈때 생각하면 처음에는 천국같지만 나중에는 형벌처럼 느껴져서 다시 오르고 싶어진다고 말한다. 트레일의 전 구간이 인생과 같이 구비지고 내려가면 올라가야 하고,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 그 길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이를 종합해 "스웨터를 짰다 풀었다 끝없이 반복하는,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일이었다"(393쪽)고 고백한다. 

그녀가 트레일을 하면서 만나는 상황들, 사건들, 짐승들 그 모두 하나하나가 건강한 이야깃거리가 된다. 코요테나, 방울뱀, 곰등의 야생동물들과 조우할때, 알몸으로 잠든 바위위에서 온몸에 달라붙은 청개구리들, 겁탈의 위험까지 느껴야했던 사냥꾼 두 사람과의 만남... 트레일을 도는 다른 팀들과의 만남과 우정등 모든 것들 위에 그녀가 살아온 범상치 않았던 어린시절까지 책은 소설보다 더한 재미를 선사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절정"을 여러번 느꼈다. 온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그런 희열을 절정이라 표현한다면 말이다. 책과 있는 시간들이 거의 그런 시간들이었다. 두꺼운 550페이지의 책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아껴가며 읽었음에도 아주 쉽게 끝이 났다. 술술 읽히는 책들은 페이지 숫자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셰릴 스트레이드는 현재 재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잘살고 있다. 여행을 다녀온지 10여년쯤 지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 같다. 여행이 그녀 안에서 옷을 입고 세상밖으로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일 게다. 대단한 문장력과 흡인력, 그리고 거침없이 쏟아낸 진솔한 이야기들이다.  

내가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현실을 자꾸 회피하는 것같은 그녀의 언니였다거나, 함께 마약을 한 조라는 남자,  어릴때 그녀를 폭행하고 떠난 그녀의 친부라거나... 혹은 여행중에서 만난 사람중 하나이거나. 

내가 그들의 입장이 안되어봐서 모르겠지만, 용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책에서 그들을 비하하고 싶었던 건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살아질 때가 있는 법이다. 셰릴도 자신을 다 내어놓았듯이, 셰릴의 지인들은 셰릴이 그려내는 필체의 정직함을 기대서 그녀를 응원할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을 쓰는 건 가끔은 그런 일일지 모른다. 후벼파내는 일이다. 그냥 덮어두고, 세상에 속해서 그냥저냥 살다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든 뭐든 후벼파내보면, 왜 그래야 했고, 어떻게 치유가 되어야 하는지 그때서 보일 것이다.  

셰릴은 이제 논픽션으로 문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소설가로의 역량이 차고 넘쳐보인다. 논픽션에 허구가 들어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그렇다면 좀 허무할 것 같긴 하다-그녀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해져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어보인다. 

나이아가라에서부터 토버모리까지 이어지는 부루스 트레일이라는 하이킹 코스가 있다. 총 800km의 긴 거리이다. 평생이 걸려도 전구간을 섭렵할수 없겠구나, 생각했는데,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에 비하면 25% 정도니 그 위용이 처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걸어서 이 구간을 걷는다는 것은 보통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도보여행을 꿈꾼다면 가까운 부루스 트레일부터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길도 종주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셰릴이 말했듯이 장거리 도보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은 몇년간 준비한다고 한다. 어쩌면 필생의 꿈으로 간직하고 이루려 애를 쓰는 사람들도 많다. 겨우 "와일드" 이 책을 한권 읽고 이렇게 무모한 도전을 하지는 못하지만, 걷기가 은근히 나를 끈다.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약식도보여행을 한번 시도하면 어떨까, 그런 오만한 생각을 잠시 가져본다.  10개의 발톱중 6개의 발톱을 트레일에 헌정하고온 셰릴 때문에 허약한 중년아줌마가 야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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