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포온옥: 금기된 주술의 기록

2화:봉첩(封帖)의 비밀: 하늘을 속이는 스케줄

by 월하수희

쉰 새벽, 귀신에라도 홀린 걸까? 오래된 책에 귀신이 산다더니 진짜일지도 모른다. 방금 전 벌어진 현상은 도저히 단순한 착시로 치부할 수 없었다. 코끝에는 여전히 진득한 묵향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맴돌았고, 인장이 머물렀던 손가락 끝은 아리고 화끈거렸다.

밖으로 나와 전 팀장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자마자 요란한 경적 소리가 울렸다.

-빵

'아이 뭐야 저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녔나? 난 왜 못 봤지? 팀장이 아니라 사실은 대표라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

억 소리가 날만큼 번들거리는 스포츠카 안에서 전 팀장이 클랙슨을 울렸고 그는 내리지 않았다.

"타세요."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그가 창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려는데,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얘기 좀 하다가 갈게요. 데려다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오해받을까 봐."


'매너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맞는 말만 하니 화도 못 내겠네.'


“아네.. 근데 무슨 일로..”


“취미가 고서 읽기라면서요?.”


‘나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아? 혹시?.


핏기 없는 내 얼굴에 순간 불길이 치솟았다.


“아, 실은. 김서희 씨 제가 뽑았어요.”


‘아! 혹시가 역시?근데 나를 왜?.’

속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를 왜?.”


“입사지원서를 다 붓펜으로 썼더라고요. 풋, 촌스럽게.”


'이런 촌스러운 헛다리 정신 차려 김서희!'


“요즘 출판사들, 종이책 찍어서 창고에 쌓아두는 미련한 짓 안 합니다. 다들 플랫폼 권력 잡으려고 혈안이죠. 그런데 그 살벌한 디지털 판국에 붓펜이라니.”


피식하고 배어 나오는 명백한 그의 비웃음에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들고 있었다.


“나처럼 속도에 미친놈이 모는 스포츠카 안에서, 굳이 반대 방향으로 오리발을 젓겠다는 사람 하나쯤 태우는 것도 재밌지 않아요? 하하”


‘뭐? 오리발? 내 소중한 붓을 오리발에 비유하다니! 미친 거 아니야?… 아니지, 센스가 미쳤는데? 섹시해.’


찰나의 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카인과 아벨 또는 루시퍼와 미카엘이 피 터지는 대전을 치르고 있었고 마음의 손바닥으로 두 뺨을 철썩철썩 치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팀장님 웃는 거 처음 봐요, 설마 제가 여기서 이렇게! 오리발 젓는 거 상상하고 계신 건 아니죠?.”


나는 훽하고 돌아 두 주먹을 쥔 채 조수석 등받이에 툭 얹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쏘아봤다.


"풉! 푸하하하!."

'정답이구나! 이 몹쓸 상사놈아!.'


한참을 웃게 놔두면서도 나는 삐죽거리는 입술을 풀지 않았다.

그제야 좀 머쓱해진 표정을 짓더니 뒷 좌석으로 손을 뻗는다.

'아 이 와중에 스쳐 지나가는 칼날 같은 턱선, 멋있는 거 뭐지?'


“이거요, 흔히 보는 목판본 아닙니다. 종택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유일한 필사본이에요 드릴게요.”


'이럴 수가! 이건 어제 내가 들여다본 동계 선생 전집이다!'


“어머! 어제 저도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됐는데. 근데 왜 저를 주세요?.”


“그 댁에서 제게 넘기셨는데 저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을 거 같아서,,,”


줄임표를 늘어놓으며 턱을 쓰다듬는 그의 표정은 정말 묘했다.


“아! 대신에 제 궁금증 하나만 풀어주세요.”


“어머! 이 귀한 걸 받고 제가 알려드릴게 뭐가 있을까요? 사실 어제 저도 우연히 이 책을 보게 됐거든요? 이름이 왠지 낯익어서 밤새 관련 논문이랑 전집 해제(解題)를 좀 찾아봤는데, 와... 이 분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 그냥 선비가 아니라,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지독한 원칙주의자랄까?.”


전 팀장은 또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앞 만 보며 묻는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제가 밤을 새우고 깊게 파봤죠, 그 서슬 퍼런 광해군 시절에 어린 영창대군을 살려야 한다고 목숨 걸고 상소를 올리시다니, 사실 그 자리에서 즉시 처형당하지 않은 게 오히려 기적 아니에요? 덕분에 10년 넘게 유배 생활을 하셨지만요. 병자호란 때는 또 어떻고요.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려니까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자결까지 시도하셨다면서요! 세상에, 나는 종이에 손가락만 살짝 베여도 온몸이 저릿한데... 그나저나 이 분 정말 명줄이 지독하게 길더라고요. 그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변변한 치료도 못 받았을 텐데 말이에요.”


나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가만있자 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적이 최근에..'


“원래 이렇게 말 많은 사람이었어요?.”


'아 깜짝이야! 독심술이야?.'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대화가 통하는.. 저만 그렇게 생각했나? 죄송해요.”


생물 오징어가 마른오징어처럼 쪼그라들고 있을 때쯤... 그 마른오징어를 순식간에 버터구이 오징어를 만들 정도로 감미로운 목소리가 퍼진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재밌어요 서희 씨.”


'아이코 심장이야! 미쳤나 봐!.'


나는 이 좁고 위험한 공간에서 빨리 내려야 했다.


“근데 궁금한 건 뭔데요? 알려드릴 게 있으려나?.”


“봉첩은 아시죠?.”


'이 사람이 나를 뭘로 보고? 나 김서희야! 이름도 참 예스럽게 생겼잖아?'


