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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

by mindy Mar 08. 2021

C.S. 루이스를 만나다

"고통의 문제"를 통해서 발견한 것들 (1)

주님

C.S. 루이스를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책 "고통의 문제"를 고통속에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어서

지적 수준이 이렇게 떨어지는가 너무 놀라워서 고통스러웠구요

그 다음에는 그안에 깃들은 그 아름다운 영혼의 예리한 파헤침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신도지만, 믿는 것에 대한 모든 의문을 차례차례 해결해나가는 진지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라는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가 말했듯이 단순하지 않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선, 피조물 등등 풀어야 하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자의식"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하나님이 피조물의 사회에 개입하여 이리저리 결과를 바꾸거나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피조물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주는 세상"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C.S. Lewis의 책을 토론한다고 했을때, 브런치를 만나게 되면서, 눈길을 잡는 그 구절,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이라 말한 그를 알게 된다는 즐거움이 한편으론 있었다. 많은 문학작품을 쓴 그가, 기독교 서적의 저자라는 사실도 흥미로왔다. 나는 집에 있는 또다른 루이스의 책 "예리한 기쁨"을 다시 한번 훑었는데,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아, 2권중 고르는 막판 선택에서는 루이스의 책에 투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그의 책으로 낙착되었다.


인터넷으로 영어판을 주문했는데, 책이 배달되어 왔을때, 그 가벼움(무게)에 놀랐다. 이 정도면 읽을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한게 큰 착각이라고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선 첫문장에서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첫페이지에 나오는 작가의 말부터. 읽으면서 매번 걸려넘어지는 것은 문장 전체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처음 접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래도 내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한국판을 굳이 사야 하나 했던 데서, 그걸 사서 대조하며 읽으면 될것이라 자만했다.  한국판은 이북으로 주문했다. 그때부터 긴 여정에 들어갔다. 첫 모임이 있었던 1월 16일부터 마지막 모임이 있었던 오늘까지, 적어도 내 흰머리카락은 1.5배 증가했다. 한국판조차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한국판 번역은 다른 누가 했더라도 더 잘할 수는 없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번역자 이종태님에게 감사드린다)


적어도 책읽는 "기술" 만큼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다. "고통의 문제"는 내가 접하던 그 어떤 문장과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주문했던 영역본은 한 기독교 출판사가 저작권 없는 고전들을 출판하고 있는 중인지, 검은 것은 글자요, 흰것은 종이같이, 단락조차 나누지 않아서 읽고 있는 단어 하나씩을 짚어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읽던 부분을 놓치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책은 내것과 달라서 페이지를 말할때마다 나는 그 문장 찾기를 포기하곤 했다. 책 두께가 얇았던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다.


혹 영어판을 사야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적어놓기로 하자. 출판사는 "CrossReach Publications" 며 아마존 (Manufactured by Amazon)에서 구입했다. 절대로 이 출판사의 책은 사지말라는 당부에서다. 출판사를 알아보고 샀어야 했는데, 나의 부주의함이 이번 책 구입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냥 글자를 박아넣은 이런 책을 왜 만들었는지, 정말 "상욕"을 한번 날려주고 싶을 정도이다. 한국어판의 도움을 받더라도, 토론은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원문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그 고통에 대해서 여러분께 호소하는 중이다.


엔간한 책은 읽을 수 있다는 오만함이 깨진 계기가 되었을뿐 아니라,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마땅히 생각하고 고민했을 문제들을 제대로 질문 한번 가져보지 못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면서, 나의 "정체성"에 혼돈을 갖게 됐다.


과연 나는 크리스천인가?


책은, 1장부터 10장으로 이뤄져있다.

서론,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선함, 인간의 악함, 인간의 타락, 인간의 고통1, 인간의 고통2, 지옥, 동물의 고통, 천국으로 나뉜다.


