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포온옥: 금기된 주술의 기록

1화: 친전(親展), 죽은 자의 초대장

by 월하수희
나는 오늘 닿지 말았어야 할 오래된 연서를 펼쳤다. 아니,
그것은 나를 살리지 말라던 어느 남자의 마지막 유언이자,
나를 죽이러 올 저주의 초대장이었다.


“삐용삐용—”

적막한 회의실에 날카로운 경보음이 찢어지듯 울렸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등 뒤로 뾰족한 말들이 화살처럼 꽂혔다.

-벨소리만 듣고 아버지인 줄 어떻게 알아?-

-회의 중에 나갈 건 또 뭐야? 아주 회사가 놀이터지-


따끔거리는 비아냥들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멈칫하던 그때,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서늘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급한 분이 아버지인가 보죠. 이쪽 일을 하면서 그렇게들 눈치가 없습니까?”

전석윤 팀장이었다.


가볍게 그에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온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아휴, 진짜 아빠는….”

벽에 기대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미간에 힘을 주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아빠! 이 시간에 연락하면 나 심장 멎는다니까.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대체 이게 뭐야?”


수화기 너머, 투박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 버리려니까 통… 버릴 물건이 아닌 것 같아서. 서울대 나온 네 오빠 놈은 보여줘도 모른다는데, 우리 딸내미는 어릴 때 천자문도 다 뗐잖아. 이런 별난 것도 좋아하고. 어때, 이거 버려?


아버지가 보내온 사진 속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고서가 찍혀 있었다.

‘桐溪續集 五 동계속집 5? 동계? 누구더라?.'


"아빠, 5권까지 있는 문집이면 어쨌든 업적이 대단한 분의 기록인 건 분명해. 일단 퇴근하고 들를게!”


전화를 끊고서야 비틀대며 겨우 주저앉은 몸을 일으켰다.

나를 낳다 돌아가신 엄마 대신, 홀로 우리 남매를 키워낸 아버지였다.

그 때문일까. 오빠는 언젠가부터 나를 원수처럼 여겼고, 이제 내게 남은 가족은 오직 아빠뿐이다.

급성 심경색으로 쓰러지셨던 아버지를 겨우 살려냈던 그날 이후, 내게 이 벨소리는 곧 생명줄과 같았다.

아빠가 돌아가시면, 나도 살 이유가 없으니...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데, 회의실을 가장 먼저 나선 전 팀장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프면 조퇴해. 귀신인 줄 알았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뒤이어 나오는 직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한 채, 화끈거리는 두 뺨을 감싸며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커다란 사과 박스를 낑낑대며 겨우 들고서 엘리베이터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했다. 아까 전 팀장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 치렁치렁한 긴 생머리.


“머리를 좀 자를까? 정말 처녀 귀신같나? 내일부터는 볼터치라도 좀 하고 나가야지.”


겉옷을 벗고 샤워를 하려다 거실 한복판의 사과 박스와 눈이 맞았다.

커터칼을 가져와 조심스레 테이프를 그었다. 매캐한 곰팡이 냄새를 예상하며 마스크와 장갑까지 꼈지만, 웬걸. 상자를 열자마자 진득한 묵향이 거실 가득 배어 나왔다.

“곰팡이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보존 상태가 왜 이렇게 훌륭해? 누가 이걸 버리려 한 거야?”


훑어보니 동계 선생의 책은 2권과 5권뿐이었고, 그 아래에는 훨씬 더 오래되어 보이는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소파에 앉아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던 그때, 낡은 편지봉투 하나가 툭 떨어졌다. 바스러질 듯 얇은 종이 위로 번진 먹글씨.

‘桐溪先生 親展 (동계선생 친전)’


봉투 안에는 달력일까? 정성 들여 여러 칸을 나눈 기묘한 종이 한 장과, 번진 먹선들 사이로 도무지 뜻을 가늠할 수 없는 문장들이 엉겨 붙은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빈칸들은 젖혀두고 허공에 손가락으로 획을 따라 그으며 읽기 시작했다.


‘殺我者 必汝也 (살아자 필여야)’ ‘九步之地 卽吾之墓 (구보지지 즉오지묘)’

-나를 죽이는 자, 반드시 너여야 한다…? 아홉 걸음의 땅이 곧 나의 무덤이라니...대체 뭔 말이야? 잘 못 읽은 건가?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석윤 팀장]. 이 시간에?

— 괜찮아요? 오늘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얼결에 벌떡 일어났다.

— 책 좋아하는 건 물론일 테고. 입사 지원서에 한문 자격증 2급 있다고 적어놨던데, 보여줄 게 하나 있어서요. 한 시간만 일찍 일어나세요. 집 앞으로 갈게요. 내일 아침에 뵙죠.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소리 없는 휴대폰을 향해 투덜거렸다.


“뭐가 이렇게 예의 바르면서도 일방적이야?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 애매한 사람이네. 근데 우리 집 주소는 그렇다 쳐도, 그 사소한 자격증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심장이 미묘하게 빠른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결국 한 시간 일찍 일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화장대 앞에 앉았다.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말며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읊조렸다.


“처녀 귀신은 면해야지. 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지만 바른말만 골라하고, 저승사자처럼 서늘하지만 또 그것이 너무나 매력적인 절대다수의 이상형 전 팀장에게 설레서 이러는 건 결코 아니야.”


시계를 보니 겨우 오전 7시 30분. 시간이 이토록 안 가다니. 커피라도 한 잔 내리려 거실로 나오다 덩그러니 놓인 사과 상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아차, 이걸 그냥 두고 들어왔네. 시간도 남았는데 뭐가 더 있나 좀 볼까?”


상자를 다시 헤집자 고서들 사이로 허옇게 삐죽 튀어나온 손바닥만 한 수첩이 보였다.

영문으로 "NOTE BOOK"이라 쓰인 세련된 표지. 하지만 뒤집어보니 선명하게 찍힌 일제강점기 문양에 심장이 콕 찍힌 듯 아파왔다.


**'실물 자료(영감의 원천)'**

어쨌든 제일 신선해 보이는 이 녀석조차 100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한글이 적혀 있을 줄 알았으나 속지는 온통 빽빽한 한자였다.


“이건… 불경인가?”


한자를 읽어 내려가다 몇 장을 더 넘기자 드디어 반가운 한글이 나타났다. 하지만 내용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법전인지 주술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문장들.

**'실물 자료(영감의 원천)'**

“우치슈마 훔 페이… 아비라 운 캄?”

그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은 순간, 혀끝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아까보다 훨씬 진해진 묵향이 이제는 검은 구름처럼 사과 상자에서 피어올랐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묵향은 안개처럼 거실을 잠식해 나갔다.


“아야!”


책을 쥔 엄지손가락 끝이 불에 덴 듯 아려왔다. 손끝에서 붉은빛이 번져 나갔다. 인장이었다.

노트를 손에서 떼어내려 했으나 자석이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검은 안개는 이제 집 안 전체를 집어삼킬 듯 소용돌이쳤다.

‘이건 꿈이야…!’


아득히 정신이 멀어지던 그때였다.

“월월월! 월월월!!”


날카로운 개 짖는 소리. 동시에 전 팀장의 전용 벨소리가 고요를 깼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지옥 같던 검은 안개는커녕 연기 한 줄기 보이지 않았다.

'환상이었나?'

하지만 화끈거리는 내 엄지손가락 밑에는,

타들어 가듯 붉은 인장이 조용히 불을 머금은 채 새겨져 있었다.

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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