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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Mar 10. 2021

C.S. 루이스를 만나다

"고통의 문제"를 통해서 발견한 것들 (2)

나의 개별적인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고, 누군가가 먹여주는 것을 먹으며 배불러했다. 이제서라도 "나와 하나님"이라는 개별성이 무얼 의미하는지 조금 알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 여정이 어떻게 굴러갈지 나자신도 잘 모르겠다.

몇년전, 수년만에 어떤 분의 장례식장에서 옛친구를 만나게 됐다. 그 다음날 점심을 같이 하며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와 다른 공간에 살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내딸의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고 났는데, 그녀가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또한 나눠줬다. 그런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다는 것도 놀랄 일이었고, 또한 내게 마음의 병이 심하게 든 딸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친구의 표정도 심각해졌었다.


그렇게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면서 우리는 조금씩 더 진지한 만남을 이어간다.


"고통"을 "나의 불찰"과 "나의 불행"에만 가두고, 그안에 갇혀있으면 누구와도 올바른 소통을 할수가 없게 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됐고, 아직도 어떤 일이 다가오는지 모르면서 이 순간들을 견디고 있다.


고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보다 민감해지고, 하나님께 나를 내려놓는 연습을 할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많은 길을 열어놓으셨다. 하나님의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다는 고전적인 해석부터, 믿음의 친구들, 좋은 책들, 경험들에도 녹아들을 수 있다는 어떤 목사의 설교도 내게 위로가 된다. 내안에 갇혀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내게 울림을 주었던 루이스의 문장들이 누군가에게도 닿길 바라며...


그러나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의 문제

C.S. 루이스 지음

이종태 옮김

홍성사

*이곳에서  문장들을 발췌했습니다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꺽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체 설계도 안에서 그들을 위해 정해 놓으신 자리가 곧 그들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도달할 때 비로소 그들의 본성은 완성되고 행복이 찾아옵니다. 즉 우주의 부러진 뼈가 제자리를 찾고 고뇌가 끝나는 것입니다.


말로만 자신이 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야만적인 교리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악함을 지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됩니다.


아마도 구원이란 이처럼 영원한 순간들을 말소시켜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겸손해져서 자기의 부끄러움을 영원히 지고 그 일이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음을 기뻐하며 온 세상이 그 일을 알게 되는 것을 기꺼워하게 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전적 타락'의 교리를 복권시키려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저는 전적타락의 교리를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볼때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스스로 타락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깨닫지 못할 것이고, 경험적으로 볼 때에도 인간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감정적인 효과가 아니라 지적인 효과입니다. 즉 저는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끔찍한 피조물이라는 점,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우리가 보기에도 끔찍한 피조물이라는 점을 믿게 하고자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그것을 사실로 믿습니다.


또한 세상이 그처럼 계속해서 신의 간섭을 통해 지탱되고 교정된다면, 어떤 중요한 것도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은 세상,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확실성을 잃음으로써 눈앞에 있는 선택사항 중 무엇을 택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세상, 따라서 선택사항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잃는 세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왜 우리의 치료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에 대한 첫번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온 의지를 되돌려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른바 '나의 삶'이 즐겁게 느껴질 동안에는 그 삶을 하나님께 양도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의 삶'을 덜 즐겁게 만들고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된 행복의 원천을 빼앗는 것 외에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명백한 자족의 위험은, 우리 주님이 무능하고 방탕한 자들의 악을 세속적인 성공에 이르는 악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대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창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삶에 만족할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럴 위험이 큽니다.


오히려 저는 아주 큰 고난을 겪는 사람들에게서 그만큼 큰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대체로 더 나빠지기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을 보았고, 전혀 기대치 않았던 이들 또한 인생의 마지막 병을 앓으면서 용기와 온유함이라는 보배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의 유익은, 고난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안전은 우리 마음을 세상에 안주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의 행복한 사랑, 아름다운 경치, 교향악,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축구경기에는 그런 성향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행길에 기분 좋은 여관에 들러 원기를 회복하게 해주시지만, 그 여관들을 우리집으로 착각하게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악한 인간이 지옥의 선고를 받아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모습 그 자체가 이미 파멸을 뜻한다고 자유롭게 -그 두 개념은 결국 같은 의미이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특징은 '자기 자신 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지옥의 교리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대답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당신이 정말 하나님께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씻어 주고 모든 장애를 제거하며 모든 기적적인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용서받을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을 내버려두는 것입니까? 아,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은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에게 내릴 지 모르는 저주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장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아내나 아들에 대한 것도 아니고 네로나 가룟 유다에 대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떤 동물들의 경우 그 동물들 자체가 불멸성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그 주인의 불멸성 안에서 자신의 불멸성을 얻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천국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하늘에 있는 파이'에 침을 흘린다는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지금 이곳에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의무를 등진 채 행복한 별세계의 꿈속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말을 듣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에 정말 파이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파이가 없다면 기독교는 전부 거짓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책들은 비밀의 실로 함께 묶여 있다는 사실, 자신이 평생토록 찾아온 바를 실현해 주는 듯한 풍경, 취미생활만 생각해 보아도, 다른 이들은 이상하게도 알아채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매력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서로에게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영혼에 쓰여진 비밀스러운 서명이자 전달할 길 없고 달랠 길 없는 소원이며, 아내를 만나고 친구를 사귀고 직업을 선택하기 전부터 갈망했던 것이자 아내나 친구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된 죽음의 자리에서조차 여전히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이것도 존재합니다. 이것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나의 자리는 나 한 사람, 오직 나 한 사람에게 맞추어 만든 자리처럼 보일 것입니다. 바로 내가 그 자리에 맞추어 -장갑이 손에 맞추어 한땀 한땀 만들어지듯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동경하는 그것은 여러분을 자아밖으로 불러냅니다. 그것에 대한 갈망은 여러분이 그 갈망을 버릴 때에만 비로소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법칙입니다. 씨는 죽어야 살고, 떡은 물 위에 던져야 돌아오며, 사람은 목숨을 잃어야 목숨을 얻는 법입니다.


모든 자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기 다르게 사랑하실 생각을 갖지 않으셨다면 왜 우리를 개별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겠습니까?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의 연합은 거의 본질적으로 인간의 끊임없는 자기 드림(self-giving)- 자신을 개방하고 열어젖히며 양도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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