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파수 찾기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에게는 각각의 고유한 주파수가 있다고.
마치 새벽에 혼자 듣는 라디오처럼,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신호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신호를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다.
삶이 너무 시끄러워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남의 주파수에 맞춰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일까.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누군가가 좋아할 만한 말투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우린 조용히 자기만의 진동수를 낮추고, 흐리고, 때로는 꺼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어긋난다.
똑같이 웃고, 비슷한 말들을 하고, 정해진 리듬에 발맞추고 있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서 작은 잡음이 난다.
그 잡음을 우리는 종종 ‘피로’라고 부르고
또는 ‘지침’이라고 부르고
어쩔 때는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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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말했다.
“네가 누구인지 스스로 묻기 시작하는 순간,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내가 생각하는 고유의 주파수란,
그 질문에 대답하려고 아주 천천히 귀를 기울이는 과정과 닮아 있다.
쉽지 않다.
자신이 아닌 것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정신의 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력은 생각보다 무겁다.
사람들은 흔히 성장하면 가벼워지는 줄 안다.
하지만 실은 그 반대다.
성장은 나를 둘러싼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나다운 것들을 붙잡기 위해 더 견고해져야 하는 일이다.
고독해지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의 주파수를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낮에는 조금 외롭고,
밤에는 조금 깊어진다.
하지만 그 깊음 속에서
아주 작은, 하지만 분명한 떨림이 들리기 시작한다.
아, 이게 나의 소리였구나.
여기, 이 온도와 이 속도와 이 감정이 바로 내 삶의 진동이었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세상이 조금 조용해진다.
그리고 삶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남의 소리를 따라가느라 지쳐 있던 마음이
처음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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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내 주파수를 다시 조율하는 중이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아침 햇살을 조금 더 길게 바라보고,
카모마일 차향이 식기 전에 한 모금 더 천천히 마시고,
사람들에게 억지로 맞추려던 말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내 마음의 신호가 어디에서 울리는지
가만히 들어보는 일.
살아보니,
삶의 성과란 결국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보다
‘얼마나 나답게 울렸는가’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요즘 당신의 주파수는 어디쯤에서 울리고 있나요?
혹시 아직 잘 들리지 않더라도 괜찮다.
밤하늘이 깊어질수록 별빛이 더 선명해지듯,
당신의 주파수도 어느 순간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당신을 향해 신호를 보낼 테니까.
그때,
부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기를.
부디 그 떨림이 당신의 삶을 데려갈 곳을
믿어보기를 바란다.
— 시월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