12명의 여인들 모두 어렵다는 데 동의했다. 은퇴전 간호사로 일하고, 현재는 은퇴한 목사를 남편으로 둔 딕시까지, 나의 "지적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말했으니, 그 부분에서 우리 모두 위로를 찾긴 했다. 처음에는 모두 이책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매주 회를 거듭할 수록, 루이스를 통해 이끌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책을 끝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주제 자체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세상에 내가 왜 나왔는지, 이 식탁에 앉아서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글을 쓰면서까지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나의 "고통"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그런 것들에 대한 탐구라고 하면 조금 이해가 될까?


이 모든 것들을 깊게 설명하지 못해서, 단순한 크리스천들은 "믿음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의 앞날도 모르면서 말이다. 그리고 수많은 교리가 생겨나고, 그 한 교리에 집착하게 되는 각 그룹들은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믿는 교리만 연구하여, 다른 것들이 비비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자신에게 속한 교인들을 세뇌시키는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아닌가 싶다.


그간 믿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의 설명들이 많았다. 우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해서 아주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잘못 사용한 그 자유의지 때문에 죄안에 빠져들게 되었고, 현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그리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고통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신다는 것이다. 고통의 수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고통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교리에 대해서 -루이스가 말한 것중에서 설명하려고 해도- 말하려고만 하면, 진리는 어디론가 가버린다. 생경한 문장들만 남는다. 나는 아직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말할 주제가 안된다는 것 같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선함에서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좋은 방향과 하나님의 선함"은 같은 방향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사탄의 왕이지, 하나님이라고 할수 없다면서.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안으로 끌어들이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내게는 큰 의미가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받아들이기까지 겪어야 하는 수많은 시련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고통에 어떤 대답을 하는가는 그 사람의 문제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번 그런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말이다.


특별한 일이 없이 편안했던 기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배경처럼 크리스천이라는 망또도 두르고 있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모든 것이 뿌연 안개에 쌓여버린 것을 알게 됐다. 편안하다고 생각했던 그때도 눈에 보이지 않았을뿐, 병은 곪고 있었다. 이제서 하나님과의 진지한 나눔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런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반쪽짜리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늦게 왔으나, 그럼에도 내게도 선물로 보내어진 그것에 감사할 마음이 생긴다.


위에서 언급한 간호사였던 딕시 여사(연세가 70중반쯤 되어보이신다)는 간호경험 속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치료도 늦어진다고 말해주셨다. "고통"은 치료해야 한다는 신호라면서 말이다. 가까이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언니를 봐도, "아픔"에 조금 더 민감했다면 "암"의 발견이 그리 늦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어쨋든 주님께서 내게 고통을 주신 이유가, 네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던 그 상황이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신호였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고통을 통해서 다시 일어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도 많다. TED 스피커들의 스토리들도, 그안에서 그들이 발견한 보물같은 인생의 여정들을 쏟아낸다. 그래도 "고통"은 피하고 싶지만 말이다.


루이스가 다룬 "동물의 고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른 신학자들이 언급하지 않는, 동물도 천국에 가는가 하는 문제여서 어찌 접근하나 궁금했다. 어렸을 때 개에게 두어번 공격을 당한 이후로는 개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렇고 그런 내용일 수 있으나, 동물 애호가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내용이 될 것 같았다.


루이스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성이 되듯이, 동물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동물도 사실상 타락되어진 상태로 살게 되었을 것이라 가정하면서, 주인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주인이 천국에 가게 된다면, 그 주인과 감각적인 정을 나눴던 동물도 주인이 있는 곳에 있지않을까, 그렇게 이야기한다. 루이스의 글을 접한후 동물 주인들에게 경외감이 느껴진다. 


개를 산책시키는 한 주인은 내가 걷는 모습을 먼데서 볼 때마다, 길 한편에 비켜서서 개의 목줄을 짧게 잡고 기다려준다. 요즘은 산책로 옆으로는 눈이 쌓인 미끄런 언덕이어서, 늙은 그녀가 개를 데리고 그밑에 내려가는 모습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녀를 향한 고마움은 언제나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주인밑에서 자라나는 개들은 아무래도 그 성정이 다를 것으로 느껴진다. 어쨋든 동물과 사람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고 한 루이스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런 동물을 자연에 그대로 놔두면, 더러운 것들을 집어먹고, 아무나 물어대는 야생동물이 되고마는 것 아닌가.


