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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Sep 19. 2020

"복받은 죽음"이란게 있을까

잠자듯 집에서 떠난 시어머님


파마를 하고있던 중이었다.  지난 1월 한국에서 파마를 한뒤, 머리를 손질하지 않아서, 축 늘어진 어중간한 길이의 헤어스타일이어서 다루기가 힘들었다. 묶기도 했다가, 풀기도 했다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큰 맘먹고 동생 가게에 예약을 했다. 


계획은 파마를 마치고 나서는 토론토 엄마집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스마트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큰언니를 도와주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또한 오랜만에 토론토 친구도 만나기로 되어있어서 보따리 보따리 다 싸서 집을 나선 길이었다.


그랬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한번도 듣지못한 음성 톤이 끼어있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왔어." 무언가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을 아주 조금씩 집어서 한번 휘감는 그 파마는 정교한 수놓기마냥, 하염없이 이뤄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 나는 파마중인데. 파마끝나고 집으로 갈께." "그럴 필요없어. 토론토 가기로 했으니 갔다와" 그는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스스로의 감정을 잘 읽지못해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만약 내가 남편이라면,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남편마저 특별하지 않은 일로 집에 없고 나를 혼자 내버려둔다면 나는 괜찮을 것인가, 생각하니 답이 나왔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남편은 벌건 눈으로 나를 맞았다. 남편이 원하면 한국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쉽지 않으리라는 건 짐작이 됐다. 내가 집에 없는 동안 남편은 인터넷을 통해 방문할 수 있는지 알아봤는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고있었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어 한국을 방문하려면 비자를 내야 한다. 비자를 내기 위해선 우선 사망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고 한국에 가서는 1주일간 있을 수 있지만, 캐나다로 돌아와서 다시 2주간 격리해야 한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슬픔에 빠진 한국 가족에게 증명서를 끊어 보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고,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도 그 다음의 문제였다. 3일안에 가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가는 것이 필요한 일인지, 그리고 비행기 여행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니, 가족들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님이 위중하시다면 가서 뵈올수 있겠지만 이미 돌아가신 다음이니, 한국 가족들 모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남편의 미국친구 한명도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며, 요즘같은 시기에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니라고 잘 결정하라고 조언해줬다. 그렇게 한국행은 포기해야만 했다.


어머님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못했던 일이었다. 큰 지병이 없이 언제나 조용히 지내셨기 때문에 어떤 기미도 느낄 수 없었다. 그즈음해서 "힘이 없다"는 말씀을 하셔서 시동생과 "수액"을 맞으러 가기로 했는데, 마침 가기로 한날, 바람과 비가 심해 그 다음에 가자고 말했다는데, 병원가기로 한 그날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것도 마치 잠자는 포즈로 발견되어서, 그야말로 "주무시다가 가신 자연사"를 어머님이 자손들에게 선물로 남기고 가셨다.


자식들은 회한도 많지만, 어머님의 조용한 운명은 많은 위로를 준다. 시어머님보다 10살이 많은 친정엄마는 "그렇게 복받은 죽음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하니 말이다.


시동생이 들어놓은 상조보험이 있어서 무리없이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고, 남편의 미국친구는 미국에서부터 화환을 식장에 보낸 것을 사진에서 볼 수 있었다. 어머님이 사시던 도시에서 장례와 화장, 유골함 모시기까지 매끄럽게 진행되는 광경을 카톡메세지, 사진으로 전해받았다. 마침 큰딸이 한국에 있어서 아빠 대신, 함께 발인을 참석해주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어머님을 모시고 산 시동생은 최고 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어머님에게 상냥한 아들이 되지 못했다며, 3일내 자지않고 울기만 했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남편은 2년전 한국을 방문하고 왔다. 그때 어머니집에서 머물면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어머님과 함께 커피샵에서 커피를 두어잔이나 들이켜면서 긴 시간 함께 대화를 나눴다는 것이 가장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 같다. 카페를 처음 방문해보신 어머님, 아들과 달콤한 도넛을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을 다시 찾아내어 가족방에서 함께 나눴다. 


나 역시 지난 1월 한국방문때 어머님을 두번 뵙고왔다. 한번은 큰딸과 방문했는데, 구정이어서 어머니는 한상 차려놓고 우리를 대접했다. 남들이 하는 며느리 의무를 강제하지 않으셨고, 시어머니의 권세를 주장하지 않으셨다. 나는 캐나다산 며느리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어머니와 관계를 맺었다. 오랜 청소일로 말미암아 허리가 굽으셨었다. 그래도 투정하지 않으시고 지내셨던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 깊은 마음속 이야기를 들을 시간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만 같아 죄송할뿐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초청을 했었다. 큰 아들곁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우리의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알게 됐다. 오로지 큰아들 가족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어머니 입장에서 엄청 답답하셨던 것 같다. 어린 세 자매를 키우는 이곳에서 적응하느라 고생하시다가, 한국에 돌아가신다고 하셨다. 그때는 나도 너무 어렸고, 어머님은 자신의 삶은 없고 손주들만 봐줘야 하는 생활에서 서로 삐걱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어머님을 보내드리고, 나는 시집에 미운털이 박힌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게 뭐라는 가족들은 없었다. 어머님이 나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쨋든 그 마음들이 감사했다. 어머님 칠순잔치때 캐나다에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한국 시이모 이모부와 함께. 그때 우리 친정식구들과 시댁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좋은 시간을 가졌었다. 


