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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Feb 11. 2021

내가 나를 더 사랑했어야 했는데

언니 힘내세요

이글은 현재 위암을 앓고 있는 언니를 생각하며, 내가 언니인양,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 소설이 될것같습니다. 그런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이민와서 40여년간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매일 내다보았던 큰길가에 새로이 눈에 띄는 모습이 있다. 길가에 활보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너무 활기차보인다. 얼굴표정이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입김과, 추위 때문에 발갛게 물든 상기된 표정이 떠오른다. 저렇게 걸어다녔었는데, 이제는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것으로도 지친다.


전조 증상은 너무나 많았는데, 왜 끝자락에서야 병에 걸린 걸 알게 됐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막힐뿐이다. 입맛이 없어진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시나브로 말라가는데, 누군가 "말라보인다"라고 말하는 그 말을 듣기가 싫었다. 


예전부터 당뇨를 앓고 있어서, 당뇨약의 부작용인가 싶다며, 가정의도 약을 여러번 바꿔서 주곤 했다. 차도가 없자, 약을 잠시 끊으라고도 말했다. 그렇게 황금같은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어느날 가정의를 방문했는데, 그가 "왜 또 오셨나? 치매가 오셨나?"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가정의와는 온 가족이 알고, 여러 도움을 받아서 허물없는 사이이긴 하지만, 아파서 갔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서운했다.


병원갔다온 그날 배가 아파서 가정의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위장약이라며 약을 조제해주었다. 그 약을 먹고나니, 배 아픈것이 조금 가시는 것같았다. 가정의에 대해 안좋게 생각하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가정의가 울트라사운드부터, 피검사등 여러가지 검사를 하자고 했다. CT 촬영, 조직검사 등 모든 스케줄이 줄줄이 잡혔다.


코로나 시즌이라, 모든 검사가 쉽지만은 않았다. 남편도 이제는 늙어가고, 귀에 보청기를 하고부터는 말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 그전부터 소통에 문제가 있던 우리 부부는 서로 의지하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져간다. 의사가 알려준 곳으로 울트라 사운드 검사 받으러 가야 하는데, 남편은 다운타운에 가서 차를 주차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데려다줄테니, 올때는 버스를 타고 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이야기를 하니, 엄마가 나보다 더 화를 내셨다. 아내가 아픈데, 버스를 타고 오라고 말하는 남편이 어디있냐며 노발대발하셨다.


나는 거의 평생 내차를 운전하고 다녔다. 현재 남편이 운전하고 있는 차도 내가 산차인데, 나는 최근에 면허를 잃어버렸다. 건강이 예전같지 않아선지, 그때의 사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혈당 쇼크가 왔던 것같다. 나는 참으로 나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았다. 73세인 지난해까지 한 회사에 다녔고, 40주년을 맞이해서 은퇴를 했다. 차 부품을 만드는 공장인데, 나는 회사에 가면 정말로 살맛이 났다. 일잘하는 것으로는 나를 따를자가 없었다. 그리고 유창한 영어가 아니어도, 동료들과의 대화는 어려움이 없었다.


나를 알아주고, 좋아해주고, 인정해주는 회사가 나는 좋았다. 크리스마스 때나,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이 되면, 작은 선물이라도 동료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한국에 갔다오는 동생에게 꽃무늬 덧버선을 20여장 사다달라고 해서, 그걸 돌렸는데 그게 참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일할 체력이 되지는 않았었다. 4년전에는 유방암을 앓았었고, 수술까지 했다. 그리고 사고로 운전면허를 박탈당했을 때 회사를 그만둘만한 기회가 있었다.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기뻐하는 동생에게 "나도 그만 둘란다"고 호기롭게 소리치기도 했었다. 


왜 나라고 그만둘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집에서 뭐하려고?" 하면서 시큰둥한 가족들의 반응을 보면, 나또한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할수 있는 데까지 일을 해볼 생각을 했다. "회사 그만두고 몸을 돌보라"고 말하는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새벽5시쯤 일어나 준비하고 회사엔 언제나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렇게 하루종일 일하다 집에오면 녹초가 되어 일찍 잠이 들었다. 


코로나로 집에서 있었던 시간이 길어지면서, 딸과 아들이 도와준 덕분에 작년 8월에 입사 40년만에 명예롭게 퇴직할 수 있었다. 그즈음, 동생들이 언니가 잘먹지 못하고 말라간다고 걱정이 대단했다. 단순히 입맛이 없다고만 말하곤 했는데, 뭐라고 표현할까? 어떤 음식을 봐도, 먹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죽들을 쒀오면 그 정성을 생각해서 한번씩 먹어주는데, 다 갈아서 쒀온 죽도 넘기지 못하고 입안에서 겉도는 것을 뱉아낸다.


나는 아무래도 "표현력"이 부족한 것같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런 불치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울트라 사운드를 끝으로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됐다. 그날 울트라 사운드 검사할때 딸이 와서 함께 했다. 딸이 있으니 든든하다. 조직검사할 때도 딸이 데리고 갔다. 딸은 다정다감한 편은 아니다. 나 역시 "육두문자"를 수시로 쓰는 고약한 할망구이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딸이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아찔하다. 남편은 다정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80이 가까와오면서, 그전에 하던 일들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나의 아픔에 진심으로 연민을 표해주었다면 그동안 서운하게 했던 것을 다 용서해주련만, 남편은 스스로를 챙기기에도 힘이 벅차보인다.


남편에 대해서 생각만 하면 화가 솟아오르지만, 그걸 엄마에게 들으면 나는 더 참을 수 없게 된다. 내가 타박하는 것은 그렇다해도, 그래도 내 남편인데, 나를 위해 아이들을 위해 해주는 것도 많은데, 엄마가 밀어부치면 나도 모르게 엄마에게 역정을 내고 만다.