루이스는 많은 신화에 관심을 가졌다고 나온다. 많은 그의 언어에서 전통 기독교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그의 놀라운 상상력으로 기독교의 질문들을 풀어낸다. 


루이스의 책에서 가슴을 울렸던 것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나와의 개별적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으신 목적에 나를 항복시키는 일이다. 이렇게 타락전의 나의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고통이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되어있다.


가슴을 울리는 구절들도 많았다. 그런 것 중에 몇개를 올리기로 한다. 사실 루이스의 글은 앞글을 읽어야 뒷글이 이해되고, 또 그 뒷글이 따라올 내용을 뒷받침하기에 따로 떼어서 적는 것이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내 아둔한 글솜씨로 제대로 전할 수 없어서 이 방법을 차용해본다.


루이스의 책을 인용하기 전에, 처음에 같이 시작하던 여인들이 그동안 이런 저런 고통에 노출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아예 빠져나간 사람까지 있는걸 보면, 삶은 누구에게나 선뜻선뜻 불편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회원의 시어머님 죽음을 함께 지켜봤고, 나의 언니의 암발병 소식도 함께 나눴으며, 정신적인 고통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한 젊은 여인의 고백도 함께 했다. 


마지막 날에는 거의 간증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해도 우리들의 북클럽은 성공했다 싶다. 나는 당분간, "교회 안나가는 교인"이 되기로 했다. 이 책을 읽기전에 결정한 것이지만, 내 결정을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마음을 열어놓고,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고, 다른 교회 목사의 설교, 신앙인의 간증, 친구와의 대화, 그리고 책읽기까지 그런 모든 신앙의 여정을 걸어보려 한다. 이렇게 교회나가지 않는 교인들을 "가나안('안나가'를 뒤집어서) 성도"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그 어느때보다 더 풍성히 하나님과의 만남을 꿈꾸고, 마음이 가는 설교를 듣는다. 이 북클럽이 내게 준 선물중에 하나는, 영어설교가 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동생네 교회 영어예배를 온라인으로 참여한지는 한참되었다. 그걸 계기로 어느날 새벽에 일어나서는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의 설교를 들어봤다. 그 목사에 대한 비판만을 듣고, 기독교의 이단아로 취급해온지 20여년 이상이 되어가는데, 그런 편견없이 들었다. 하나님이 각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있으며,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가다듬어진다는 그 설교들이 내게 위로가 된다. 아마도 오랫동안 "넌 별볼일 없는 죄인이야" 하는 설교속에서 너무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사하시고, 키우셔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과 이 메세지를 공유하고 싶기도 하다. 그럴려면, 내가 조금 더 단단해져야 하지만, 부족하나마 이제 걸음을 떼어보기로 한다.




고통의 문제

C.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홍성사

*몇 문장을 발췌했습니다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는 많은 지식보다 작은 용기가, 큰 용기보다 적은 인정이,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가장 작은 사랑이 더 도움이 된다는 확신 외에는 독자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주가 그토록 나쁜 곳이라면, 아니 제가 말한 바의 반만큼이라도 나쁜 곳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처럼 나쁜 것을 지혜롭고 선량한 창조자가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모든 인간은 남의 윤리규범이 아니라 자신의 윤리규범에 따라 유죄선고를 받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제가 지금까지 묘사한 바, 인간의 오랜 영적 준비에 뒤이어 일어난 격변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고통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는 날마다 고통스러운 세상을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실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의로운 존재'라는 믿을 만한 보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고통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도덕 기준이 낮은 사람이 자신보다 현명하며 도덕 기준도 더 높은 사회에 편입되어 그들의 기준을 점차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별 관심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조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와 연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비열한 방식으로 행복해지느니 차라리 고통받는 편을 바랍니다


우리는 은유적으로만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님이 만들고 계신 작품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특성을 갖추게 될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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