어머님은 참으로 조용한 분이시다. 당신의 아픔을 내보이며 아우성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시다. 오죽하면 남편의 이모님이 "언니는 어떻게 한마디도 먼저 하는법이 없어. 뭐가 불편하지, 어떤 심정인지 알길이 없어. 먼저 묻기 전에는. 아직도 실감이 안나. 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하면서 우신다고 한다.


사랑받던 아내였던 어머님은 아버님을 사고로 떠나보내시고, 자식들은 흩어지고, 신산하고 고단한 삶을 사셨다. 그러나 70 중반까지 일하시면서 용돈을 버셨고, 가까운 친구들과는 평생의 인연을 맺고사셨다. 지난 구정때 뵈었을 때는 어머님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받은 사랑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가시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집 둘째는 작년 결혼하기전 한국을 방문, 할머니를 만났다. 자신의 신랑과 함께 보았는데, 손을 꼭잡고 놓지않던 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아빠에게 할머니에 대한 추모글을 이렇게 남겼다.(영어로 쓴 글을 내가 옮겨보았다)



사랑하는 할머니
할머니께서 이세상을 떠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요. 이 일이 감작스럽게 일어나서 숨이막혀 오네요.
우리는 많은 만남을 갖지는 않았지만 저는 할머니를 가깝게 느낍니다.
제가 할머니를 만나는 특권을 누릴때면 할머니는 제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그건 사랑받고 있다는 가슴벅찬 충만함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손주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자연스럽고 풍부하며 조건없는 그것이었습니다.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하진 않았으나 할머니의 몸짓, 눈빛, 그리고 표현은 언어가 할수 있는 것보다 더한 의미를 전달했지요.
할머니 지난 83년간 많은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셨으나 저희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며 용기를 선사하셨습니다. 
할머니 당신은 내게 너무도 중요한 사람, 제 아빠를 훌륭히 키워주셨습니다. 저는 할머니께 많은 빚을 지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할머니께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작년에 한국에 나가 할머니를 뵈었던 것은 제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또한 제 남편을 인사시켜 드려서 얼마나 다행인지요.
함께 보낼 더 많은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네요. 평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할머니.
가신 그곳은 평화롭고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할아버님을 뵙고 있지 않을까요. 그곳 파라다이스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할머니는 그런 것을 바랄 자격이 넘칩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자넷 리송, 송루미 올림


남편은 한국에 가진 못하지만, 카톡, 전화등으로 한국 가족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가족들과 마음을 나눴다. 그간 소원했던 관계들을 반성하고, 형제자매의 정을 나눠야 한다고 모두 마음을 모으는 듯하였다. 어머님의 장례식이 끝나면서 그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남편의 친구들이 연락을 해오고, 이리저리 소식을 들은 사람들에게서 마음 깊은 곳에서 보내는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본인들과 아픈 부모님들이 겪는 어려움을 들려주어, 그안에서 위로의 메세지를 주는 분들께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 


이제는 많은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느낀다. 그 강하고 살벌한 시간들을 모두들 잘 견뎌내야 할것이다. 이 죽음에는 나를 포함한 당사자의 죽음도 염두에 둬야 한다. 언젠가 떠나야 할 이 세상 소풍길, 어머님조차도 당신의 마지막이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리라는 것을 모르셨을테니, 하고싶은 것, 하고싶은 말등을 미뤄놓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주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느낀 것은 "효도"는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후회하지 않게 될때니까. 그러나 만약에 그런 회한이 남는다면, 그것 또한 부모님이 준 마지막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을 거름삼아 남은 인생을 잘 꾸려나가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외국에 나와산다는 것은 "불효를 각오하는 일"이라면서 마음을 추스리고 있는 남편이 언제든 슬퍼할 수 있게 그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언제고 울고싶으면 울라고, 그렇게 넌지시 일러주고 있는중이다.


남편은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다음, 자꾸 일을 만들어서 한다. 벌써 보름 이상이 흘러서, 그의 마음도 안정되어 가는데, 무언가 생각없이 일하는 것이 좋은지,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나씩 하고 있다. 페인트칠하기를 며칠째 꾸준히 하고 있고, 그러더니만 엊저녁에는 입에 물집이 잡혔노라 했다. 


만약에 친정엄마가 돌아가신다면, 나는 남편처럼 이렇게 잘 견뎌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생각만 해도 힘든데, 의연하게 가족들 위로하면서 추억을 나누면서 어머님을 평안히 보내드리는 남편이 대단하고 대단하게 생각된다. 나는 남편에게 배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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