구순이 넘은 엄마에게 내가 너무 하는 것을 알면서도, 동생들은 다 잘 살아나가는 것만 같고, 큰언니라는 내가 남편에게 사랑도 받지못하고, 똑똑하지도 못하게 살아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면, 그 모든 화가 만만한 엄마에게 간다.


첫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온날, 시골사는 동생이 보러왔다. 동생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모두 얼굴들이 새까매졌다. 엄마는 양로원갈 마음의 준비를 하시다가, 딸의 발병소식에, 매일을 울면서 보내신다. 모두에게 미안하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 말을 주의해서 듣고, 건강을 챙겼더라면, 이보다는 일찍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입맛이 떨어지고, 몸무게가 빠질때, 일을 가는게 아니라,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한들 너무 늦었다.


항암치료후 동생이 떠난뒤 자러 들어갔는데, 온 세상이 빙빙도는 느낌이다. 그날 딸이 함께 있다가 응급차를 부르고, 병원으로 들어왔다. 몸밖으로 피가 빠져나가, 심각한 피부족에 봉착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병원에 있다. 


병원입원이 어려운 때인데, 벌써 2주차가 되어간다. 병원에서는 몇번 더 수혈을 받았다. 그리고 혈변을 방지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를 매일 1회씩 5회 받았다. 첫날에는 딸이, 둘째날에는 아들이 병간호를 해줬지만, 그 이후에는 코로나 때문에 1주일에 1번 3시간만 허용하여, 딸의 얼굴을 오늘까지 두번 봤다. 


중환자실에서도 있었고, 그후로 임시병실에 있다가 암병동으로 옮겨져 치료받고 있다. 거의 죽음앞이라고 느낀적이 있었다. 그래서 유서를 써놔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은 조금 마음의 안정이 된 상태이다. 딸은 때마다 전화오고 해서 온 병동 사람들이 딸의 이름을 안다. 의사와도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내 병세를 확인하는 것같다.


동생중, 그애가 어렸을 때 내가 키웠던(?) 민디가 나와 자주 연락한다. 스마트폰 사용이 서투른 나에게 딸은 전화오면 젖히기만 하면 되는 전화를 갖다줬다. 그래서 딸은 우리 가족들에게 나의 소식을 전하고, 동생은 친정식구들에게 내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다. 동생은 "언니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 그동안 마음을 주지 않고, 멀어져갔던 교회 가족들이 기도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내 삶이 나혼자만의 삶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방사선 치료하려면,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 그 일을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맡아서 해준다. 작은 병원차에 두명의 직원이 함께 하는데, 참으로 친절한 이들도 있는 반면, 의무적으로 하는 이들도 있다. 방사선실에서는 한인학생을 만났는데, 통역으로 도와주기 위해 와있었다. 뉘집 자식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상냥하고, 어여쁜(?) 남학생을 처음 본것 같다. 그런 말을 했더니, 딸이 젊은 남자를 좋아한다며 놀린다.  전반적으로 캐나다의 의료시스템은 믿음직스럽다. 딸이 주차비를 내는 것을 제외하면 이 모든 것이 무료이니 좋은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이 든다.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음식을 잘먹지 않는다는 점이다. 먹어야 항암치료도 받고, 일어설텐데, 음식이 마치 원수처럼 보인다.


내가 불만을 표현할 곳은 엄마밖에 없었다. 그래서 엄청 싸우기도 했다. 그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 동생에게 엄마 안부를 물었더니, 언니 걱정에 아프지도 못하신다고 말해준다. 병원에 들어오기 얼마전에 엄마 미역국을 먹고싶다고 했더니, 바로 만들어보낸대서, 한숫가락밖에 먹지 못하는데 그 때문에 만들거 없다고 했더니, 엄마는 "반숫가락"을 먹는대도 만들어 보내겠다고 말해 나를 울렸다.


오늘도 딸이 면회를 왔다. 내가 이런 딸을 나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캐나다에 이민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부에서나, 인생수업에서나 딸에게 도움된 적이 많지 않았다.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토론토시에서 운영하는 "데이 케이 센터"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저한테 욕이나 한바가지 해줬던 나를 위해, 일도 빠지면서 봉양하고 있다. 어느날은 전화기가 고장났다고 간호사에게 말하니, 딸에게 전화했다. 딸집에서 병원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전화를 고쳐주겠다고 밤에 내려왔다. 오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더러운 빨래감을 가져가고, 새옷을 가져오는 것도 그애 일이다. 병실에는 들어올 수 없으므로, 병원 입구에서 간호사를 접선하여, 물건을 올려보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내가 자주 다녔던 중고매장을 이제는 가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언제나 착했던 내 아들이 낳은 우리 귀여운 손녀의 재롱을 더 봤으면 좋겠다. 어디서 그런 재간둥이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를 위해 애써준 의사, 간호사들에게 선물을 마음껏 하고싶다. 내 덧버선이 예쁘다고 감탄해서, 딸에게 남은 덧버선 가져오라고 해서 간호사와 청소부에게 나눠줬더니 좋다고 한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모두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생은 언니는 이제는 베풀 걱정하지 말고, 사랑을 받아도 된다고 말한다. 내가 그동안 한게 없는데, 동생들은 언니에게서 받은 사랑은 측량할 길 없다고 말한다. 피에 염증이 생겨서 며칠 더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앞으로 또 3번의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고, 그 다음에 수술을 한다고 했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없으니, 동생말대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주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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