나는 전 팀장이 건네준 고서들을 조심스레 넘기며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럼요. 이런 고서에서 봉첩은 의미가 좀 더 깊어져요. 한마디로 종이 사이에 숨겨진 ‘비밀 주머니’ 같은 거랄까? 어라? 세상에, 이런 거요!”

실물 자료(영감의 원천) 직접 봉첩을 뜯어 발견한 의문의 종이들

중간부터 책장을 넘긴 덕분일까, 아니면 이 책이 오직 가문 안에서만 전해진 가승본(家乘本)이라 유독 정교한 걸까. 손가락 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유독 두툼하다 싶더니, 이내 봉인된 틈새가 벌어졌다.

홀린 듯 내 손가락이 그 비밀스러운 주머니 속을 파고들었고,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내게.. 아니.. 그 종이에게 바짝 다가왔다.


“바로 그거 예요. 제가 궁금했던 거, 도무지 모르겠어요 뭔지 아시겠어요?”


겹친 한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겉장보다 훨씬 얇지만 명주실처럼 질긴 결을 가진 의문의 속지였다.


“아니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요. 마치 요즘 쓰는 현대식 다이어리 속지 같네요?

위에 큰 글자 이거는 '유(酉)' 자인데... 시간을 말하는 걸까요? 닭의 시간,

그러니까 해 질 녘인 오후 다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요. 이걸 왜 맨 위에 써놨을까? 그러나 저러나 이건 정말 누군가의 일과표예요. 팀장님, 이거 보세요. 1614년 갑인년 8월...

정말 가는 붓으로 촘촘히도 적었네요. 명필이에요. 그런데 시작은 슬프게도'부친상 5일장이에요.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분은 일상으로 돌아가요. 닭을 잡고, 날씨를 체크하고,

개성까지 먼 길을 다녀오고... 그런데 여기, 대우(大雨)? 가뭄 끝에 비가 내린 걸까요?

왜 이렇게 크게 적어놨지? 잠시만요. 1614년… 갑인년 8월……. 아! 어제 제가 분명히 봤어요.

동계 선생 전집에 보면 광해군에게서 사형을 겨우 면한 그해 여름을 ‘팔도가 가뭄에 타들어 갔다’고

묘사하거든요.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이 표에만 8월 23일에 억수 같은 비가 왔다고 적혀 있어요.

마치... 이 기록만 혼자 다른 역사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출판사의 잡무를 맡고 있는 나는 소설가가 꿈이었다. 이 신비로운 고서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무한한 꿈을 펑 터뜨리는 묵직한 목소리

“재밌네요.”

“재밌으면 아까처럼 웃으시든지요.”

하! 제가 좀 야박하죠? 근데 정말 재밌어요. 또 특이한 건 없고요?.”

“있어요. 딱 봐도 모르시겠어요? 이 묘하게 같은 거 같으면서 다른 테두리들이요. 이토록 섬세하게 한 줄 한 줄 격자무늬로 칸을 나눠놓고 물결 표시 인지 몰라도 아주 정성을 들여 줄을 맞췄어요. 얼핏 보면 요즘 나온 디자인이라고 생각들 정도예요.”

아주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따가운 시선을 받은 후에야 내가 얼마나 얼빠진 얼굴이었는지 알았다.

“고마웠어요. 다음에 또 얘기해요.”

“아! 볼일 다 보신 거예요? 그러면 저는 이제 버스를 타고 지하철 타고 그렇게 출근하겠습니다.. 네네. 정말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가져가서 보세요. 드리는 거예요. 저한테는 의미도 없고 궁금증도 꽤... 풀렸어요. 고마워요.”

‘꽤애? 괘씸하네! 진짜 이렇게 내리라는 거야? 정말 야박하네.’

시계를 보니 아직 출근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무거운 고서들을 다시 올려다 놓으려 집으로 올라갔다.

책상 위에 책을 툭 내려놓는데, 어제 쓰다 만 붓펜이 눈에 들어왔다.

전 팀장이 한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붓펜 때문에 나를 뽑았다고? 어이없어.

하지만 부정할 순 없었다. 나는 '' 미치광이가 틀림없으니까.

한글이든 한자든, 먹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그 질감이 좋았다.

나는 붓펜을 들어 종이를 펼쳤다.

전 팀장의 성인 ‘전(錢)’ 자를 쓰고, 얄미우니까 돌 ‘석(石)’ 자를 붙였다.

능글맞은 구석이 있으니까 뱀 ‘윤(蜦)’ 자까지.

붓끝을 굴려 그의 이름을 완성하고는 배를 잡고 혼자 낄낄거렸다.

“역시 명필이야. 잠시만, 그 고서 필사본들도 대단하던데. 한번 비교해 볼까?”

고서들이 심상치 않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제목부터 으슬으슬한 ‘기문둔갑장신법’부터 음양오행이 가득한 비법서들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한 것은 단연 《현포온옥(玄圃溫玉)》 세 권이었다.

‘이 집안, 술사 집안이었나? 근데 술사 필체가 뭐 이렇게 좋아? 마치 찍어낸 것 같잖아.’

비틀림 한 줄 없이 칼날 같은 필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책장을 넘겼다.

연도별로 책을 정리하려던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연도보다 필체의 주인을 찾아 분류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그렇게 책을 나누어 보니 어라? 이럴 수가 있나?

200년을 관통한 이 책들은 기이하게도 딱 두 부류의 필체로 나뉘었다.

잠시 멍하니 필체들을 번갈아 비교하는데, 갑자기 손끝이 덜덜 떨리며 아랫배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말도 안 돼…!”

월, 일 연재
이전 02화현포온옥: 금기된 주술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